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나주최씨시조(羅州崔氏),최정원(崔井元),최택(崔澤),나주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4 14:54 수정일 : 2019-02-15 14:3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나주최씨(羅州崔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첫째 계통은 탐진 최씨(耽津崔氏) 계파(系派)의 중조(中祖)로 조선(朝鮮) 세종(世宗)때 진의부의(進義副尉)에 올랐던 최정원(崔井元)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청양파(靑陽派)이며,

다른 한 계통은 조선 명종(明宗)때 진사(進士)였던 최택(崔澤)을 시조로 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최논금(崔論金)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보령파(保寧派)이다.

그러나 「탐진최씨세보(耽進崔氏世譜)」에 의하면 최정원(崔井元)은 탐진 최씨 강진파(康津派)의 중조인 최준량(崔浚良) 계(系)에 합보(合譜)된 것으로 나타나있고,「나주최씨세보(羅州崔氏世譜)」에는 고양파(高陽派) 정원(井元)의 손자 금남공(錦南公) 부(溥)가 나주(羅州) 출신으로 성종(成宗)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교리(校理)에 올라「동국통감(東國通鑑)」과「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의 편찬에 참여했고, 왕명(王命)으로「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므로 후손들이 충남 보령(忠南保寧)과 청양(靑陽)등지에 세거(世居)하면서 금남공(錦南公) 부(溥) 출신지인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나주(羅州)는 전라남도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 발라군(發羅軍)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금산군(錦山君)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때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995년(성종 14) 해양도(海陽道)에 속하다가 1018년(현종 9) 목(牧)으로 승격하였고, 조선 세조(世祖)때 진(鎭)를 두었으며 인조(仁祖) 때 강등하여 금성현(錦城縣)이 되었다. 후에 주(州)로 승격하고 1733년(영조 9) 다시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1737년(영조 13) 복구(復舊), 1894년(고종 31)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했으나 1895년(고종 32) 나주부가 폐지되어 전라남도의 한 군(郡)으로 강등되었다. 1931년 나주면(羅州面)이 읍(邑)으로 승격, 1981년 나주읍(羅州邑)과 영산포읍(榮山浦邑)이 합쳐서 금성시로 승격하였다가 1987년에 나주시로 개칭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로는 인조(仁祖)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던 용운(龍雲)과 효종조(孝宗朝)에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정순(廷洵)이 유명했으며, 숙종(肅宗)때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던 여익(汝翼)은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오른 종(淙)의 손자 세전(世田 : 숙종 때 공조 참의를 지냄), 영조(英祖)때의 군자감정(軍資監正) 태직(泰稙),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의현(毅鉉)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고, 고종(高宗) 때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사권(事權)은 호조 참판 정달(正達)과 더불어 나주 최씨의 전통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최씨(羅州崔氏)는 전국에 3,6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나주최씨조상인물 

최부(崔 簿)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자(字)는 연연(淵淵), 호(號)는 금남(錦南),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2년(성종 1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교서관 저작(校書館著作)․박사(博士)등을 거쳐 수찬(修撰)을 역임하고, 1486년(성종 17)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선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교리(校理)로「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87년 제주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돌아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 연안에 표착(漂着)하여 반년만에 귀국하였다.

그 후 왕명(王命)으로「표해록(標海錄)」을 저술(著述)하여 중국 연안의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풍속․민요 등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수차(水車)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와서 충청도 지방의 한발(旱魃)때 이를 사용케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92년 지평(持平)․사간(司諫)등을 역임하였고 1497년(연산군 3)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무오사화 때김종직의 문인들로 붕당(朋黨)을 조직하여 국정을 비방하였다는 죄로 단천(端川)에 유배(流配)되어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후에 신원(伸寃)되어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 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최번(崔 蕃) 자(字)는 덕장(德壯), 호(號)는 석정(石亭).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天鎰)의 막하(幕下)에서 창의(倡義)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분사(憤死)하였다. 그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최두남(崔斗南) 자(字)는 명우(明禹), 호(號)는 눌와(訥窩).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최논금(崔論金)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최용운(崔龍雲) 자(字)는 경수(慶秀), 호(號)는 운남(雲南). 조선 인조조(仁祖朝)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최정순(崔廷洵) 자(字)는 혼일(渾一), 호(號)는 죽당(竹堂). 조선 효종조(孝宗朝)에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여익(崔汝翼) 자(字)는 여구(汝求).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종(崔 淙) 자(字)는 덕중(德中). 1664년(현종 5)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최정달(崔廷達) 자(字)는 명은(明殷).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였다.

최세초(崔世初) 자(字)는 원보(元甫).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한성부윤을 지냈다.

최세전(崔世田) 호(號)는 매산(梅山).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용직(崔龍稙) 자(字)는 만대(萬垈).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사헌부 도사(司憲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최태직(崔泰稙) 자(字)는 경초(京初).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최의현(崔毅鉉)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최태기(崔泰箕)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정학(崔正學) 조선 고종조(高宗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관선(崔寬先) 조선(朝鮮) 고종조(高宗朝)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사권(崔事權) 조선 고종조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최정달(崔正達) 조선 고종조에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영우(崔永佑) 조선 고종조(高宗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