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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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08 16:26 수정일 : 2018-09-05 12:08

흥덕장씨시조

흥덕흥성장씨(興德․興城張氏)의 시조(始祖) 장유(張 儒)는 상질현(尙質縣) 사람으로 도시조 장정필(張貞弼 : 문헌공)의 9세손이다. 신라 말에 난(亂)을 피하여 오월국(吳越國: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에 들어가 중국어(中國語)를 배우고 돌아와, 고려(高麗) 광종(光宗)이 여러번 객성(客省)의 관원에 임명하여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접대하게 하였다.

그 후 벼슬이 광평 시랑(廣評侍郞)에 이르렀고, 그의 6세기손 기(機)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흥산(興山 : 흥성의 별호)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흥성(興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흥덕(興德)은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에서는 상칠현(上漆縣)이라 하다가 신라의 3국 통일 후 경덕왕 때 상질현(尙質縣)으로 고쳐 고부군(高阜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때 장덕현(章德縣:昌德)으로 고쳐서감무(監務)를 두고 고창을 겸해 다스리게 하였다가 충선왕이 즉위한 뒤 흥덕현으로 고쳤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고창과 갈라서 현감(縣監)을 두고, 1895년(고종 32)에 흥덕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 고창군에 합쳐 그 일부지방은 흥덕면으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유(儒)의 아들 연우(延祐)가 고려 현종(顯宗) 때 거란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한 왕을 호종(扈從) 하여 중추원사(中樞院事)가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후손 인신(隣臣)이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문관 전적(弘文館典籍)에 올랐으며, 응량(應梁)의 아들 우(佑)가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역임했고, 후손 현휘(賢輝)는 부호군(副護軍)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왕(旺)과 무관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석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인 구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덕․흥성장씨(興德․興城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14,023가구, 44,7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흥덕장씨조상인물

장연우(張延祐) ?~1015(현종 6) 유(儒)의 아들. 1011년(현종 2) 거란(거蘭)의 침입 때 남쪽으로 피란한 왕을 호종(扈從)하여 중추원사(中樞院事)가 되고 이어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에 올랐다.

1014년 일직원(日直員) 황보유의(皇甫兪義)와 함께 왕에게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관리의 부족한 녹봉으로 충당케 했다가 무신들의 항의로 한때 유배되었다. 이듬해 호부 상서(戶部尙書)가 되어 죽었다.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장영(張 英) 진헌사(進獻使)로 중국에 들어가 중국 황제(皇帝)에게 많은 상(賞)을 받고 귀국하여 관직(官職)이 3품(品)에 이르렀다.

장헌(張 軒)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장합(張 合) 호(號)는 초곡(楚谷).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선공감역(繕工監役) 등을 지냈다. 태종(太宗)의 총애를 받아 함께 자주 술을 마셨다.

하루는 소주(燒酒)를 과음하여 궁궐에서 죽으니 왕이 측은히 여겨 예장(禮葬)을 명령하여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장윤신(張允愼) 호(號)는 반구정(伴구亭).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장경원(張敬原) 호(號)는 망월대(望月臺). 조선(朝鮮) 세조(世祖)의 왕위(王位) 찬탈에 분개한 김시습(金時習) 등 생육신(生六臣)과 뜻을 같이 하였다. 만호(萬戶)를 지낼 때 육신(六臣)이 모조리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조석(朝夕)으로 망월대(望月臺)를 찾아 국궁배례(鞠躬拜禮)하고 평생토록 통탄 속에 지내다 끝내 자취를 감추고 살았다.

장인신(張隣臣)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장계숙(張季叔)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장응량(張應梁) 조선(朝鮮) 때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역임하였다.

장응선(張應旋) 조선조(朝鮮朝)에 정자(正字)를 지냈다.

장건(張 健) 호(號)는 아계(阿溪). 조선(朝鮮) 때 상서원정(尙瑞院正)을 지냈다.

