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양천허씨(陽川許氏),양천허씨시조,허선문,양천허씨조상

작성일 : 2017-06-01 14:22 수정일 : 2019-12-06 15:57

양천허씨 연원(陽川許氏 淵源)

나라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전 오늘의 김해(金海)지방을 중심으로 가락국(駕洛國)이 탄생한 것이 서기 42년이다. 임금으로 추대된 분은 호를 수로(首露),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즉위한 지 7년(서기 48년) 되는 해에 아유타국(阿踰陀國) 임금의 딸을 비(妃)로 삼으니 이 분이 황옥부인(黃玉夫人)이고 또한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도 하며 성(姓)은 허씨(許氏)인데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하고 혹은 서역(西域) 허국(許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한다. 또한 허황옥(許黃玉)의 국지(國誌)에 그 선군(先君)의 명(命)을 기록하기를 동방에 가락원군(駕洛元君)이 있어서 너를 얻어 배필로 삼을 것이라 하여 바다에서 떠왔다 하였다. 당시 16세였다.


왕후(王后)가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왕후가 “수로왕에게 청하기를 첩이 하늘의 명(命)을 받고 아비의 뜻을 받들어 먼 바닷길을 건너와서 대왕(大王)을 모시었으니 첩은 동토(東土)의 객(客)이온데 첩이 죽은 뒤 저의 성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하니 수로왕이 어여삐 여겨 두 아들로 하여금 허씨모성(許氏母姓)을 따르게 하였다. 189년에 태후(太后)허씨가 별세하니 나이 157세였고 김해시 구지봉(龜旨峰)에 장사지내니 능호(陵號)를 보주태후릉(普州太后陵)이라 했고 수로왕은 10년 후 199년에 별세하니 158세였으며 납릉(納陵)에 장사를 모셨다. 큰아들 거등(居登)이 즉위하여 왕통(王統)을 이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지금의 하동칠불사(河東七佛寺)에 성불(成佛)했다. 


수로왕의 10세손 구형왕(仇衡王:양왕) 때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가락국이 끝이남에 태후의 성(姓)을 이은 허씨는 자손(子孫)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고려초에 와서 거주지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수로왕의 30세손 선문(宣文)은 공암(孔巖)으로, 30세손 사문(士文)은 태인(泰仁)으로, 33세손 강안(康安)은 하양(河陽)으로, 35세손 염(琰)은 김해(金海)허씨가 되었으니 공암은 곧 양천(陽川)이다. 또 허씨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가 갈려 나갔으니 인천이씨 또한 가락의 한 뿌리이다. 


양천허씨의 시조(始祖) 허선문(許宣文)은 가락국 보주태후의 30세손으로 공암현(孔巖縣)에 오랫동안 살면서 농사에 힘써, 호족(豪族)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았다. 이 당시 후삼국(後三國)이 자웅(雌雄)을 겨룰 때인데 마침 고려 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을 정벌키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중 식량이 떨어지고 병마(兵馬)가 매우 피로하여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이때에 공이 기꺼이 마필(馬匹)과 식량(食糧)을 내주어 왕건의 군대는 사기 충천하여 견훤을 무찌르고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고려 건국에 큰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때 공의 나이가 99세이나 용모가 위대하며 기도(氣度)가 정숙하고 위풍이 당당(堂堂)하였다. 이에 왕건은 공의 충의(忠義)에 감동하여 가부(假父:일명 義父)로 모시고 고려개국벽상공신 공암촌주(高麗開國壁上功臣 孔巖村主)를 봉(封)하여 공암땅을 식향(食鄕)으로 하사(下賜)하니 이로 말미암아 드디어 관적을 공암허씨(孔巖許氏)로 한 것이다. 공암은 후에 양천(陽川)으로 개칭하니 양천허씨가 되었다.
그 뒤 고려 충렬왕(忠烈王) 묘정배향공신(廟庭配享功臣) 10세(世) 문경공(文敬公) 공(珙)에서 동주사공 정(東州使公 程), 판도좌랑공 관(版圖佐郞公 冠), 대제학공 부(大提學公 富)의 3계파(三系派)로 분파되었다. 


이와 같은 양천허씨는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를 통해 정승 16인, 중추원사(中樞院事) 6인, 학사(學士) 9인, 호당(湖堂)과 청백리(淸白吏) 각 7인, 공신(功臣) 10인, 봉군(封君) 30인 등 문형(文衡)과 옥당(玉堂)을 배출하여 적은 인구이면서도 동방(東方)의 명문벌족(名門閥族)을 이루었다.
형제정승(兄弟政丞)에다 청백리로 이름난 충정공(忠貞公) 종(琮)과 문정공(文貞公) 침(琛),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이름을 떨친 초당공(草堂公) 엽(曄)과 성(筬)․봉(篈)․균(筠)․난설헌(蘭雪軒), 불멸(不滅)의 명저(名著)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한 의성(醫聖) 양평군(陽平君) 준(浚), 높은 학문으로 정승에 오른 부훤당(負暄堂) 욱(頊)과 묵재공(黙齋公) 적(積) 그리고 학문과 문장 서예에 뛰어나고 유림(儒林)으로부터 도덕군자(道德君子)로 추앙받는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목(穆),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순절(殉節)한 충장공(忠莊公) 완(完), 고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성리학자(性理學者)인 문헌공(文憲公) 성재(性齋) 전(傳)과 서화가(書畵家)로 소치(小癡) 연(鍊), 미산(米山) 형(瀅), 남농(南農) 건(楗), 의재(毅齋) 백련(百鍊) 등 모두 양천허씨를 빛낸 조상들이다.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 허왕후(許王后) 유허지(遺墟地)는 2000년 1월 1일자로 가락중앙종친회에서 종원 일동의 성금(誠金)으로 수립(竪立)한 것이다.

 

 


한국의 고대 역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허황옥(許黃玉)은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諭陀國)의 공주(公主)로 천신(天神)의 계시(啓示)를 받은 부왕(父王)의 명을 받들어 수만리 바다를 헤치고 한반도 남부의 가락국으로 건너가 수로왕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아요디아(Ayodhya)시는 인도 수도 뉴델리(New Delhi)에서 동북 히말라야 산맥쪽으로 640㎞ 떨어진 곳으로 고대로부터 다양한 종교의 성지도시(聖地都市)로 현재도 4천여 개의 힌두사원과 15개의 이슬람사원, 4개의 자이나교사원, 2개의 구르드와라사원 등 수많은 사원이 존재하며 연중 각 종파의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인구 약 55,000명의 소도시로 오늘날에도 아요디아국의 왕손이 거대한 궁전에 살고 있으며 도시 전체가 궁전으로 싸여 있다.
허가바위는 바위산으로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곳에서 세거(世居)하였기 때문에 이곳을 양천허씨 발상지라 한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재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재차(구멍) 파의(바위)라는 뜻으로 옛 부터 이곳 허가바위 특징을 지명으로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 공암현(孔巖縣)으로 개칭하였다.
동굴의 크기는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로 사람 약 10여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
양천허씨시조 허선문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면서 이곳을 통과할 때 도강(渡江)의 편의와 군량미 제공 등으로 공(功)을 세워 공암촌주(孔巖村主)의 벼슬을 받았다.

 


양천허씨 조상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2세 허현(許 玄):벼슬은 어의(御衣)의 상납을 맡고 있던 장복서(掌服署)의 후신인 상의국봉어(尙衣局奉御) 추봉 소부소감(追封小府少監)이다.
3세 허원(許 元):목종(穆宗) 원년(997)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현종14년(1023)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 좌습유(左拾遺)로 임명되고 18년(1027) 시어사(侍御史)로, 덕종원년(1031)에 검교예빈성경 행 내사사인 지제고 태자사의랑(檢校禮賓省卿行內史舍人知製誥太子司議郞)을 지냈다.
4세 허정(許 正):벼슬은 대창승(大倉丞)과 태자태보 행 상서예부시랑(太子太保行尙書禮部侍郞)을 지냈다.
5세 허재(許 載):(1062년~1144년) 공은 성품이 강직(剛直)하고 근엄하였고 예종12년(1116)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와 병마사(兵馬使)를 거쳐 서북면병마사를 거치고 풍주방어사(豊州防禦使) 등 외직을 두루 거치고 호부상서에 제수되고 이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에 올랐다. 석관지문(石棺誌文)이 《금석총람(金石總覽)》에 기재되어 있다.
6세 허순(許 純):예종9년(1114)에 병과로 급제하여 금주방어판관(金州防禦判官)이 되고 13년(1135)에 서경(西京)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고 1155년(의종9)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가 되고 동지추밀원사 공부상서(同知樞密院事工部尙書)에 임명되었다.
7세 허이섭(許利涉):의종12년(1158)에 김정명방(金正明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전구서령(典廐署令) 직사관(直史官)이 되었다. 처음 이름은 섭(涉)이었으나 의종이 이름을 하사하여 이(利)자를 더하였다.
8세 허경(許 京)
명종6년(1176) 진간공방(秦幹公榜) 을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검교상서성(檢校尙書省) 좌복야 행 예빈성소경(左僕射行禮賓省少卿) 지제고(知製誥)를 지냈다.
9세 허수(許 遂)
고종6년(1219) 김중룡방(金仲龍榜) 제5인으로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예부상서(禮部尙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지냈다.
10세 허공(許 珙)
1233년~1291년) 자는 온독(韞匵)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고 도량이 뛰어났으며 고종45년(1258) 장문한방(張文漢榜)에 급제하였다. 승선(承宣) 유경(柳璥)이 공과 최녕(崔寧), 원공식(元公植)을 천거하여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여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어 부하관원을 엄정 통솔점검하니 당시에 정방 삼걸(政房三傑)이라 했다. 이후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이르고 이부시랑 지어사대사(吏部侍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년간 20대왕 신종(神宗), 21대왕 희종(熙宗), 22대왕 강종(康宗) 실록(實錄)편수에 참여했고 1291년(충렬왕17) 첨의부중찬 태학사세자사(僉議府中贊太學士世子師)에 임명되었다. 공은 요직에 있기 15년간에 인물을 평론하되 항상 평범한 벗을 구제함을 뜻으로 삼았고 재상(宰相)의 지위에 있기 20여년간에 더욱 충성을 다하여 마침내 왕신(王臣)의 직분에 힘썼다. 인물을 간택함에 뛰어나 문하(門下)에서 배출된 현사(賢士)들이 모두 중요한 지위에 올랐으며 대각(臺閣:정승)에 재직하였다. 충선왕2년(1309) 충렬왕묘(忠烈王廟)에 배향(配享)되었다.
11세 허관(許 冠):충렬왕29년(1303)에 박리(朴理) 방(榜) 병과에 제1인으로 급제하여 봉승랑판도부(奉承郞版圖部) 추봉광정대부첨의부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追封匡靖大夫僉議府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가 되었다.
