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6-15 11:36
1366(恭愍王15)~1407(太宗7) (兵曹判書公) 자는 도중(道重), 호는 벽송(辟松),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4세손, 공조참판(工曹叅判) 여심(汝深)의 아들, 음보(蔭補)로 입사(入仕)하여 낭중(郎中)을 시작으로 1382년 길주군(吉州軍)에서 사병(士兵)으로서 호발도(胡拔都)를 대파(大破)하는 전투(戰鬪)에 참전(參戰)하는 등(等) 크고 작은 왜구(倭寇)와의 전투(戰鬪)에서 지략(智略)과 용맹(勇猛)을 보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른 후 곧 고려(高麗)의 운명(運命)이 기울어짐을 보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벼슬아치들과 어울렸다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되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등극(登極) 했으나 이방원(李芳遠:太宗)에게 밀려 이성계(李成桂)는 함흥(咸興)에 머물게 되자 지난날의 귀양살이의 서운함을 이태조(李太祖)에게 직간(直諫)했다. 함경도(咸鏡道) 정평군(定平郡)에 살았고 정평군중흥리(定平郡中興里)에 비각(碑閣)이 있고 묘(墓)는 용강리(龍江里), 교항리(橋項里)에는 공(公)과 정몽주(鄭夢周), 조광조(趙光祖),등 삼현(三賢)을 모신 사우(祠宇)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