장급(張 伋) 자(字)는 율계(栗溪). 조선(朝鮮) 때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을 지냈다.

장사명(張士明)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장학(張 㶅) 조선(朝鮮)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장우(張 佑) 자(字)는 경현(景賢). 조선 대 군수(郡守)를 지냈다.

장이길(張以吉) 자(字)는 천응(天應).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장경세(張經世) 1547(명종 2)~1615(광해군 7) 자(字)는 겸선(兼善), 호(號)는 사촌(沙村), 군수(郡守) 건(健)의 아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96년 저작(著作)을 거쳐 1605년 금구 현령(金溝縣令)에 재직중 실정(失政)의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 황(李 滉)의「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모방하여 충국 애국의 성심을 읊은「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12곡을 지었다. 남원(南原)의 주암서원(舟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장현휘(張賢輝) 호(號)는 심요헌(甚要軒).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장형례(張亨澧) 조선(朝鮮)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장의순(張義淳) 조선(朝鮮)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하였다.

장조평(張肇平) 호(號)는 돈암(豚庵). 조선(朝鮮) 때 충순위(忠順衛)에 이르렀다.

장세휘(張世輝) 호(號)는 정의당(貞義堂). 조선(朝鮮) 때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장환(張 喚) 호(號)는 용계(龍溪). 1612년(광해군 4) 진사(進士)가 되고, 이인거(李仁居)의 난에 공(功)을 세워 소무공신(昭武功臣) 2등에 책록(策錄)되었고, 장성현감(長城縣監)을 지냈다. 호조 판서(戶曹判 書)에 추증되었다.

장왕(張 旺) 조선(朝鮮) 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내고 늦게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오위장(五衛將)․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그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장열(壯 熱) 호(號)는 학교(鶴橋). 조선(朝鮮)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하였다.

장석(張 氵奭 ) 1687(숙종 13)~1764(영조 40) 자(字)는 호이(浩而), 호(號)는 낙와(樂窩). 우익(宇翼)의 아들. 고모부인 통제사(統制使) 이석관(李碩寬)에게서 궁술(弓術)과 마술(馬術)을 배우고, 1714년(숙종 40) 무과에 급제, 1717년 선전관이 되었다.

이어 벌등진 만호(伐登鎭萬戶)․가리진 수군첨절제사(加理鎭水軍僉節制使)를 거쳐 훈련도감 파총(訓練都監把摠)으로서 1728년(영조 4)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궁성을 경비하였다.

1730년 송내성(宋來成)의 무고로 문화현(文化縣)에 유배, 1732년 풀려 나와 1736년 함흥부원군(咸興府院君) 어유귀(魚有龜)가 훈련도감에 있으면서 초관(哨官)으로 추천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56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칠순(七旬) 경축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1763년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기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진되었다.

장득보(張得寶) 조선(朝鮮)시대에 승봉랑(承奉郞)에 이르렀다.

장윤승(張允升)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장업(張 忄業) 호(號)는 효촌(曉村). 조선에서 진사(進士)를 지냈다.

장사식(張師栻) 호(號)는 무지와(無知窩).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역임하였다.

장현경(張顯慶) 자(字)는 백회(伯會), 호(號)는 추담(秋潭). 1752년(영조28)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현감(縣監)을 역임하였고 상존호경과(上尊號慶科)에 등제(登第)하였다.

왕(王)이 백죽(白粥)에 꿩적을 하사(下賜)하였고 어필(御筆)로 사언 팔구(四言八句)를 내려 주었으며 상신(相臣) 김상복(金相楅)이 장첩(粧帖), 군수(郡守) 민종렬(閔鍾烈)이 어서각(御書閣)을 세워 주었다.

장희성(張希聖) 자(字)는 면부(勉夫).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장용한(張用漢) 자(字)는 천여(天與). 조선 때 저작(著作)을 지냈다.

장우구(張宇龜) 자(字)는 원징(元徵).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