11세 허부(許 富):충렬왕 때 문을과(文乙科)에 급제하여 잡단과 사헌부의 직책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오르고 지춘추관사 상호군(知春秋館事上護軍)을 지냈다. 공은 자손을 가르침에 “세업충효(世業忠孝)하고 여력문장(餘力文章)하라”하였다. 이는 문행충신(文行忠信)은 비록 효(孝)만 못하지만 효를 옮겨서 충(忠)을 하면 효가 그 중에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
11세 허숭(許 嵩):처음의 이름은 평(評)으로 충렬왕5년(1279)에 독로화(禿魯花)로 원나라에 보내졌고 귀국 후 대장군이 되고 1307년(충렬왕33)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와 동지밀직사판봉상시사(同知密直司判奉常寺事)를 역임했다.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올랐고 충선왕2년(1310)에 양천군(陽川君)으로 봉해졌고 시호(諡號)는 양숙(良肅)이다.
11세 허정(許 程):충렬왕 때 음사(蔭仕)로 김방경(金方慶)의 요좌(僚佐)가 되고 이어서 은청광록대부 이부상서(銀靑光祿大夫吏部尙書) 첨의부찬성사칙수동주사(僉議府贊成事勅授東州使)가 되었다.
11세 허총(許 寵):문경공(文敬公) 공(珙)의 넷째 아들로 충렬왕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12세 허교(許 僑):여민동락(輿民同樂)하며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고려왕조를 빛내고 지키려 한 분으로 개성윤(開城尹)을 지냈다. 고려말에 조선왕조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기록에 전하지 못한다. 조선개국 초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부(父)이고, 광산김문(光山金門:사계 김장생가)을 일으킨 정경부인 허씨 할머니의 조부이다.
12세 허백(許 伯):(?~1356년) 충숙왕4년(1317)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344년(충혜왕5) 양천군(陽川君)으로 봉해졌으며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에 녹봉되고 충목왕과 공민왕 때 서연시독(書筵侍讀)이 되고 찬성사(贊成事)로서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공은 문학(文學)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은 시(詩)가 시문책에 다수 기재되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2세 허선(許 僐)
충숙왕12년(1325) 병과에 급제하여 광정대부 첨의부찬성사(匡靖大夫僉議府贊成事)를 지냈다. 천성(天性)이 순후하고 효(孝)와 제(悌)를 겸하였으며 형 문정공(文正公) 백(伯)과 동생 개성윤(開城尹) 교(僑)와 우애가 매우 두터워 사마씨(司馬氏)와 양파(楊播)의 곤계(昆季)와 같이 일찍이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청(淸)과 근(勤)을 법도(法度)로 삼아 선조의 덕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12세 허신(許 信)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와 봉순대부 보문각직제학지제고(奉順大夫寶文閣直提學知製誥)를 지냈다. 공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에게서 수학하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하였음은 공의 충성심과 청아(淸雅)한 정신을 가름할 수 있다.
12세 허완(許 完) :(1328년~1379년) 공민왕을 배종(陪從)하여 원(元)나라에 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여 녹공위 삼등(錄功爲三等)으로 정당문학 가선대부예문관제학(政堂文學嘉善大夫藝文館提學)에 임명되었다.
12세 허유(許 猷) :충혜왕2년(1341) 강릉대군(江陵大君:祺)을 따라서 원(元)나라에 가서 호위의 책임을 성실히 완수하고 귀국 후 통례문판관(通禮門判官)에 임명되고 공민왕8년(1359)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점검함에 병마사(兵馬使)로 출전, 공을 세웠다. 1363년(공민왕12)에 김용(金鏞)의 난때 임금을 호종(扈從)한 훈공으로 선력보리훈일등공신(宣力輔理勳一等功臣)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로 책록하고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12세 허종(許 悰) :자는 상수(尙壽), 호는 춘옹(春翁), 시호(諡號)는 양혜(良惠)이다. 충선왕의 딸 수춘옹주(壽春翁主)와 결혼하고 수사공(守司空)을 역임하였고 3년간 원나라에 유학하였으며 충숙왕 때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한때 의약(醫藥)으로 명성을 얻어 활동하기도 했다.
13세 허강(許 綱) :(1317년~?) 자는 중유(仲維)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11년(1362)에 안동도병마사로 임명되어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공헌했다. 이듬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하는데 시정을 호소하고 종실의 실정과 국내정국에 대한 사리를 밝히고 귀국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승진하였다.
13세 허경(許 絅) :(?~1353년) 충숙왕5년(1336) 남궁민방(南宮敏榜)에 급제하여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를 지냈다. 충혜왕5년(1344)에 처음으로 서연을 두었는데 사예(司藝)로서 문정공(文正公) 백(伯) 부자(父子)가 피선되어 명사인 한종유(韓宗愈), 이제현(李齊鉉) 등과 더불어 매일 시독(侍讀)하였다.
13세 허도(許 衜):자는 성지(性之)이고 호는 고송(孤松)이다. 고려조에 문병과(文丙科)로 급제하여 참찬(參贊)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출사(出仕)하지 않고 이른바 칠절사(七節士)라 불리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야은(冶隱) 길재(吉再),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둔촌(遁村) 이집(李集), 참의(參議) 이양중(李養中),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사인(舍人) 서견(徐甄) 등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지어 불굴의 뜻을 표명했다. 일묵일어(一黙一語)함으로서 공의 절(節)은 불변하고 도(道)는 불멸한 것이므로 절과 도가 병행하며 서로 어그러지지 아니하였다. 또한 의학사(醫學史)상 의료제도를 개선한 제생원을 설치하게 함으로써 여성들이 남자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하는 수치심을 덜게 하는 의녀(醫女)를 양성하는 기초를 다지게 했다.
13세 허진(許 璡) :(1337년~?) 공민왕9년(1360) 정몽주방(鄭夢周榜)에 국자진사전판관(國子進士前判官)으로 진사급제(進士及第)에 올라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이르렀다. 자손에게 옥질(玉質)과 난자(蘭姿)로서 일찍이 가업을 이어 능히 문장을 일으키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넉넉함을 물리었고 “너희들은 더욱 부지런히 업을 닦아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했다.
14세 허균(許 筠) :호는 성수(惺叟) 또는 범매당(泛梅堂)이다. 중랑장(中郞將) 승(昇)의 아들로 승이 직간(直諫)을 하다가 평안도 정주(定州)로 유배되자 호군(護軍)의 벼슬을 버리고 따라갔다. 그곳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시초로 삼아 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고명(高明)함을 극진히 함에 이르렀으며 이치를 분석함에 정미(精微)함을 다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14세 허금(許 錦) :(1340년~1388년) 자는 재중(在中)이고 호는 야당(埜堂)이다. 공민왕6년(1357) 염흥방방(廉興邦榜)에 급제하여 봉익대부 전리사판서 진현관제학(奉翊大夫典理司判書進賢館提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성품이 조용하고 정숙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즐겨보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조준(趙浚), 윤소종(尹紹宗) 등과 더불어 친우를 삼고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의서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고 저술한 책도 많고 야당집(埜堂集)과 시문이 다수 있다.
향촌에서 물러나 재물을 아끼지 않고 약재를 수매하여 은혜를 널리 베풀고 여러 사람을 구제함으로 질병이 있는 자에게 존비(尊卑)를 구분 않고 치료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
14세 허흠(許 欽) :고려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중랑장(中郞將)에 올랐으나 조선 건국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아들 용진공(龍津公) 징(徵)과 송암공(松菴公) 손(愻) 두 형제도 각각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함경도로 제주도로 보냈다.
15세 허징(許 徵) :공민왕11년(1362)에 무과에 합격하여 충정왕(忠定王)의 사위로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고 공암군(孔巖君)에 봉해졌고 용진현령(龍津縣令)이 되고 1392년(공양왕4) 병마단련판관 겸 북도순검사(兵馬團練判官兼北道巡檢使)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조선이 개국됨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결의로 두문동 72인이 되었고 뒤에 함경도 길주로 들어가 은거하며 지조를 지켰다. 
15세 허손(許 愻) :(1354년~1423년) 자는 손길(孫吉)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공민왕20년(1371) 무과에 합격하여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임명되고 1373년 문과에 급제하여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형(兄) 허징(許徵)과 조선 개국에 불복(不服)하여 탐라도(耽羅島:제주도)로 들어갔다.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13세 허응(許 應) :(?~1411년) 고려 공민왕20년(1371) 생원과에 급제하여 좌상시 등 대간관(臺諫官)을 지내고 조선조 태종5년(1405)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성품이 인자하여 항상 의약을 남에게 베풀어 치료해 주는 일이 많았다. 1406년 조선조 시무(時務)7조를 제정, 임금의 허락을 얻고 신문고 설치를 상주해 시행케 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개성유후(開城留候)가 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추앙되었다.
14세 허호(許 灝) :고려 공민왕13년(1364)에 문과 급제하여 지제고 봉상시사로 봉직하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14세 정경부인 양천허씨(貞敬夫人 陽川許氏):(1377년~1455년) 열부(烈婦)로서 대사헌(大司憲) 허응(許應)의 딸이다. 광산김씨(光山金氏) 20세손 김문(金問)에게 시집가서 17살에 홀로되어 부모가 불쌍히 여겨 개가(改嫁)를 시키려하자 유복자(遺腹子)를 데리고 개성(開城)에서 시댁이 있는 충청도 연산까지 걸어가는데 호랑이가 호위하였다고 한다(혹은 밤에 호랑이 등을 타고 무사히 갔다고도 한다). 시댁에 와서 아들을 훌륭히 키웠고 평생 수절(守節)하니 나라에서 1467년(세조13) 정려(旌閭)를 세워 후세에 기리 알렸다.
유복자는 감찰(監察)을 지낸 철산(鐵山)이고 손자는 좌의정 국광(國光), 촤참찬 겸광(謙光)이고 대사헌 계휘(繼輝), 7세손인 예학(禮學)의 거두 사계(沙溪) 장생(長生), 정치가인 집(集), 반(槃) 등 조선조 정치․문화인물이 많이 배출되게 하였다.
14세 허균(許 稛) :자는 자화(子禾)이고 호는 간악(艮岳)이다. 세종27년(1445)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1451년(문종1)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고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염정(恬靜)하여 벼슬길에 오래 있기를 좋아하지 않아 거처하는 가옥은 숙연하여 한사(寒士)같았다. 시문(詩文)에 능해 저서로 간악집(艮岳集)이 있다.
자녀들에게 훈계하기를 “항상 정주전서(程朱全書)의 절요(節要)를 언제나 읽어 외우고 바른 정설(正說)에 착안하여 필생(畢生)을 가지런히 닦아야 함을 상념전심(常念專心)하여 가히 지나치지 않는 것이 군자(君子)의 종(終)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5세 허기(許 愭) :(1365년~1431년) 자는 원덕(原德)이고 호는 매헌(梅軒) 또는 매수(梅叟)이다. 고려 우왕9년(1383) 왕승방(王昇榜)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정포은, 원천석, 김자수 등 명유를 쫒아 배웠고 시(詩)에 능해 매헌시집(梅軒詩集)이 있다. 조선 태종조에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오르고 판봉상시사로 옮겨 곧 사퇴하여 고향에 살며 음풍영월로 자위하였다.
