
작성일 : 2017-06-15 12:17
1581(宣祖14)~1643(仁祖21)(忠翼公) 초명(初名)은 시언(時言) 자(字)는 자중(子中) 호(號)는 하담(荷潭), 경순대왕(敬順大王)의 후손(後孫)으로 비안현감(比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1605년(宣祖38) 정시문과병과(庭試文科丙科)로 급제(及第), 삼사세자시강원(三司世子侍講院)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611년(光海3)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향시(鄕試)를 주관(主管)할 때 시제(詩題)에 왕(王)의 실정(失政)을 비유(比喩)한 문제(問題)를 출제(出題)했다하여 종성령해(鍾城寧海)로 유배(流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여러 관직(官職)을 거친 후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活躍)하였고 난(亂)이 평정(平定)되자 응교(應敎) 문학(文學)에 이어 1627년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부임(赴任) 경주(慶州) 숭혜전(崇惠殿)을 중건(重建)할 것을 계청(啓請)하였고 이를 유생(儒生) 김성원(金聲遠)이 중건(重建)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후 서북지방(西北地方)의 경비(警備)가 중요시(重要視) 되자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로 발탁(拔擢) 되었으며 1631년(仁祖9)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 등을 겸임(兼任)하며 척화(斥和)를 주장(主張)했다. 그 후 강화유수(江華留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가 되었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천(錄薦)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