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충주최씨시조(忠州崔氏),최승(崔陞),충주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6 15:04 수정일 : 2019-11-01 15:16

시 조

충주최씨(忠州崔氏)의 시조(始祖)는 최승(崔陞)으로, 846년(신라 문성왕 8) 신라(新羅)에 흉년이 들어 도처에서 도적들이 무리를 지어 퍼져 갈 때 당(唐)나라 무종(武宗)의 명을 받아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를 토평(討平)하였고, 889년(진성여왕 3) 원종(元宗)․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平定)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그 후 승(陞)은 예성(蘂城)에 그대로 머물러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충주(忠州)로 하였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승의 후손으로 호장(戶長)을 지낸 공의(公義)를 일세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의 유래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완장성(薍長城)․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 24대 왕, 재위기간 : 534~576) 때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忠州)로 개칭하고 뒤에 창화군(昌化郡)이라 하여 중원도(中原道)라 칭하다가 고종(高宗) 때 국원경(國原京)이 되었으며, 조선(朝鮮) 명종(明宗) 때 유신현(維新懸)으로 부르다가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되었다. 그 후 많은 변천을 거쳐 고종 대 20군(郡)을 다스리는 부(府)가 되었다가 1956년 충주면(忠州面) 일원은 충주시(忠州市)가 되었고 나머지는 중원군(中原郡)으로 고쳤다.


대표적인 인물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의(公義)의 손자 옥(沃)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벼슬길에 올라 1324년(충숙왕 11)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특히 옥이 부정(副正)으로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장덕리에 재직 중 1264년(고려 원종 5)에 심었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166호로 지정되었고, 천연기념물 97호로 지정된 밤나무는 지금도 해마다 굵은 밤이 열려 귀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그의 아들 삼형제는 모두가 벼슬에 나가 고려 왕조에 공헌했는데, 장남 백청(伯淸)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했고, 차남 중청(仲淸)은 판관(判官)을 지냈다. 삼남 우청(遇淸)은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진례현위(進禮縣尉)에 올랐으며 명종(明宗)이 즉위하기 전에 전첨(典籤)으로 있다가 명종 즉위 후 대간(臺諫)을 역임했으며, 1174년(명종 4) 병마부사(兵馬府使)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고 1182년(명종 12)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거쳐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원유(原儒)는 중청(仲淸)의 5세손으로 고려 말 유림(儒林)의 영수로서 당대의 명신(明臣)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가 순절(殉節)하자 음독 자결했다.

원유(原儒)의 아들 염(氵廉)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고, 세째 아들 순(洵)은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성절사(聖節使)로 중국(中國)에 다녀와 여러 관직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세자필선(世子弼善)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중군 총제(中軍摠制)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우청(遇淸)의 손자 빈(濱)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언양 현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으며, 빈(濱)의 현손(玄孫) 맹현(孟賢)은 여러 지방 관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는데 고을 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순(洵)의 6세손 개국(盖國)은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1547년(명종 2)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지평(持平)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명선(明善)은 1555년(명종 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부사(地方府使)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정호(挺豪)는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609년(광해군 1)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은총(恩寵)이 무비(無比)하여 벽옥적(碧玉笛)을 하사 받았다.

그 외 인물로는 효자(孝子)로 이름난 혁(爀)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동지돈령(同知敦寧)을 지낸 규석(奎錫)이 유명하고, 학자(學者) 동봉(東鳳)은 후진양성에 전심하는 한편 문집(文集)을 남겨 문명(文名) 높은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최씨(忠州崔氏)는 전국에 15,7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충주최씨조상인물

최광열(崔光列) :고려(高麗) 때 낭장(郎將)을 역임하였다.

최공의(崔公義) 고려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판도판서(判圖判書)를거쳐 충선왕(忠宣王) 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으며 중원백(中原伯)에 봉해졌다.

최열(崔 洌) 고려(高麗) 때 판종부시사를 역임하였다.

최옥(崔 沃)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출사(出仕)하여 1324년(충숙왕11)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중원(中原)의 영모재(永慕齋)에 제향(祭享)되었다.

최백청(崔伯淸)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으며, 중원(中原)의 영모재(永慕齋)에 제향되었다.

최중청(崔仲淸) 고려에서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최숙청(崔叔淸) 고려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최우청(崔遇淸) ?~1184 (명종 14)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진례현위가 되고, 명종(明宗)의 잠저(潛邸) 때 그 부(府)의 전첨(典籤)으로 있었다. 명종 즉위 후 대간(臺諫)을 지내고 1174년(명종 4) 병마부사(兵馬副使)로서 조위총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다.

그후 국자 좨주(國子祭酒)를 거쳐 1177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서 과시(科試)를 맡고, 이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서 정주도령(靜州都領) 김순부(金純夫), 낭장(郎將) 김 숭(金 崇)의 모반을 토벌한 뒤 판위위사가 되었다. 1180년 추밀원사(樞密院使)․태자 빈객(太子賓客), 1182년 한림학 사승지(翰林學士承旨), 이어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중원(中原)의 영모재(永慕齋)에 제향되었다.

최원유(崔原儒) 자(字)는 중현(仲賢), 호(號)는 덕은(德隱), 시호(諡號)는 충헌(忠獻), 고려말 유림(儒林)의 영수(領袖)로서 정몽주(鄭夢周)등과 교유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일찍이 그가 영주현윤(榮州懸尹)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정몽주(鄭夢周)가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그후 정몽주가 순절(殉節)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도 음독 자결했다.