15세 허형손(許亨孫) :(1426년~1476년) 자는 통보(通甫)이고 호는 수역자(邃易子)이다. 세종23년(1441) 성균진사가 되고 최항(崔恒)의 추천으로 1448년(세종30) 특설 빈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여진족의 침입을 신숙주(申叔舟)와 더불어 정벌하여 의주목사가 되었고 1470년(성종1) 오위도총관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단종에게 폐위를 가하고 사육신의 주륙이 있을 때 세조에게 결사의 각오로 임금의 성덕(聖德)이 아님을 간하니 여러 사람이 공의 신변을 걱정하였으나 지난날의 공훈으로 사면되었고 병론 어외책(兵論禦外策)을 아뢰어 1471년(성종2) 좌리공신 양천군(陽川君)에 봉하고 양안(襄安)의 시호를 받았다.
양천(陽川)으로 귀향하여 귀먹고 소경임을 자처하여 동구 밖에 망곡단을 설치하고 매월 삭망에 영월을 향해 배곡하였다. 공의 굳은 마음과 충절을 엿볼 수 있다. 배위는 포은 정몽주의 현손녀이다.
15세 허맹(許 孟):부친 한성판윤(漢城判尹)공 허호(許灝)와 더불어 조선조에 들어와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16세 허겸(許 謙) :1647년(인조25)에 음사로 고원(高原)군수를 지내고 내직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수행함에 강직하고 위풍당당하여 많은 관료들의 모범이 되었다.
16세 허비(許 屝) :(1392년~1460년) 자는 한사(閑邪)이고 벼슬은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지냈다. 손자인 충정공(忠貞公) 우의정 허종(許琮), 좌의정 허침(許琛)의 현귀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16세 허추(許 樞) :(1403년~1465년) 자는 가운(可運)이다. 1477년(세종29)에 총마계(聰馬契)에 회맹(會盟)하고 세종32년(1450) 세조잠저(世祖潛邸)시의 요속(僚屬)이라 하여 원종삼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책록되고 군위, 장연, 자산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이후 절충장군 충무위섭호군(折衝將軍忠武衛攝護軍)으로 승진했다.
16세 허형(許 亨) :(1489년~1564년) 자는 통지(通之)이고 호는 수재(守齋)이다. 공은 말을 아끼고 근신하며 학문에 정진하여 고사(故事)에 정통하였으며 도(道)를 강(講)하기도 했다. 연산군의 정치를 바로잡지 못해 우국일념 속에 발병하여 돌아가신 문정공(文貞公) 좌의정 허침(許琛)과 서로 뜻이 맞아 순천부 옥계동에 들어가 재(齋)을 지어 세수(世守)라 칭하니 선세유훈(先世遺訓)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16세 허효순(許孝舜) :(1455년~1503년) 자는 경보(敬甫)이고 호는 한매수(寒梅叟)이다. 품성이 듬직하고 의(義)로웠으며 음직으로 곤양, 강서(江西)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당대 유명 시인인 임제(林悌)와 결의를 맺고 단종묘를 향해 망곡(望哭), 탄식하며 슬퍼했다. 임제는 수성(愁城)이란 글을 지었고 공은 원유부(遠遊賦)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들의 뜻을 알았다.
17세 허건(許 健) :드높은 태도와 훌륭한 덕망을 지녔다. 성종 때 무과에 합격하여 고성현령(固城縣令)이 되었다. 1488년(성종19) 왜선들이 고성현 가배량(架背梁) 등지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갔다. 이때 공은 병선(兵船)을 이끌고 왜선을 추격하여 큰 바다까지 깊이 들어가서 무찔렀으니 지혜와 용맹을 겸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세 허손(許 蓀) :(1412년~1466년) 자는 자청(子淸)이고 어려서부터 재예(才藝)가 뛰어났으며 학문(學文)을 좋아하고 친구 사귀는 것을 진실되고 정직하게 믿음으로 했으며 음직으로 재령군수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펴 임지에 영구불망(永久不忘)의 송덕비가 세워졌다.
17세 허유례(許惟禮) :(1430년~?) 시호는 효장(孝莊)이다. 음사로 사옹별좌(司饔別坐)로 있을 때인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군관(軍官)으로 함길도병마절도사 허종(許琮)의 휘하에 들어가 명을 받고 단신으로 길주에 잠입하여 대의(大義)로서 역(逆)과 순(順)을 설명하여 적장 이주(李珠), 이운로(李雲露), 황생(黃生) 등의 동의를 얻은 뒤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 경성 운위원(雲委院)에서 이시애 일당을 체포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고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으며 행중추부첨사(行中樞府僉使)에 임명되었고 사후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고 길주(吉州)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아들 귀손(貴孫), 경손(敬孫), 공손(恭孫), 종손(終孫) 등 일가(一家) 육장군(六將軍)의 병가(兵家)로서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
17세 허안국(許安國) :자는 언경(彦卿)이고 연산군10년(1504)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다.
17세 허지(許 芝) :(1422년~1487년) 자는 자형(子馨)이고 세종23년(1441) 성균진사에 합격하여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지냈고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직되었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외조부이다.
17세 허탁(許 倬)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嘉善大夫 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인품이 중후하여 주위의 신망을 받았다.
17세 허창(許 菖) :(1425년~1486년) 자는 요구(堯韭)이고 세종32년(1450) 사마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1) 을축추장에서 문과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신계(新溪)현령을 지냈다. 의술에 능통하여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구제하였다. 공의 묘지가 명당이라고 지관이 말한대로 자손들이 번성 영달하여 5봉군(五封君), 5문장(五文章)이 태어나 가문을 크게 빛냈다. (5봉군:양천군(陽川君) 허방(許昉), 양평군(陽平君) 허계(許禊), 양릉군(陽陵君) 허적(許), 양원군(陽原君) 허선(許選), 양은군(陽恩君) 허흡(許). 5문장:초당(草堂) 허엽(許曄), 악록(岳麓) 허성(許筬), 하곡(荷谷) 허봉(許篈), 교산(蛟山) 허균(許筠),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
17세 허황(許 葟) :(1430년~1516년) 자는 자실(子實)이고 세조14년(1468) 춘장시 갑과에 문과로 급제하여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자헌대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17세 허훈(許 薰) :자는 자방(子芳)이고 성종16년(1485)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손자 허자(許磁)의 현귀로 승록대부 의정부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되었다.
18세 허규(許 珪) :(1505년~?) 자는 응신(應信)이고 호는 수월헌(水月軒)이다. 문장(文章)과 시사(詩詞)가 탁월하고 처신과 범절이 단아하며 의리에 강하였고 중종25년(1530), 성균진사가 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직을 제수받았다. 성균관 및 지방 향교의 재생(齋生) 중 으뜸가는 태학장의(太學掌議)로서 유생들을 이끌고 중종(中宗)의 정비(正妃) 신왕후(愼王后)의 복위를 항장(抗章)으로 호소하다가 퇴출당하고 이후 경서를 익히면서 의거 아니면 움직이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고 도의를 연마하였다. 일찍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고 이퇴계를 사우(師友)로 하였다.
18세 허성(許 誠):(1504년~?) 1525년(중종20)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사간원정언, 형조․예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했다. 뒤이어 이조판서에 임명된 후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다.
18세 허원(許 瑗) :(1457년~1511년) 자는 덕기(德器)이다. 1485년(성종16)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다가 선조의 음덕으로 평안도도사, 형조좌랑, 의영고령(義盈庫令)을 역임하고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갈문(碣文)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찬하였다.
18세 허종(許 琮) :(1434년~1494년) 자는 종경(宗卿) 또는 종지(宗之)이고 호는 상우당(尙友堂)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457년(세조3) 문갑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1459년 언로를 개방하고 이단을 물리치고 경연을 열 것 등을 상소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어 선전관이 되고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함길도병마절도사로 난을 평정하는데 공헌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1) 대사헌, 다음해 병조판서에 오르고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세조비 윤씨의 국상 때 산릉도감제조, 연주시격(聯珠詩格)․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언해, 1487년 이좌판서가 되어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원접사가 되어 이들로 하여금 동방에 이런 훌륭한 분이 있다는 감탄사를 읊으며 돌아갔다. 1489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고 양천부원군에 봉해지고 강원도축성사로 축성(築城)․병기를 점검하였고 여가에 경전(經傳)을 잡고 강론하니, 유학(儒學)의 기풍이 크게 진작되었고 다음해 여진족 우디거(兀狄哈)의 침입을 격파하고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가 되고 이어서 우의정에 올랐다.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 내의원제조도 지냈고, 신찬구급간이방(新撰救急簡易方)을 편찬하였다.
공은 얼굴이 크고 이마가 넓었으며 키가 크고(223m) 수염이 아름다워 바라보면 깨끗함이 신선과 같았고 국가의 대사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다하고 숨기지 아니하여 우물쭈물하여 바꾸지 않았다. 천품이 고매하고 학문을 힘써서 성리학(性理學)의 심오한 내용을 깊이 탐구하였으며 일상생활하는 기예(技藝)에 널리 통하여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역산(曆算)을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며 특히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문집으로는 상우당고(尙友堂稿)가 있고 편저에는 의방유취(醫方類聚)를 용약한 의문정요(醫門精要)가 있다. 성종조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다.
18세 허집(許 輯) :(1435년~1509년) 자는 백화(伯和)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483년(성종14) 춘장시 병과에 급제하여 대제학 어세겸(魚世謙) 선(選) 호당(湖堂)에 수학하였으며 병조참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8세 허침(許 琛) :(1444년~1505년) 자는 헌지(獻之)이고 호는 이헌(頤軒)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475년(성종6) 참봉으로 친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대제학 서거정(徐居正) 선(選) 호당(湖堂)에 수학하였으며 이후 지평, 병조정랑을 거쳐 1482년(성종13) 진현시(進賢試)에 병과로 급제, 필선(弼善)이 되어 세자(연산군)의 선생이 되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조지서는 소인이고 허침은 대인(君子)이다” 이와 같이 덕(德)과 인(仁)으로 세자를 지도했다는 뜻이다. 1488년(성종19) 보덕(輔德)으로 승진, 삼강행실을 산정(刪定)하였다. 다음해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또 명나라에 천추사(千秋使)로 다녀와서 성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502년 이조판서가 되고 다음해 우참찬 연산군10년(1504) 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지는 못하였지만 조신들을 많이 구명하였다.
