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김제조씨시조(金堤趙氏),조연벽(趙連璧)

작성일 : 2017-05-15 15:29 수정일 : 2018-02-18 19:35

김제조씨의 연원과 유래(金堤趙氏의 淵源과 由來)

김제조씨시조(金堤趙氏 始祖)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조연벽(趙連璧)이다. 조연벽은 서기 1231년(고려 고종 18년) 몽고(蒙古)의 장수 살리타이(摋禮塔)가 침략했을 때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부장(副將) 김윤후(金允候)와 함께 처인성(處仁城, 현(現) 경기도 용인)에서 몽고군을 소탕한 공(功)으로 상장군에 올라 벽성군(碧城君)에 봉군(封君)되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로 인하여 후손(後孫)들은 조연벽을 시조로 모시고 본관(本貫)을 김제(金堤)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연벽(趙連璧)의 선계(先系)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기자(箕子)가 중국(中國)에서 열두사람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그 중에 조식(趙寔)이 있었는데 그가 원조(遠祖)라는 설과, 그 후손 조세위(趙世胃)가 중국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오계(五季)의 난(亂)을 피해 동래(東來)함으로써 김제조씨의 원조(遠祖)가 되었다는 설, 그리고 중국 송(宋)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의 후예(後裔)라는 설 등이 있으나 고증(考證)된 바는 없다.

김제(金堤)는 전라북도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는 벽골군(碧骨郡), 벽성군(碧城郡)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태종(太宗) 3년에 이르러 만경군(萬頃郡)과 금구군(金溝郡)을 병합(倂合)하여 김제군(金堤郡)으로 고쳤고, 현재는 김제시(金堤市)로 승격되었다.

시조(始祖) 조연벽(趙連璧)은 김제 용두동(金堤 龍頭洞, 지금의 김제시 옥산동)에서 태어났으며 무예(武藝)가 뛰어나 장수의 재목(材木)으로 꼽혔다고 한다.

그가 젊은시절 어느 날 밤 꿈에 벽골제(碧骨堤) 수호신인 백룡(白龍)의 부탁을 받고, 벽골제를 빼앗으러 온 흑룡(黑龍)을 활로 쏘아 쫓아 주는 은덕을 베풀었는데, 이 때 흑룡의 몸에서 떨어진 용비늘 1개를 조정(朝廷)에 진상하였는데 왕이 이를 방석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이에 크게 이름을 떨치고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연벽(趙連璧)의 도움으로 벽골제를 지키게 된 백룡은 그날 밤 꿈에 다시 나타나 “장군의 공(功)으로 영원히 벽골제에서 삶을 누리게 되었으니 그 보답으로 자손들을 대대로 융성케 하겠노라”고 사은의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김제조씨의 행적(金堤趙氏의 行蹟)

시조 조연벽(趙連璧)은 조 기(趙 岐), 조 서(趙 瑞), 조 간(趙 簡)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벽골제 백룡의 다짐대로 모두가 현달(顯達)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맏아들 기(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장이 되었고 잇단 몽고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대호군(大護軍)에까지 올랐으며, 둘째 서(瑞)는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에 뽑혀 밀직부사(密直副使), 좌승지(左承旨)에 오르고, 셋째 간(簡)은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천재의 재질을 보여 초시(初試), 중시(重試), 친시(親試) 등 모두 장원(壯元)하여 첨의사인(僉議舍人), 경상도 안렴사(安廉使), 간의대부(諫議大夫),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 평리(評理), 찬성(贊成), 문하시중(門下侍中) 및 우의정(右議政)등을 역임하였고,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도입·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시호(諡號)는 문량(文良)이며 효행정려(孝行旌閭)를 제수받고 용암서원(龍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영회(趙令晦)는 봉상대부(奉常大夫), 군부총랑(軍簿摠郞),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등을 역임했다. 4世 조통원(趙通元)은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5世 조수량(趙遂良)은 조선 초기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임금자리에서 내쫓긴 단종(端宗)을 강원도 영월까지 따라가 모시다가 단종이 죽게 되자 함께 목숨을 바친 시종신(侍從臣)으로서 금군별장(禁軍別將), 감사(監司),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나, 세조(世祖)로부터 멸문(滅門)을 당하여 후사(後嗣)가 없다. 조우량(趙友良)은 흥해군수(興海郡守)로 성(城)을 쌓고 왜구(倭寇)를 격퇴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조희보(趙希甫)는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조 의(趙 義)는 정산현감(定山縣監), 권농단연판관(勸農團練判官),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공훈(功勳)으로 천안(天安) 개천동(開天洞) 예장(禮葬) 되었다.

조숭지(趙崇智)는 여산군수(礪山郡守)를 역임하였고 중종조(中宗朝)에 공훈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평고군(平皐君)에 훈봉(勳封)되었다.

조원륜(趙元倫)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마천군(馬川君)에 봉(封)해졌다.

처사(處士) 조윤침은 한성(漢城) 서윤(庶尹)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잇단 사화·당쟁 풍토에 환멸을 느껴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임천강학(林泉講學)으로 후진지도에 일생을 바쳐 그 이름을 원근에 떨쳤고 용암서원(龍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역임한 조시준(趙時俊)은 이괄(李适)의 난(亂) 때 공신(功臣)으로 풍성군(豊城君)에 봉해졌다.