최염(崔氵廉) 시호(諡號)는 양정(良貞),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文 科)에 급제, 반주검교정승(班主檢校政丞)이 되고 조선 초(朝鮮初)에 안변(安邊)에 적거(謫居)했다. 중원(中原)의 영모재(永慕齋)에 제향(祭享)되었다.

최자(崔 澬)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때 이조 전서(吏曹典書)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 도학(道學)에전념하였다. 사후(死後)에 나라에서 예장(禮葬)하였다.

최순(崔 洵) 호(號)는 국당(菊堂). 1396년(태조 5)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급제, 성절사(聖節使)로 중국(中國)에 다녀와 병(兵)․공(工)․이조 정랑(吏曹正郞)과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이 되고 세자 필선(世子弼善)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충청 감사(忠淸監司)․중군 총제(中軍摠制)․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최빈(崔 濱) 조선(朝鮮) 때 언양 현감(彦陽縣監)으로 있으면서 청검(淸儉)하고 애민(愛民)하였으며, 선정(善政)하였으므로 언양현민(彦陽縣民)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최설로(崔說露)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최평(崔 枰) 조선에서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를 역임하였다.

최량(崔 凉)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최진방(崔鎭邦)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최진국(崔鎭國)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최경손(崔敬孫)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하손(崔河孫) 조선조(朝鮮朝)에 진사(進士)였다.

최계손(崔季孫)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한로(崔漢老)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최인묵(崔仁黙)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를 지냈다.

최호문(崔好文) 조선조(朝鮮朝)에 수의도위를 역임하였다.

최운형(崔運亨)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최태(崔 泰) 조선(朝鮮) 때 훈련원 습독(訓鍊院習讀)을 역임하였다.

최무(崔 武) 조선(朝鮮)에서 사직(司直)을 지냈다.

최완(崔 浣) 조선조(朝鮮朝)에 진사(進仕)였다.

최맹현(崔孟賢) 자(字)는 홍치(弘治). 1519년(중종 1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지방의 외직(外職)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앞서 외직을 지내는 동안 부임하는 고을마다 선정 (善政)을 베풀었다.

최덕로(崔德露) 조선 때 풍저창(豊儲倉) 부사(副使)를 역임하였다.

최득로(崔得露) 조선(朝鮮)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최영(崔 榮) 1468년(세조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좌통례(左通禮)를 거쳐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최관(崔 灌)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사공(崔士恭) 조선조(朝鮮朝)에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인수(崔麟壽) 조선 때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최개방(崔盖邦) 조선(朝鮮) 때 종사랑(從士郞)에 올랐다.

최개국(崔盖國) 1516(중종 11)~1579(선조12) 자(字)는 자성(子省), 호(號)는 남악(南岳), 분(汾)의 아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子)를거쳐 1547년(명종 2)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지평(持平)․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등을 역임한 뒤에 1565년(명종 20)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574년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고, 1576년(선조 9)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최명선(崔明善) 자(字)는 회백, 호(號)는 백담(白潭). 155 5년(명종 10) 문과에 급제하고, 흥해(興海)․청풍(淸風) 등지의 부사(府使)를 거쳐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일찍이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외직으로 나가 있을 때는 많은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청풍(淸風)의 한벽루(寒碧樓), 괴산(槐山)의 청원정(淸遠亭) 등을 건축(建築)했다.

최정호(崔挺豪) 자(字)는 시응(時應), 호(號)는 화곡. 160 3년(선조 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09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고, 은총(恩寵)이 무비(無比)하여 벽옥척(碧玉笛)을 하사받았다. 1622년 그가 죽자 인조(仁祖)가 탄식하기를 “이 사람이죽었단 말인가? 내 그 절개가 가상하여 장차 등용하려 했는데”하고애도(哀悼)하여 마지 않았다 한다.

최광형(崔光泂) 조선(朝鮮) 때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최제(崔 濟) 자(字)는 여즙(汝楫). 조선에서 이름난 효자(孝子)로서조봉대부(朝奉大夫)․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追贈)되었다.

최일(崔 鎰) 조선조에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최혁(崔 爀) 조선에서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追贈)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가증(加贈)되었다.

최환(崔 煥) 호(號)는 오가당(五可堂).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송우암(宋尤菴)과 도의문교(道義文交) 했으며 효종(孝宗)이 북벌(北伐)하려 할 때 우암(尤菴)이 여러번 내방(來訪)하여 상의(相議)했으며 효종(孝宗)이 산림(山林)을 하사(下賜)하였다.

최규석(崔圭錫) 호(號)는 가곡(嘉谷).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門人). 학문이 저세(著世)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문인(門人) 이 수 백인이 되고, 1890년(고종 27)에영상(領相) 김병시(金炳始)가 임금께 아뢰어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최광한(崔廣漢) 자(字)는 영수, 호(號)는 추헌(推軒). 188 7년(고종 24) 음보(蔭補)로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 참판(戶曹參判) 겸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역임하였다.

최헌영(崔憲永) 자(字)는 성문(聖文), 호(號)는 인재(忍齋). 조선 때 학행(學行)과 예문(禮文)으로 저명(著名)하였고 후진교양(後進敎養)에 전심하였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최동봉(崔東鳳) 호(號)는 담운(潭雲). 조선에서 학행(學行)과 예문(禮 文)으로 저명(著名)하였고 후진교양(後進敎養)에 전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