공은 천성이 청정하고 온순해서 순화한 기분이 안면에 나타나며 어묵(語黙)과 동정이 단정하고 편안해서 모나게 드러내지 않았다.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고 평소에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여 놀라운 말이나 갑작스러운 낯빛은 하지 않았으며 비록 자제나 노비라도 그가 불평하는 기색을 못했다. 치가(治家)에는 담박(淡泊)해서 생산사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집에서는 종일토록 오직 독서할 뿐이었다. 성종조에 형 허종과 같이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연산군의 생모 윤비폐출(尹妃廢黜) 어전회의에 불참토록 하라는 누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낙마(落馬)한 다리의 명칭이 종침교(琮琛橋)이다. 때문에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의 많은 사람들이 처벌되었지만 허종․허침 형제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8세 허천익(許天益)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1488년(성종9) 어머니 남평문씨(南平文氏)를 모시고 숙부인 고성현령(固城縣令) 허건(許健)의 임소에 따라가서 비로소 고성에 거주하게 되었다.
19세 허광(許 礦) :(1468년~1534년) 자는 중질(仲質)이고 호는 척금정(滌襟亭)이고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1506년(중종1) 부정(副正)으로 있으면서 중조반정(中宗反正)에 동참하여 4등공신에 녹봉되고 제양군(齊陽君)에 봉해지고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다.
19세 허굉(許 硡) :(1471년~1529년) 자는 굉지(宏之)이고 호는 징와(澄窩)이다. 1503년(연산군9) 계해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이 되었다. 1515년(중종10) 동부승지가 되고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함경도, 전라도, 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쳤다. 1520년(중종15)에는 여진족이 무창을 침입하자 정벌하여 예조판서로 승직되고 1528년(중종23)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9세 허경(許 鏡) :(1564년~?) 자는 여명(汝明)이고 호는 장암(莊庵)이다. 1583년(선조16)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판관을 거쳐 장연부사(長淵府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대가(大駕)를 호위하고 용만(龍彎)으로 간 공로로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굳세어 큰 절개가 있었으며 경주판관(慶州判官)이 되어 정유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하여 충렬사(忠烈祠)에 허일(許鎰)과 같이 모셔졌다.
19세 허반(許 磐) :자는 문병(文炳)이고 성종14년(1483)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참봉이 되고 1498년(연산군4)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副正), 사관(史官)이 되었다. 그해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사초(史草)에 연루(連累)되어 김일손(金馹孫) 등과 순절하였는데 중종 때 복권되어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공은 성리학에 깊은 뜻과 학식을 가졌으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존경하여 복(服)을 입었다. 양천세고(陽川世稿) 서문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나의 외사촌 아우, 허반(許磐)은 자가 문병인데 또한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고 시문(詩文)이 특출하다”고 했다.
19세 허사건(許思鍵) :(1528년~1584년) 자는 중고(仲固)이고 1568년(선조1)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다. 1580년(선조13) 상소를 올려 간의대(簡儀臺)를 개수(改修)할 것을 청했다. 간의대는 세종 때 처음 만들어 경회루(慶會樓) 앞에 설치한 것으로 천체(天體)의 운행상황을 관찰하는 기구였는데 방치하여 사용치 않았는데 선조는 크게 기뻐하여 즉시 영의정 박순(朴淳)을 도제조로 삼고 공을 제조(提調)로 삼아서 5개월만에 공사를 마쳤다. 임금이 크게 칭찬하고 제조 등에게 큰 상을 내렸다.
19세 허사흠(許思欽) :(1526년~?) 자는 흠중(欽仲)이고 1569년(선조2)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성주목사,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왕명으로 여사열전(麗史列傳)을 편수했다. 당시 동서(東西) 당쟁에 대하여 상소로 간하였으나 좌천되었고,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막하로 있으면서 나라일을 걱정했다.
19세 허세린(許世麟) :(1507년~1579년) 1528년(중종23) 중종이 영릉(英陵)에 행차하여 친시에서 무과로 합격하여 강진, 청도 군수로 있으면서 군민 구휼(救恤)에 진력한 공으로 김해부사로 나갔다. 이어 양주목사, 회령부사를 지내면서 지극히 어질고 관리로서 들고남에 청렴을 본보기로 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니 고을마다 선정비가 세워져 그 이름이 드높았다. 1579년(선조12)에 별세하니 작은 오두막집에 염습도 할 수 없는 처지를 알게 된 왕께서 영상 박순(朴淳)에게 교지를 내려 청백리(淸白吏)로 포장(褒章)하였으며 정2품으로 승차, 후(厚)히 장례를 치르고 박순에게 제문(祭文)을 짓게 하고 제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박순이 제문에 이르기를 “공은 청렴 근면하였으며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여 끝까지 감내하며 백성들의 번뇌와 갈망하는 바를 저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害)되지 않도록 힘을 기울인 행적(行蹟)이 뚜렷하고 남녘에 출사(出使)하여서는 어지러워진 질서를 수습하여 백성들의 근심걱정을 덜어주었다. 양잠방적(養蠶紡績)과 율무 재배 등을 권장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고 북쪽 관문을 다스릴 때는 수많은 일을 도모함에 솔선수범하여 권장하였으며 신명(身命)을 다하여 백성들의 편안함을 구(救)하였다. 분별력이 뛰어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시정(施政)하였으며 국왕을 호위(護衛)함에는 그 충성심이 시종여일(始終如一)하여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건만 어쩌다 슬하에 무자(無子)로 별세하니 무한히 비통(悲痛) 이를데 없다. 이에 우매한 예관(禮官)은 높으신 신위(神位)께 엄숙히 주작(酒灼)을 올리나이다”고 하였다.
이에 감동하여 지제교(知製敎) 류근(柳根)이 글을 짓고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박란(朴蘭)이 찬지(撰誌)하였다.
19세 허위(許 渭) :(1485년~1536년) 자는 청부(淸夫)이다. 1510년(중종5)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 검상관(檢詳官), 황해감사(黃海監司)를 지냈다. 재임시 위로 위국진충(爲國盡忠)하고 아래로는 위민이진애(爲民而盡愛)에 공직관을 두고 백성을 다스림에 깨끗하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19세 허일(許 鎰) :(1545년~1593년) 자는 여중(汝重)이고 호는 남포(南圃) 또는 일심재(一心齋)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사헌부감찰이 되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포수방사(三浦守防使) 겸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고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정유왜란(1597) 때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판중추부사에 증직되고 충렬사(忠烈祠)에 아들 곤(坤)과 동생 경(鏡)과 같이 배향되었다.
19세 허자(許 磁) :(1496년~1551년) 자는 남중(南仲)이고 호는 동애(東厓)이다. 1523년(중종18) 알성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박사(博士), 수찬(修撰)을 거친 후 대제학 이행(李荇) 선(選) 호당(湖堂)에 수학하였으며 동부승지를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외직에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사헌부대사헌을 제수받고 곧 형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와 예조판서로 승차하였다. 1545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윤원형, 이기, 공 등에게 대윤(大尹)인 윤임(尹任)일파를 몰아내는 밀지를 내려 성공함으로써 추성협익병기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炳幾靖難衛社功臣) 1등으로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지고 다음해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올랐다. 1549년(명종4)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이기 등 공신들의 횡포가 심하였으며 드디어는 이기의 모함으로 홍원(洪原)으로 부처되어 적소에서 운명하니 임금이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공은 학문과 덕망(德望)이 높고 행실이 청간하였으며 국가가 흉흉하고 처사가 잘못되었을 때 항상 임금 옆에 있으면서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충언(忠言)하였으므로 조정(朝庭)에서는 크게 의지하였고 또한 한푼의 뇌물도 받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때 공정 무사하여 청백(淸白)을 보전하고 평생 의(義)를 지키니 공의 사망을 듣고 모두 슬퍼하였다. 퇴계 이황(李滉)은 아래와 같은 시(詩)를 지었고[퇴계문집(退溪文集) “허남중(許南仲)의 귀양감을 듣고”
     遠壑依依雲冪冪  먼골짝 아련한데 구름이 덮여 있고
     輕風拂拂雨紛紛  한들바람 살랑이는데 비는 분분히 내리네.
     窓前水石含幽憤  창 앞의 물과 돌도 울분을 머금으니
     增我平生苦憶君  내 평소 군을 그리워하는 마음 더하누나.
    또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집에는 “허남중(許南仲)의 연경에 떠남을 보고”라는 시(詩)가 있다.
19세 허초(許 礎) :(1485년~1551년) 자는 정중(靜仲) 또는 우경(友卿)이고 호는 창랑정(滄浪亭)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추천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충주의 북산계(北山溪)에 은둔하여 후진을 인도하는 처사(處士)의 윤리(倫理)로 생을 보내 사람들이 그 덕(德)에 감화되어 선량한 자가 많은 낙도무민(樂道無悶)의 마을이 되었다. 모재 김안국과 교유하였고 비문을 영상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이 지었다.
19세 허한(許 澣) :(1490년~1531년) 자는 호부(浩夫)이고 1528년(중종23) 생원시에 합격하여 군자부봉사(軍資副奉事)를 지내고 아들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현귀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공은 성품이 한가롭고 평화로워 지엽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서화(書畵)를 잘 하였는데 특히 호랑이 그림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고 시(詩)는 당나라 시인의 운치와 격조가 있었다.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말하기를 “장음(長吟) 나식(羅湜)은 공의 시를 칭찬하며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19세 허확(許 確) :(1466년~1537년) 1534년(중종29)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고 돈령부동지사(敦寧府同知事),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양천부원군 허종(許琮)이다.
19세 허장생(許長生):(?~1645년) 자는 수백(壽伯)이고 인품이 후하고 덕성스러웠으며 주위의 존경을 받았으며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김효성(金孝誠) 등과 더불어 상소하여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다가 이에 죄를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릉참봉(光陵參奉)이 되고 1628년(인조6)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20세 허강(許 橿) :(1520년~1592년) 자는 사사(士邪)이고 호는 송호(松湖)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며 심성이 높고 깨끗하여 이달(利達)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 좌찬성 허자(許磁)가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홍원에서 귀양가 별세하니 몹시 애통해 하며 전감사별제(典監司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출사치 않고 강호에 방랑하면서 옛사람의 책으로 자오(自娛)하고 스스로 강호처사(江湖處士)라 칭했다. 박학다식하여 만물의 변에 능통한 정작(鄭碏), 이지함(李之菡), 양사언(楊士彦), 김태균(金太鈞) 등과 교유하며 아버지가 편찬하던 역대사감(歷代史鑑) 30권을 완성하였고 저서로 서호유고(西湖遺稿)가 있다. 퇴계 이황(李滉)이 공의 시(詩)를 정성 들여 읽어보고 문장이 맑고 아담함을 감탄하였다.
20세 허방(許 昉) :(1523년~1600년) 1543년(중종38) 사옹참봉(司饔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불사하고 학문에만 전력하고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가락국기(駕洛國記)와 양천허씨유사(陽川許氏遺事)를 기술(記述)하였다. 큰아들 허적(許)의 현귀로 증 좌찬성(贈左贊成) 보조공신(補助功臣)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20세 허순(許 淳) :(1485년~1546년) 호는 사호(士灝)이다. 1509년(중종4) 무과에 합격하여 위원군수(渭原郡守)에 임명되어 공정무사(公正無私)하고 천도무사(天道無私)의 집념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당상관인 정주목사(定州牧使)가 되고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제양군(齊陽君) 허광(許礦)의 아들로 습제양군(襲齊陽君)이다.