조억령(趙億齡)은 임진왜란 때 충신(忠臣)으로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활약했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왜병(倭兵)이 장수(長水)의 육십령재에 진을 치자 노비와 군졸을 이끌고 많은 왜적을 소탕하였으나 왜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육십령재에는 조장군파적지장(趙將軍破賊之場)이란 비(碑)가 있다. 판관(判官) 조사립(趙斯立)은 임진왜란 때 웅치전(熊峙戰)후 전후 상황을 정리하여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 상계(上啓)하였고, 그 아우인 조성립(趙成立)은 진사(進士)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였으며, 후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다.

조영립(趙英立)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정권관(淤汀權管), 아이진만호(阿耳鎭萬戶)로 여진(女眞) 토벌전 때 심하(沁河)에서 전사(戰死)하였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받고 충신(忠臣)으로 기록되었다.

벽사찰방(碧紗察訪), 정사공(靖社功), 우봉현령(牛峰縣令), 황주진병마절제도위(黃州鎭兵馬節制都尉), 안기현감(安岐縣監) 등을 역임한 조종길(趙宗吉)과 진무원종훈록일등(振武原從勳錄一等), 어정병마권관(淤汀兵馬權管) 조종한(趙宗翰)은 충신(忠臣) 조영립(趙英立)의 아들이다.

인조(仁祖) 조(朝)에 6주(州)목사(牧使), 5도병사(5道兵使), 3도통제사(3道統制使), 포도대장(捕盜大將), 훈련도정(訓練都正) 등 72관(官)을 역임한 조필달(趙必達)은 무략(武略)이 출중한데다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목민관(牧民官)으로 뽑혔으며, 임금이 만고청백우성장 조필달(萬古淸白右城將 趙必達)이라는 10자 휘호를 내렸다.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효종이 돌아가신 뒤 이완대장은 숙종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조필달을 천거하기도 했다. 조필달이 쓰던 호남육군사명기(湖南陸軍司命旗)와 군복 1벌, 교지(敎旨) 10점, 전통(箭筒) 등이 전라북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순조(純祖) 때 조용환(趙龍煥)은 해마다 가을이면 나라에 바치는 곡식을 먼 거리까지 등짐으로 날라야 하는 김제(金堤) 등 여섯 고을 주민들의 고통을 진정하기 위하여 서울까지 올라갔으나 온갖 곤욕을 당하면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고 신문고(申聞鼓)를 울려 임금에게 진정서를 전하였다. 그 후 김제의 동진강 어귀에 새로 해창(海倉)이 신설돼 배로 간편하게 곡물을 바칠 수 있게 되니 인근 주민들이 이를 기려 공덕비를 세웠다.

한말(韓末)의 조동우(趙東宇)는 절충장군(折衝將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 등을 역임하고 농공도감(農工都監), 어기조사위원(漁基調査委員)을 지냈는데, 어느날 화적(火賊)떼가 습격 그의 목에 칼을 대고 위협을 하였으나 당황하거나 겁을 먹은 기색없이 큰 소리로 도둑을 꾸짖었다.

너무도 당당하고 준엄한 그의 호령에 도둑들이 오히려 기가죽어 두목이 그 앞에 큰절을 올리고는 “대감처럼 태연자약한 장부를 뵙기는 처음이다”며 오백냥만 주시면 순수히 물러가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는 이를 쾌히 승낙하고 영리한 하인을 시켜 5백냥을 산채까지 갔다 주되 가는 길과 산채의 위치를 알아오도록 하여 전라감영과 협조하여 화적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이에 인근 고을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웠다.

충신(忠臣) 조영립(趙永立), 효자(孝子) 조용창(趙用昌), 조항진(趙亢晋)의 정려(旌閭)와 충효열(忠孝烈)의 조기형(趙基亨), 조득양(趙得陽), 조기현(趙記鉉), 조득정(趙得正), 조창현(趙昶鉉)의 정려(旌閭) 삼강문(三綱門)이 있으며,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조창윤(趙昌胤), 호조참의(戶曹參議) 조덕술(趙德述)은 목민관(牧民官)으로 활약하였고, 효자 조길권(趙吉權)과 조항섭(趙亢燮) 등이 충효(忠孝)의 가풍을 세웠다.

호 벽하(號 碧下) 조주승(趙周昇)은 철종 때 인물로서 서예(書藝)와 문장(文章), 묵화(墨畵)로 뛰어난 당대의 명필이며 유작(遺作)으로 금강산 유점사의 현판, 속리산 법주사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의 현판이 대표적이며, 대원군(大院君)이 공(公)을 창난벽죽(滄蘭碧竹)이라 칭찬하였다.

호 심농(號 心農) 조기석(趙沂錫)은 벽하 조주승의 아들이며 해서(楷書), 행서(行書), 사군자(四君子)에 뛰어난 고종 때의 명필가로 공은 창씨개명 및 단발을 하지 않았으며, 일인(日人)의 오만방자함을 보지 않으려 외출을 하지 않았다. 많은 문헌에 기록되고 유작 또한 많으나 가까운 전주시 덕진구 취향정(醉香亭) 현판이 현존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제조씨는 남한에 19,5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