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성주황씨시조(星州黃氏),황세득(黃世得)

작성일 : 2017-06-07 14:26 수정일 : 2019-02-13 14:2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성주황씨(星州黃氏)의 시조(始祖) 황세득(黃世得)은 고려 때 대상(大相)을 지낸 황석주(黃石柱)의 17세손이며, 후손들이 성주(星州)에 세거(世居)하면서부터 본관(本貫)을 성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 육가약국(六伽倻國)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인데 신라(新羅)가 멸망시켜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그후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개칭하였다가 경종(景宗) 때 강등하여 광평군(廣平郡)이 되었으나, 995년(성종 14)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때 다시 경산부로 승격하여 1군 14현을 영속하였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한 후 성주(星州)로 고쳐 목(牧)을 두었고, 충선왕(忠宣王)이 다시 경산부로 강등하였으나 조선 태종(太宗)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인조(仁祖) 때 성산현(星山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성주군(星州郡)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충장공(忠莊公) 세득(世得)은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장흥 부사(長興府使)에 이르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麾下)에 종군(從軍)하여 선봉(先鋒)으로 벽파정(碧波亭)․고금도(古今島) 전투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이순신 함대의 선봉으로 출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격전 중 순사(殉死) 했다.

그의 아들 박(珀)은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명(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으며, 1634년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노령으로 퇴관한 후 병자호란 때 적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戰死)하였다.

그 후 숙종(肅宗) 때 시조 세득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 되었고, 고향인 천안군 직산면 마정리에 그 부자(父子)에 대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인 구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황씨(星州黃氏)는 전국에 총 199가구, 60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歷代 人物)

황박(黃 珀) ?~1637(인조 15) 광해군(光海君) 때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며, 1621년(광해군 13) 명나라 사신(使臣)이 왔다가 귀국(歸國)할 때 마침 후금(後金)이 심양(瀋陽)․요양(遼陽)을 함락하여 육로(陸路)가 막히자 자원(自願)하여 해로(海路)로 중국 등주(登州)까지 그들을 전송하고 돌아왔다.

1634년(인조 12)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거쳐 뒤에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에 올랐고 노령으로 퇴관(退官)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날 직전에 천문을 보아 전란이 있을 것을미리 알고 직산 수령 이척연(李惕然)에게 적을 방어할 준비를 갖추라고 권고하였으나 척연은 듣지 않았다.

그 해 12월 호병이 몰려 들어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했는데 박(珀)이 가동(家童)으로 궁시(弓矢)를 갖춰 호서백(湖西伯) 정세규(鄭世規)에게 나아가 여러 가지로 용병의 방책을 권고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적과 대결하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숙종(肅宗) 때 그의 부자의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