20세 허엽(許 曄) :(1517년~1580년) 자는 대휘(大輝)이고 호는 초당(草堂)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546년(명종1)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부교리에 임명되고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선(選) 호당(湖堂)에 올랐으며 그해 동부승지로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청하고 허자(許磁)의 무죄를 논하다가 파직되었고 1568년(선조1)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에 올라 향약(鄕約)의 실행을 건의하였고 동인․서인의 당쟁이 시작될 때 동인(東人)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며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공은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우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벗하였으며 30년 벼슬을 지냈으나 생활이 검소하였고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警民編)을 보충하여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특히 문장(文章)에 능하여 자녀 악록(岳麓) 허성(許筬), 하곡(荷谷) 허봉(許篈), 교산(蛟山) 허균(許筠),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 등과 5문장 집안으로 유명하다. 저서로 초당집(草堂集)이 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노수신이 지었고 행장(行狀)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지었다.
20세 허잠(許 潛) :(1540년~1607년) 자는 경량(景亮) 또는 계홍(季洪)이고 호는 한천(寒泉) 또는 추담(秋潭)이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581년(선조14) 유신(儒臣)으로부터 현량과(賢良科)에 추천되었고 다음해 효행이 탁월하다고 추천 등용된 후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송하고 1595년(선조28)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어 호학(好學) 한강 정구를 스승으로 삼아 도학(道學)을 지도받고 중화부사(中和府使),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역임하고 1603년(선조36)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증 좌찬성이 되고 1613년(광해군5) 위성공신(衛聖功臣) 3등에 추증되고 양창군(陽昌君)에 봉해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20세 허준(許 浚) :(1539년~1615년) 자는 청원(淸源)이고 호는 구암(龜巖)이다. 1569년(선조2)에 유희춘(柳希春)의 추천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가고 1571년(선조4)에 내의원첨정(僉正)이 되고 1590년(선조23)에 왕자의 두창을 완치하고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갈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3등에 올랐다. 1596년(선조29)에 정2품 정헌대부 지충주부사(正憲大夫知中樞府事)가 되어 선조(宣祖)로부터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명을 받고 착수하였다.
    1607년(선조40)에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을 간행하고 1608년(선조41)에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를 개간하였다. 1610년(광해군2)에 동의보감(東醫寶鑑) 25권을 완성 간행하여 우리 나라 의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재 동의보감은 국가보물 제1085호로 지정되어 있다. 1613년(광해군5)에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과 벽역신방(辟疫神方)을 간행하고 양천 공암으로 낙향하니 공암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 일원이다. 1615년(광해군7)에 77세를 일기로 별세하니 나라에서 보국숭록대부 양평군(輔國崇祿大夫陽平君)에 봉했다.
20세 허징(許 憕) :(1558년~1626년) 자는 화중(和仲)이고 호는 서호(西湖)이다. 1574년(선조7) 성균진사시에 합격하여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洗馬)가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서호처사(西湖處士)로 지냈다. 광해군 때 두 아우를 데리고 남원 서호에 은둔하여 경사제자(經史諸子)에 몰두하여 정통하였으며 송죽매월(松竹梅月)에 관한 시를 읊어 자신을 비유하였다.
20세 허항(許 恒) :(1568년~1634년) 자는 중구(仲久)이고 호는 고산(孤山)이다. 1618년(광해군10)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과 이조낭관을 지내고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에는 공주 행재소를 호위하고 정묘호란(1627년) 왕을 강화도로 호종하였고 좌승지가 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공의 시가는 구슬을 꿴 듯이 아름다워 당나라 대가들의 운치가 남아 있어 동쪽지역에 드날리고 후세에 우뚝하다”고 했다.
20세 허흡(許 洽) :(1486년~1549년) 1513년(중종8) 문과에 급제하여 내한(內翰), 이조정랑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1529년(중종24) 양천허씨세보 간행시에 대학자 모재 김안국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기축보(己丑譜)를 편수하게 되었고 양천허씨세고 발간시에는 명나라 사신 공용경(龔用卿)에게 부탁하여 대대로 무궁한 후세에 증빙할 만한 문헌(文獻)이 되게 하였다.
21세 허계(許 禊) :(1564년~1649년) 자는 자길(子吉)이다. 인품이 온화하며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으며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의 도의(道義)에 열중하여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수광(晬光) 이지봉(李芝峰), 한강(寒岡) 정구(鄭逑), 이오봉(李五峰) 등 사현(四賢)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1614년(광해군6) 전부(典簿)를 지냈고 1628년(인조6) 유효립(柳孝立)의 반란을 형 허적과 고변한 공으로 영사공신(寧社功臣) 2등이 되고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지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올랐다.
21세 허교(許 喬) :(1567년~1632년) 자는 수옹 또는 유악이다. 1598년(선조31) 김명원의 천거로 군자감참봉이 되고 1618년(광해군10) 거창현감이 되고 뒤이어 산음현감과 포천현감을 지냈다. 아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현귀로 증의정부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21세 허균(許 筠) :(1569년~1618년) 자는 단보(端甫)이고 호는 교산(蛟山) 또는 성소(惺所)이다. 1594년(선조27) 정시문과 을과에 1597년(선조30) 중시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였으며 병조좌랑을 거쳐 황해도도사가 되었다. 1606년(선조39) 명나라 사신을 영접, 탁월한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난설헌집』 목판본을 출간했으며 다음해 공주목사 형조참의에 올랐고 1610년(광해군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왔고 1614년(광해군6) 천추사(千秋使)로 또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예조 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승진되었다. 그의 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며 그의 저서인 성소부부소(惺所覆瓿藁) 서문에서 명나라 사신 난우(蘭嵎) 주지번(朱之蕃)은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조선에 가서 조선국의 많은 관신사(冠紳士)들과 추종했는데 그중에서 허씨(許氏) 집안이 그 으뜸을 차지하였는 바 이는 바로 그 계장원(季壯元)의 문집이다. 그의 문장은 우여완량(紆餘婉亮)하여 감주(弇州)의 만년의 작품과 같고 그의 시(詩)는 창달섬려하여 화천(華泉)의 맑은 운치가 있으므로 나는 그윽히 기뻐하여 그이 전집(全集)을 요구했던 바 금년에 비로소 한질을 경저리(京邸吏)에게 보내와 전달하여 유원(留院)에 이른 것이다”라고 했다.
21세 허방(許 邦):(?~1459년) 자는 중안(仲安)이고 호는 석헌(石軒)이다. 음사로 낭천현감(狼川縣監)을 지냈다. 젊을 때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고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한다고 이름났고 관청에 있을 때에는 청백함으로 유명하였다. 1455년 단종이 영월로 귀양오자 벼슬을 버리고 영월로 따라가 단종을 수발하였으며 아들 공주판관 허윤공(許允恭), 손자 보령현감 허지(許智)에게 순흥(順興)으로 가서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도우라고 했다. 1456년 단종이 승하하자 급히 관곽(棺槨) 등을 갖추어 시신을 거두어 엎드려 곡한 다음 엄흥도(嚴興道)에게 관을 지게 하고 뒤따라가 을지산(乙旨山) 서쪽 땅에 묻고 떠났다. 주위에서 “허낭천(許狼川)이 아니었으면 엄호장(嚴戶長)의 충성을 이룰 수가 없었다.”하였다. 또한 태백산에 은둔하여 종신토록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삼절당(三節堂)에 모셔졌다.
21세 허감(許 鑑) :(1538년~1584년) 자는 자허(子虛)이고 1564년(명종19)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6년(선조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삼사(三司) 전랑(銓郞)을 지냈고 1584년(선조17) 명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오던 중에 별세했다.
21세 허봉(許 篈) :(1552년~1588년) 자는 미숙(美叔)이고 호는 하곡(荷谷)이다. 1568년(선조1) 생원시에 장원하고 1572년(선조5)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음해 대제학 김귀영(金貴榮) 선(選) 호당(湖堂)에 들었고 1574년(선조7)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기행문 하곡조천록(荷谷朝天錄)을 썼다. 다음해 이조좌랑이 되어 김효원(金孝元)과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어 심의겸(沈義謙) 등 서인(西人)들과 대립했다. 1577년 교리, 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어 도승지 박근원, 장흥부사 송응개 등과 함께 율곡 이이(李珥)의 죄를 논하다가 당쟁에 휘말려 종성으로 귀양갔다.
성품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분명하고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여 성상의 앞에서도 동요함이 없이 바른말을 했다. 문장이 전중(典重)하고 온화하며 시를 지음에 준걸스러고 초일하며 호걸스럽고 통창하였다. 저서로는 하곡집(荷谷集), 하곡조천록(荷谷朝天錄), 해동야언이 있으며 시(詩)는 명시종(明詩綜), 국조시산(國朝詩刪), 기아열조시집(箕雅列朝詩集)에 실려 있다.
조선조의 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공의 시 중에 장편과 단가(短歌)는 깨끗하고 웅장하고 호탕하여 청련(靑蓮)의 유법(遺法)을 깊이 얻었으며 오언시(五言詩) 역시 깨끗하고 고상하여 당시(唐詩)와 유사하다”고 했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조천록(朝天錄) 서문에서 “미숙(美叔)은 약관시절 이미 천하의 책을 모두 읽어 문학과 사장(詞章)으로 조정에 명성이 있었다. 중국의 지역을 모두 답사하여 천하의 기이한 장관을 다 구경하고는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아 얻은 것이 있으면 자세히 기록하고 모두 적었으며 간혹 이것을 시(詩)로 읊어 읽는 자들로 하여금 재미를 붙여 권태를 잊게 한다”라고 했다.
