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회덕황씨시조(懷德黃氏),황낙(黃洛),회덕황씨조상인물,황자후(黃子厚)

작성일 : 2017-11-10 14:08 수정일 : 2019-02-13 14:44

시 조

회덕황씨시조(懷德黃氏 始祖)는 한(漢)나라 유신(儒臣)으로 평해(平海)에 표착(漂着)한 황낙(黃洛)이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 수 없으며, 고려(高麗) 때 형부 전서(刑部典書)를 지낸 후손 윤보(允寶)가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회천군(懷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회덕(懷德)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회덕(懷德)은 충청남도 대전시(大田市)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비풍군(比豊郡)으로 고쳤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공주(公州)에 편입되었다. 1895년 군(郡)이 되고 1914년 진잠면 일원과 공주군(公州郡) 현내면을 합하여 대전군(大田郡)으로 개칭, 1935년 대전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대덕군(大德郡)이 창설되었고 그 후 대덕군 회덕면(懷德面)이 되었다가 지금은 대전시에 속한 회덕동으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윤보(允寶)의 5세손 유(裕)가 조선(朝鮮) 태종(太宗)의 부마(駙馬)로 회천위(懷川尉)에 올랐다.

덕휴(德休)의 아들 종해(宗海)는 인조(仁祖) 때 학자(學者)로 명성을 날렸는데, 일찍이 정 구(鄭 逑)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웠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한 후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예학(禮學)을 강의받았다. 그후 수차에 걸쳐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진력하여 저서(著書)로「후천집(朽淺集)」을 남겼다.

그외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을 지낸 덕부(德符)와 숙종(肅宗)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며 청백(淸白)하고 강직(剛直)한 성품으로 많은 치적(治積)을 남긴 찬(燦)이 유명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세정(世禎)은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송준길(宋浚吉)의 수제자(首弟子)로 일컬어졌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회덕황씨(懷德黃氏)는 전국에 8,3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회덕황씨조상인물

황수(黃 粹) 고려(高麗) 때 수안 군사(遂安郡事)를 역임하였다.

황자후(黃子厚) 1363(공민왕 12)~1440(세종 22) 자(字)는 선양(善養), 시호(諡號)는 혜의(惠懿). 음보(蔭補)로 인녕부윤(仁寧府尹)을 거쳐 1413년(태종 13) 형조 좌참의(刑曹左參議)가 되어 호패법(號牌法)을 건의하여 시행케 했고, 이듬해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종마관압사(種馬管押使)가 되어 명(明) 나라에 다녀와 개성유후사 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경기도 도관찰사(京畿道都觀察使)를 역임, 1415년에 공안 부윤(恭安府尹)이 되었다.

이듬해 소합유(蘇合油)의 진상(進上)에 부정이 있었다 하여 회덕에 유배되었다가 그 후 풀려 나와 1421년(세종 3) 좌군총제(左軍摠制)가되어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

1423년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서 환상미(還上米)를 부정처분하여 진주(晋州)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판나주 목사(判羅州牧使)․한성 부윤(漢城府尹)․중추 원사(中樞院使)에 올라 전의감 제조(典醫監提調)를 겸했다.

황유(黃 裕) 시호(諡號)는 양도(良悼). 조선(朝鮮) 태종(太宗)의 부마(駙馬)로서 회천위(懷川尉)에 올랐다.

황삼성(黃三省)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황종해(黃宗海) 자(字)는 대진(大進), 호(號)는 후천(朽淺), 덕휴(德休)의 아들. 정 구(鄭 逑)의 문인. 1611년(광해군 3) 유생(儒生)들과 함께 상소(上疏)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과거(科擧)를 단념, 1618년 연산(連山)에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예학(禮學)을 강의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 유(張維)의 천거를 받아 후릉 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628년(인조 6)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2년 최명길(崔鳴吉)․목서흠(睦叙欽) 등의 천거로 영릉 참봉(英陵參奉)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황덕부(黃德符) 1582(선조 15)~1623(인조 1) 자(字)는 신백(信伯), 준남(俊男)의 아들. 1613년(광해군 5) 유생(儒生)으로서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의 사주(使嗾)로 이위경(李偉卿)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다. 1615년 생원(生員)․진사 (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같은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이듬해 대교(待校)가 되었고, 이어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로서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겸임했다.

1617년 정언(正言), 이듬해 겸문학(兼文學)․이조 정랑(吏曹正郞)․응교(應敎)․장악원첨정 겸 필선(掌樂院僉正兼弼善)․겸보덕(兼輔德)을 역임, 이해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에 이르렀다.

황세정(黃世楨) 자(字)는 주경(周卿), 호(號)는 제곡(霽谷). 6세 때부터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 그 수제자(首弟子)로 일컬어졌으며 한편 송시열(宋時烈)에게도 사사(師事)했다.

1674년(현종 15) 제2차 예송(禮訟) 때 송시열과 이미 죽은 송준길등이 윤 휴(尹 鐫)의 탄핵을 받아 화를 입자, 윤 휴의 친척이면서도 스승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윤 휴 일파의 죄상을 규탄하다가 진도(珍島)에 유배당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풀려나와 연풍 현감(延豊縣監)이 되고,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다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자 이에 비분(悲憤), 벼슬을 떠나 학문에 전심했다. 후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 事)가 되었다.

황찬(黃 燦) 자(字)는 휘경(輝卿). 1702년(숙종 2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보직되고, 그후여러 주군(州君)의 수령(守令)을 거쳐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청백(淸白)하고 강직(剛直)하여 외직(外職)으로 재임할 때 치적(治績)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