21세 허성(許 筬) :(1548년~1612년) 자는 공언(功彦)이고 호는 악록(岳麓) 또는 산전(山前)이다. 1583년(선조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가 정언, 헌납, 사인을 지내고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간, 예조․병조․이조 판서를 지내고 인조조에서 찬성(贊成)을 추증하였다. 1590년(선조23)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등과 같이 다녀왔다. 이때 황윤길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침략의도를 지적하였으나 김성일은 침략의도가 없다고 진술하자 그 의견에 반대 침략의 가능성이 있음을 직고(直告)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동인(東人)의 주장에 따라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니 “사람들은 허성이 자기 당파[동인]에 편들지 않는 것은 장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허성의 보고를 받아들여 준비했다면 치욕적인 난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종의 유고(遺敎)를 받은 교서칠신(敎書七身) 또는 고명칠신(顧命七身)의 한사람으로 젊어서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에게서 학문을 전수하였고 천성이 강직하고 충효에 힘썼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도 명필로 소문났다. 저술로는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21세 허적:(1563년~1640년) 자는 자하(子賀)이고 호는 수색(水色) 또는 상고재(尙古齋)이다. 1597년(선조3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죽산․양지현감을 역임하고 1607년(선조30) 형조좌랑, 사예(司藝),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재임중 1628년(인조6) 유효립(柳孝立)이 선조의 7남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옹립하려는 것을 고변하여 영사공신(寧社功臣) 1등, 공조판서 양릉군(陽陵君)에 봉해지고 한성판윤을 역임, 증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수색집(水色集)이 6권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서문은 교산 허균(許筠)이 쓰고 발문(跋文)은 미수 허목(許穆)이 기술하였다. 서문에 수색은 어려서부터 고문(古文)을 공부하여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수고하였는데 말년에 하늘의 지혜가 뚫려 마침내 상사(上駟)가 되었으며 문장이 심히 간결하고 후증하며 시(詩)는 한대(漢代)의 악부(樂府)와 위(魏)․진(晋)시대의 고시(古詩)와 경룡(景龍)․개원(開元)연간의 근체(近體) 사이를 출입하여 굳세고 그윽하여 드높이 한 일가(一家)를 이루고 사부(詞賦)는 가장 높고 화려하여 양(揚)․마(馬)․포(鮑)․사(謝)의 뜻을 얻으니 국조(國朝) 이래로 부(賦)를 짓는 자들이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21세 허초희(許楚姬) :(1563년~1589년) 자는 경번(景樊)이고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허엽(許曄)이고 1577년 15세에 안동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갔다. 일찍이 오빠 하곡 허봉(許篈)의 친구인 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했으며 친정의 화액(禍厄)에 따른 고뇌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로 여인의 특유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哀傷的)인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했다. 그의 작품 일부를 동생 교산 허균(許筠)이 명나라 사신이며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줌으로써 중국에서 시집(詩集)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으며 1711년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청나라 초기의 학자인 목재(木齋) 전겸익(錢謙益)과 주지번과 양유년(梁有年) 등은 난설헌집을 격찬하는 말을 서문에서 했다.
21세 허한(許 僩) :(1574년~1642년) 자는 의보(毅甫)이고 호는 행오(杏塢)이다. 1612년(광해군4)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사로 형조좌랑에 올랐다. 이어서 예천군수, 이천부사 등 여섯 고을의 수령으로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쌓았다. 지평(砥平)땅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아들 영의정 허적(許積)의 현귀로 증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산청 금화사(金華祠), 충주 청계사(淸溪祠)에 배향되었다.
22세 허목(許 穆) :(1595년~1682년) 자는 문보(文父) 또는 화보(和父)이고 호는 미수(眉叟) 또는 태령노인(台嶺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나면서 손바닥에 글월문(文)자와 발바닥에 우물정(井)자가 있었다고 하며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다 하여 호를 미수(眉叟)라고 했다. 아버지 허교(許喬)의 임지인 거창(居昌)으로 따라가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사사하여 원근의 많은 학자들과 종유하여 영남학통(嶺南學統)을 이었으며 1626년(인조4) 32세 때 성균관 동학재임(東學齋任)으로서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를 유적(儒籍)에서 처벌한 일로 과거를 못보게 한 왕명으로(뒤에 해벌(解罰)이 되었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의 명소와 산천을 주유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으며 지방의 사림(士林)들과 많이 종유했다. 1650년(효종1) 박학능문(博學能文)하며 그 뜻이 고상하다고 추천되어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곧 사퇴하고 1659년(효종10) 사헌부장령이 되자 옥궤명(玉几銘)을 지어올리고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1660년(현종1) 기해복상(己亥服喪)의 잘못을 상소했다가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되어 2년간 많은 치적과 교화(敎化)를 남겼다. 1675년(숙종1) 이조참판,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이조판서로 옮겼다가 우의정에 올랐다.
30년간 공직에 있었으나 타고난 학자적 체질로 행정 또는 정치권력의 직접적 집행보다는 학자로서 또는 왕사(王師)의 입장에서 임금께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에 관한 의견을 올려 치도(治道)가 바로서게 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예이론(禮理論)의 일인자로서 노론(老論)측의 예론과 대립하였지만 승리를 거두어 왕권의 강화를 통한 왕조질서(王朝秩序)의 확립을 이룩했고 기언(記言), 경례유찬(經禮類纂) 등 방대한 저술(著述)로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한편 서화에도 뛰어나 고전(古篆)에 바탕하여 독창(獨創)한 전서(篆書)는 동방(東方) 제일이며 삼척의 동해비(東海碑)에 새겨진 동해송(東海頌)과 고문운율(古文韻律) 등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나라에서 궤장(几杖)을 내리고 집을 지어주는 특별한 예우는 세종 때 황희(黃喜), 선조 때 이원익(李元翼)과 미수(眉叟) 세 분이다.
사림(士林)들이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의령 미연서원(嵋淵書院), 마전(麻田)에 미강서원(嵋江書院), 나주 미천서원(眉泉書院), 마산 회원서원(檜原書院),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 부여 도강영당(道江影堂) 등에 배향(配享)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찬한 신도비(神道碑)에서 “500년 조선조 대신 중에 대신다웠다고 평하면서 조금도 권력에 아부하거나 연연함이 없이 오직 정의를 지키기에 힘썼고 마땅히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서서 진퇴(進退)를 분명히 했으며 열심히 옛것을 연구하여 그 진리를 깨우쳤으며 욕되지 않고 절조를 지키며 명분을 살려서 명예에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22세 허완(許 完) :(1569년~1637년) 자는 자고(子固)이고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1593년(선조26) 무과에 합격하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고 선전관을 거쳐 남평현감, 단천군수, 전라도수군절도사에 올랐다.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쉬었다가 인조반정 후에 중군에 제수되고 1627년(인조5) 강화에 왕을 호종한 노고로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영남우절도사 겸 진주목사가 되었다.
1629년(인조7) 회령도호부사로 옮겨 오랑캐들의 준동을 진정시키고 선정을 베풀어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36년(인조14) 영남좌절도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음을 구하고자 보졸(步卒) 1만여명을 이끌고 진격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대패하고 순절(殉節)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인조는 “비록 적을 격파하지는 못했으나 능히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쳤으니 충신(忠臣) 의사(義士)이다”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은 신도비문에서 “공은 천성(天性)이 바르고 근엄하여 사대부(士大夫)를 대접하되 예(禮)로써 하고 군대를 다스리되 비천(卑賤)하다고 멸시하거나 친근(親近)하다고 사사로이 한 일이 한번도 없어 사졸(士卒)의 마음을 얻고 벼슬의 지위가 높았는데도 항상 변방을 전전하였고 늘 국가의 큰 은혜를 받았으면 당연히 죽음으로써 전하(殿下)에게 보답하여야 되거늘 어찌 염치(廉恥)를 버려서까지 자손을 위하여 계책하랴 하고 자제(子弟)를 가르치되 독서로 교육을 삼으며 사치를 금지하고 선비로 자처하였으며 불의(不義)를 부끄러워함을 오욕(汚辱)을 부끄러워하듯 했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공신과 귀인이 다 옛친구들이지만 반드시 절조(節操)를 굽히거나 아부하지 않았다”고 했다.
22세 허욱(許 頊) :(1554년~1618년) 자는 공신(公愼)이고 호는 부훤당(負喧堂)이며 시호는 정목(貞穆)이다. 1591년(선조24) 공주목사에서 호서관찰사에 올랐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을 받고 명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청하여 산동(山東)의 양곡 2만2천7백석을 구원받아 백성을 구제했고 1606년(선조39) 이조판서가 되었고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오랑캐의 우두머리인 노아합적(奴兒哈赤)이 홀자온(忽刺溫)을 격파하여 북쪽 변방이 소란하자 병마도체찰사(兵馬都體察使)가 되어 오랑캐를 대파하여 평정했다. 평생을 겸(謙)․신(愼)․염(廉)․근(謹) 네 가지에 힘써서 집에 있을 때부터 조정에서 임금을 섬기기까지 이 네 가지로 해냈으며 그 가르침이 대개 질박(質朴)하고 신실(信實)하여 과장이 없었으며 말없이 몸소 행한 분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22세 허적(許 積) :(1610년~1680년) 자는 여차(汝車)이고 호는 묵재(黙齋) 또는 휴옹(休翁)이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1637년(인조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갔고 사헌부에 있을 때 인사행정에 있어서 뇌물을 받고 인재(人材)를 등용하는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 병조판서 이시백(李時伯) 등을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여 백관을 놀라게 한 기백이 있다. 의주부윤, 경상․전라관찰사를 지냈고 평양감사를 거쳐 1667년(현종8) 우의정이 된 후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1676년(숙종2) 변무사(辨誣使)로 청나라에 갔다와서 1678년(숙종4) 재정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이를 사용케 하였다. 미수 허목(許穆)과 남인(南人)을 영도하다가 허목이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과격론에 반대함으로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리게 되어 탁남을 영도하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받았다. 1680년(숙종6) 서자(庶子) 허견(許堅)의 역모사건으로 삭탈관직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1689년(숙종15)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金益勳), 이사명(李師命) 등을 처형하였다. 그는 식견(識見)이 넓고 총명하였으며 녹봉(祿俸)은 친구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고 비록 정적(政敵)인 서인의 송시열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1795년(정조19) 5세손인 허복(許澓)이 글을 올려 공의 억울한 내용을 하소연하자 정조는 하교(下敎)하기를 “이 대신(大臣)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행적이 죄를 범하지 않았으니 신원(伸寃)하고 관작을 회복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22세 허주(許 晭) :(1586년~1656년) 자는 여회(汝晦)이고 호는 필천(泌川)이다. 공이 거상(居喪)중에 집이 실화(失火)하여 구할 길이 없어 빈소(殯所)를 보듬고 호곡(號哭)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돌이켜 열화(烈火)가 자멸하니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이 하늘에 닿았다고들 했다. 이후 사림(士林)의 추천으로 청산현감(靑山縣監)을 지내고 후에 여러번 천거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22세 허주(許 宙) :(1563년~1621년) 자는 원경(遠卿)이고 호는 죽촌(竹村)이다. 1606년(선조39) 사마시에 합격하여 금부도사가 되고 1612년(광해군4) 문의현령으로 1613년(광해군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동부승지에 올랐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이에 관한 유집이 많이 전해오고 있으며 덕행(德行)이 높았다.
22세 허진(許 晋) :(1536년~1616년) 자는 경소(景昭)이다. 1561년(명종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증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22세 허후(許 厚) :(1588년~1661년) 자는 중경(重卿)이고 호는 관설(觀雪)이다. 1623년(인조1)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내시교관으로 임명되었고 1633년(인조11) 사도시주부, 지평현감, 의성현령을 지냈고 장악원정을 지냈다. 1693년(숙종19) 원주 유림들이 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도천서원(陶川書院)을 세웠는데 고종 때 서원 철폐로 훼철되고 서원 터만 남아 있다.
22세 허흔(許 昕) :(1543년~1623년) 자는 경회(景晦)이다. 1579년(선조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3년(선조16) 계미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공조정랑, 호조정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김제군수, 정주․양주목사를 거치고 통정대부로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승지(承旨)가 되었다. 이조판서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23세 허격(許格) :(1607년~1690년) 자는 춘장(春長)이고 호는 창해(滄海)이다. 동악 이안눌(李安訥)에게 수학하였는데 “웅장한 문장과 높은 재주는 끝내 한곳에 얽매일 사람이 아니다”라고 칭찬했다.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 오랑캐와 강화했다는 소식에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책상 위에 춘추(春秋) 한 질만을 놓고 매일 보았으며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했다. 저술로 창해집(滄海集)이 있다.
23세 허대인(許大仁)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가재(家財)를 털어 의사(義士) 500인을 모아 무기를 갖추어 격서(檄書)를 띄우니 수천의 병졸이 몰렸고 충의(忠義)로서 기(籏)를 세우고 부령군(富寧郡)을 탈환하고 나머지 요지를 점거했다. 이에 수부령부사 겸 병마첨절제사(守富寧府使兼兵馬僉節制使)에 제수되었다. 이런 공적(功績)으로 1892년(고종29)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임란공신 2등에 추봉되었다.
23세 허육(許 堉) :(1673년~?) 자는 이후(而厚)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처음 이름은 허필(許泌)이다. 1690년(숙종16) 사마시에 합격하여 학록주부(學錄主簿)에 임명되었고 편수관과 직제학이 되었다. 특히 예(禮)에 능하여 사소한 절목(節目)까지 정밀히 궁구(窮究)하여 서술(序述)하였다. 뒤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23세 허입:(1605년~1669년) 자는 계진(季鎭)이다. 음사로 통훈대부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지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시(詩)를 읊기를 좋아하였으며 송설체(松雪體)를 잘 써 필법이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부친 충장공 허완(許完)이 순절함에 벼슬에 뜻을 잃고 송산(松山)에 살면서 한가로이 시와 글씨로 소일하였다. 특히 처남 대제학 용주(龍洲) 조경(趙絅)과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함께 인근 산천을 즐겼다. 미수 허목, 용주 조경, 경기감사 이진(李袗), 이조참의 이회(李禬), 이조참판 이연년(李延年), 응교 조위봉(趙威鳳)이 함께 삼부연폭포(三釜淵瀑布)에 모여 각각 가시(歌詩)를 지은 작품이 있는데 미수가 이것을 전서(篆書)로 쓰고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집안에 전해온다.
23세 허휘(許 徽) :(1568년~1652년) 자는 휘지(徽之)이고 호는 퇴암(退庵)이며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1607년(선조40)에 음사로 양천현령(陽川縣令)이 되고 인조반정(1623년) 후 안성군수가 되고 예천군수, 이천도호부사, 동경부윤을 거쳐 1636년(인조14) 가선대부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지금 오랑캐가 바야흐로 강성한데 우리가 화(禍)를 불러들이게 하였으니 1년이 못 되어 큰 침공이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성(王城)을 삼고 군량을 저축하고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남성(南城)의 보루(堡樓)를 증축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하였는데 겨울에 과연 오랑캐가 대거 침략하여 왕이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40일동안 굶주린 빛이 없이 지냈다. 이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특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승진되고 다음해 형조판서가 되고 한성판윤, 강화유수, 공조판서를 지냈다.
23세 허청(許 崝) :(1573년~1663년) 자는 탁이(卓爾)이고 1606년(선조39) 무과에 합격하여 첨절제사,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송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과 함께 남한산성에 피난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장흥부사를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24세 허계(許 啓) :(1594년~1653년) 자는 명로(明老)이고 호는 성우(醒愚)이다. 1612년(광해군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2) 호조좌랑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장(長)과 호조참판이 되고 두 번이나 경기관찰사를 지내는 동안 곧은 정사를 펴고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으며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청나라 심양에 다녀와서 1643년(인조21)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성품이 본래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아버지 판추공(判樞公) 허휘(許徽)의 상(喪)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유서(遺書)를 남기기를 “내가 체질이 약하면서도 나이가 육순(六旬)이 되었고 재주가 없으면서도 아경(亞卿)에 올랐으며 아들과 손자가 있으니 나의 소원을 다하였다. 다만 두 조정의 국은(國恩)을 아직 갚지 못하였고 3년의 어버이 상을 마치지 못했으니 어찌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겠는가. 지금에 이르러 비록 만금(萬金)의 약재(藥材)가 있더라도 치료하기 어려울 듯하다”하고는 약을 물리치고 마시지 않다가 별세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제문(祭文)을 지어 애도하였다.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24세 허옥(許 沃) :(1680년~1744년) 자는 계심(啓心)이고 호는 술봉(述峰)이다. 1717년(숙종43) 정유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임명되어 단양․가평 군수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청주에서 일어나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사헌부장령, 사간원헌납, 천안군수를 역임하고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으며 1742년 병조참의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24세 허노(許 輅) :(1610년~1637년) 자는 경행(景行)이다. 1623년(인조10) 무과에 합격하여 순안현령(順安縣令)이 되었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이에 참전하여 순절하여 1649년(인조27)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에게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25세 허윤(許 玧) :(1645년~1729년) 자는 윤옥(允玉)이고 호는 계주(桂洲)이며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1672년(현종13)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677년(숙종3) 중시문과에 급제하고, 또 1683년(숙종13) 계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
25세 허정(許 珽) :(1621년~?) 자는 중옥(仲玉)이다. 1646년(인조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1년(효종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냈고 승정원승지도 했다. 1678년(숙종4) 무신의 재질이 있다 하여 관서절도사에 천거되었고 모습이 준걸스럽고 밝으며 성품이 강의(剛毅)하고 드높았다. 평생동안 시(詩)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세상에 따라 부침(浮沈)하지 아니하며,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았다.
26세 허경(許 熲) :(1650년~1720년) 자는 경오(耿吾)이고 호는 빙호(冰湖)이다. 1675년(숙종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1년(숙종7) 신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 검상(檢詳), 전조(銓曹)의 낭관(郎官), 동경윤(東京尹)을 역임하고 가선대부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저서로는 빙호유고(冰湖遺稿)가 있다.
26세 허원(許 源) :(1671년~1731년) 자는 청보(淸甫)이다. 근신(謹愼)하고 후덕한 장자(長者)로 일찍이 학문을 한다고 표방하지는 않았으나 천성(天性)이 도(道)에 가까워 행실과 말이 윤리에 맞으며 선비들을 사랑하고 좋아했다. 구천(龜川) 이세필(李世弼)의 문하에 있을 때 숙종15년(1689년) 숙종이 광주쌍령을 지나다가 충장공 허완(許完)의 정충묘(精忠廟)를 참배하고 그 후손인 현손 허원(許源)에게 벼슬을 내리니 순릉참봉(順陵參奉)이다. 다시 승진하여 금부도사, 예안현감이 되었는데 선정(善政)하는 방백(方伯)으로 알려졌고 천안군수로 있을 때인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적을 격파하여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승차했다. 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있을 때 세 아들 허집(許集), 허채(許采), 허휘(許彙)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니 편지를 보내 경계하기를 “자만하지 말고 벼슬길로 나아감에 뜻을 두지 말며 가슴에 새겨두어 부모의 근심을 끼치지 말도록 하라”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녹봉을 받은 지 40년이 되었는데 어찌 자손을 위하여 집안 걱정을 하랴”하였다. 그러므로 관직을 사임하던 날에 식량이 떨어질 지경에 이르러도 근심하지 않았다. 6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사간 집(集), 정언 채(采), 부제학 휘(彙), 사위 현령 심각(沈殼)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연안부사 반(槃), 성균진사 계(棨), 경(檠)이니 사람들이 공이 못다 누린 것을 자손이 복을 받는[食服] 징험이라고 말하였다. 옥동(玉洞) 이서(李漵)와 친한 벗이었으므로 그의 동생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26세 허정(許 晶) :(1670년~1740년) 자는 우신(于新)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올랐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독단으로 보병 천여명을 거느리고 방어 공격을 하니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숙연하여 흔들림이 없으며 씩씩하고 위엄이 있었다. 가난하고 곤궁한 처지에서도 지조를 지키며 편안한 마음으로 처세하니 영조조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다.
27세 허집(許 集) :(1689년~1736년) 자는 대성(大成)이고 호는 송은(松隱)이다. 1705년(숙종31) 진사시에 진사로 합격하고 1715년(숙종41) 증광문과에 갑과로 1등으로 동생 허채(許采)와 같이 급제하여 통훈대부 사간원사간 겸 지제교(司諫院司諫兼知製敎)가 되고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숨은 덕(德)과 지극한 행실과 함께 세상의 화려한 명예와 이익에 대해 모두 담백하였으며 일생동안 공부한 것이 성리학(性理學)에 있었고 시가(詩歌)를 읊은 데에는 그다지 유의하지 않았으며 화락하고 단아한 군자(君子)의 기상(氣象)을 지녔다. 저서로는 송은유고(松隱遺稿)가 있는데 수록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데 대체로 내용이 간결하고 깨끗하다.
27세 허채(許 采) :(1696년~1764년) 자는 중약(仲若) 또는 경회(景晦)이고 호는 농와(聾窩) 또는 현은자(玄隱子)이다. 1719년(숙종45)으로부터 1727년(영조3)에 이르기까지 열한번이나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727년 증광시에 문과 갑과에 백씨(伯氏) 허집(許集)과 같이 급제하여 통훈대부 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신장(身長)이 훤칠하고 풍채가 장대하여 사람들을 위압하였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약관(弱冠)시절 이후에는 여러번 성균관(成均館)에 오르고 제과(制科)하는 글에 장원하여 선비의 사범(師範)이 되니 사람들은 허가(許家)의 책문(策文)이라 칭찬하였으며 국포(菊圃) 강박(姜樸)은 말하기를 “백년이래로 이와 같은 글을 보지 못했다”하였다. 일찍이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있을 때 영조는 “피폐한 고을을 진정시키고 어지러움을 다스림은 허채(許采)가 아니면 할 수 없다”하였다. 넓은 도량과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능이 있었으나 험난한 시대를 만나 걸핏하면 비방을 받아 제대로 포부를 펴보지 못하였다. 경전(經典)과 자서(字書)에 능통하였으며 저서로는 수진현람(修眞玄覽), 시림잡록(詩林雜錄), 농와집(聾窩集)이 있다. 1756년(영조32) 전국에 산재한 선대의 시편(詩篇)을 10년간 수집해 양천세고(陽川世稿) 보유집과 후집을 편찬하는데 전력을 다했고 아우 허휘(許彙)가 발문(跋文)을 지었다.
27세 허휘(許 彙) :(1709년~1762년) 자는 진경(晋卿)이고 호는 호은(湖隱) 또는 표은(豹隱)이다. 1740년(영조16) 생원이 되고 1743년(영조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선대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공은 자성(姿性)이 화락 단아하고 겸손 화평하여 여러 사람과 종일토록 있으면서 희롱하는 말이 없고 솔직한 실정대로 행동하며 마음을 속이는 일이 없었다. 남의 불선(不善)을 보면 마치 더럽혀지는 것처럼 여겼고 벼슬자리에 있을 적에는 청탁의 길을 막았고 시험을 관장하게 되어서는 사정을 따르는 길을 막았고 자기 자신의 봉양은 반드시 간약하게 하고 남을 접함에는 반드시 인자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표은집(豹隱集)이 있다.
28세 허임(許 任) :(1726년~1796년) 자는 인수(仁叟)이다. 1756년(영조32)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군주를 시위(侍衛)하였다. 임금이 수사공(水使公) 청백리 허정(許晶)의 손자임을 알고 “너의 조고(祖考)를 욕되게 하지 말라”하였다. 활을 잘 쏘아 훈련원부정, 순천군수, 영암군수, 여주목사, 김해부사를 지내고 가선대부 행용양위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올랐다.
28세 허필(許 佖) :(1708년~1768년) 자는 여정(汝正)이고 호는 연객(烟客)이다. 성균진사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깨끗하고 고우며 행동이 조용하고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사리를 잘 구분하고 평이하면서도 꼿꼿이 섰으며 사람과 담론하면 음성이 정갈하고 평시에 시(詩)를 읊기를 좋아하였으며 또 재주가 많아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했고 그림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선사창수록(仙槎唱酬錄)과 연객유고(烟客遺稿)가 있고 작품이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8세 허임극(許任克) :(?~1796년) 자는 인수(仁叟)이다. 음사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1789년(정조13)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이르고 이때 장진부(長津府)를 새로 설치할 때 그 적임자로 부임하여 개척공사를 완수하고 학교를 세워 백성을 가르치고 민속을 개량하였고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올랐다. 1795년(정조19) 금위중군도총부부총관(禁衛中軍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죄인을 신중히 다루었으므로 허부처[許佛]라 불리었다.
29세 허찬(許 巑) :(1850년~1932년) 자는 태견(泰見)이고 호는 소와(素窩)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기질이 남달라서 성품이 곧고 효행이 우뚝하고 모범되며 매우 맑고 오전하였고 가세가 빈한했지만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하여 크게 칭찬하기를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했고 또한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졌다. 1886년(고종23) 부친상을 당해서 성재의 사의예절(士儀禮節)을 준수하고 피눈물 삼년에 지극한 효성(孝誠)을 주위에서 칭찬하였다. 성재를 뵙고 학문을 닦은 지 3년 논설이 더욱 정명하고 성리의 학설이 투철하여 영남 이외의 인사들도 많이 모였다. 경례유찬(經禮類纂)의 편찬, 이택당(麗澤堂)의 창설, 성재영정을 이택당에 봉안, 미연서원(嵋淵書院)의 중건 등 모두가 공의 심력(心力)이 뻗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항상 제자들에게 경계하기를 선비의 마음과 몸가짐을 마땅히 무자기(毋自欺:자기의 양심을 속이지 말라) 세 글자로 덕행(德行)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또 이르기를 사람의 학문은 근근(勤謹:근면하고 삼감) 두 글자밖에 없으니 이를 따라 실행하면 무한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30세 허계(許 棨) :(1798년~1866년) 자는 이숙(而肅)이고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1815년(순조15) 무과에 합격하여 함경도병마절도사 겸 수군절도사, 평안도병마절도사, 포도대장, 금위대장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다.
30세 허임(許 任) :(1795년~1840년)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인으로 온 집안이 열심히 천주교를 봉행하고 바올로로 영세도 받았다. 1839년(헌종5) 기해년 8월 천주교 박해가 크게 일어나 포도청에서 배교(徘敎)를 강요당하고 70대의 곤장을 맞는 등 혹독한 형을 당하였으나 일평생 천주교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 금하는 교(敎)를 믿는 군인이라 한층 고문이 심하여 배교한다고 하였으나 마음에 죄를 뉘우쳐 다시 감옥에 갔다. 돌이키는 증표로 감옥의 오물을 한 사발 마시게 하고 십자고상(十字高像)에 엎드려 절하매 포장(捕將)은 매를 쳐서 드디어 1839년(헌종5) 12월 16일 숨을 거두니 성인품(聖人品)에 올라 지금 절두산 성단에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30세 허전(許 傳) :(1797년~1886년) 자는 이로(而老)이고 호는 성재(性齋)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에게 수학하였으며 1820년 부친 허형(許珩)의 상(喪)을 당하여 법복편(法服篇)을 저술하고 1835년(헌종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고 함평현감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4년동안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학하였다. 1856년(철종7) 우부승지에 제수되고 병조참의에 승진, 사의(士儀)를 완성하고 수전록(受廛錄)과 종요록(宗堯錄)을 완성하여 삼정(三政)의 대책을 올렸다. 1864년(고종1)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에 제수되어 매월 초하루마다 명륜당(明倫堂)에서 강학(講學)하고 향약(鄕約)을 더 만들어 교육사업에 힘써 김해를 중심으로 경상도에 학문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고 임금이 말씀하기를 “그대가 부(府)에 부임한 뒤로부터 선비들이 훌륭한 스승을 얻었다는 명성이 있다”하고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고 1873년(고종10) 자헌대부로 승진,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형조판서가 되고 특별히 홍문관제학으로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에 제수되어 성헌잠(誠軒箴)을 지어올렸고 철명편(哲命篇)을 올리고 1881년(고종18)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숭정대부에 가좌되고 흥선대원군의 귀국을 시켜야 한다는 글을 올렸으며 다음해 보국숭록대부 판의금부사(輔國崇祿大夫判義禁府事)를 제수했다. 사후 경상도 유림들이 산청에 이택당(麗澤堂)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문인들이 성재집(性齋集)을 간행하였다. 양천허씨족보증수서를 1852년(철종3)에 서술하고 또 1868년(고종5) 양천허씨세고 발문을 썼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 영남학파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31세 허연(許 鍊) :(1808년~1893년) 처음 이름은 허유(許維)이고 자는 마힐(摩詰)이고 호는 소치(小癡)이다. 1848년(헌종14) 무과에 합격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신묘한 재주를 지니어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선사(草衣大禪師)를 찾아가 인격과 학문을 수양하고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인 녹우당 윤공재가(尹恭齋家)의 3대에 이르는 명화첩을 통하여 깊은 화법과 필법을 터득하고 초의선사의 천거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에 입문한 후 극치(極致)의 경지(境地)를 이루어 그 명성이 높아 1849년(헌종15)에는 헌종(憲宗)께 나아가 그림을 그렸으며 일생을 고고(孤高)한 선비정신으로 일관했다. 소치의 작품 중에는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를 비롯하여 사군자(四君子), 노송도(老松圖), 괴석도(怪石圖) 등의 호방한 구성의 문기(文氣)있는 걸작들이 많다. 여기에 시(詩)․서(書)․화(畵)까지 능통하여 허소치 삼절(三絶)이라는 극찬의 호칭까지 얻었다. 당대의 명사들인 석파 대원군(大院君) 이하응, 민영익, 신관호 등과 교유하였으며 1857년(철종8) 고향에 돌아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세우고 85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소치 특유의 문기가 드높은 불후의 작품들을 남겼다. 오늘날 5대(五代) 화가의 터전을 마련한 남종(南宗) 문인화(文人畵)의 토착화를 일궈낸 업적은 조선조 후기 회화사(繪畵史)의 커다란 획으로 평가되고 있다. 초대 소치(小癡) 허연(許鍊), 2대 미산(米山) 허형(許瀅), 3대 남농(南農) 허건(許楗), 4대 임전(林田) 허문(許炆), 그리고 5대 허전(許塡), 허준(許埈)이다. 운림산방은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대인물(近代人物)

30세 허박(許 樸) :(1876년~1919년) 자는 춘삼(春三)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열중하였고 무예(武藝)를 연마하였으며 항일사상(抗日思想)이 투철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천여명을 이끌고 임실군 오수면 주재소를 습격하고 혈서(血書)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써서 높이 만세를 외치니 이천군중이 사기충천하여 일경(日警)을 붙잡아내고 면장과 면직원까지 시위에 가담시켜 만세소리는 절정에 도달하여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러자 임실, 남원의 일헌병대가 출동하여 발포하니 공은 선두에서 지휘하던 중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殉國)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열사추모비가 세워졌고 1991년 광복절에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고 전북신문에서 임실군 출신 독립투사 허박(許樸)의 투쟁사를 상세히 소개하였다.
31세 허소(許 炤) :(1882년~1942년) 자는 남규(南奎)이고 호는 효봉(曉峰) 또는 담수(髧叟)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사수(師受)하니 문장과 필력(筆力)이 뛰어나 전서(篆書)와 산수화의 대가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금강산에 들어가 산형(山形)을 체득하고 미수 허목(許穆)의 필법을 효방(効倣)하고 판서 윤용구(尹用求)가 칭찬하니 “봉황은 천길 위를 나르며 굶주려도 조앙을 쪼지 않는다”하였다.
32세 허균(許 均) :(1913년~1992년) 자는 윤성(潤成)이고 호는 석암(昔巖)이다. 천성이 영민하고 자질이 특출하고 서당(書堂)에서 수학하고 제지자영(製紙自營)에 들어서 국내 굴지의 신흥제지회사(新興製紙會社)를 설립하여 신제품을 개발하여 11개 부문의 특허를 획득하고 훈민정음 영인본 용지를 생산하여 무상으로 제공하였으며 위선사업과 장학사업에 열성을 보였고 고향 향토발전에도 공로가 지대했다.
32세 허진(許 璡) :(1853년~1932년) 자는 여진(汝振)이다. 1869년(고종6) 군직(軍職)을 제수받고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을 거쳐 일곱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병조참의, 승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고 함경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1928년 양천허씨대동보를 발간하는데 종약장으로 서문을 썼다.
32세 허형(許 瀅) :(1862년~1938년) 자는 정중(淨仲)이고 호는 미산(米山)이다. 천부적(天賦的)인 그림 재주가 부친 소치 허연(許鍊)에게서 드러나 2대의 화업을 계승하였으나 격동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난스런 직업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제2회 선전(鮮展)에 63세로 입선, 그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묵모란(墨牧丹), 묵송(墨松), 묵죽(墨竹) 등 주로 묵화풍에서 높이 평가된다. 두 아들 허건(許楗), 허임(許林)과 허백연(許百鍊)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혼을 꽃피우게 하였다.
33세 허건(許 楗) :(1908년~1987년) 호는 남농(南農)이다. 조부 소치 허연(許鍊), 부친 미산 허형(許瀅)에 이은 운림삼방 3대인 남농은 남종화(南宗畵)에 화술을 현대적 감각으로 승화시켜 한국적 새로운 남종화로 발전시킨 화가이다. 194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