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동장씨(安東張氏),안동장씨시조,장정필(張貞弼),안동장씨유래

작성일 : 2017-05-08 12:04 수정일 : 2018-02-04 10:54

안동장씨(安東張氏) 연원(淵源)-안동장씨유래

안동장씨시조(始祖)의 처음 이름은 길(吉), 자(字)는 영보(寧父), 호(號)는 포음(圃蔭)이고,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다. 후일 장정필(張貞弼)로 개명하였다.

신라 하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직함을 띠고 해상권을 장악하며 활약한 장보고(張保皐) 장군(將軍)의 현손(玄孫)이다. 836년 발생한 신라의 왕위계승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후일의 신무왕) 계열의 세력들이 청해진에 도피하며 재기를 모색하는 가운데 838년 재차 왕위를 둘러싼 정변이 일어나자 장보고 장군은 군대를 경주로 출병하여 그들을 강력히 지원함으로써 신무왕(神武王)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에 왕은 감사의 뜻으로 장보고 장군을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임명하는 한편 장군의 딸을 자부(子婦)로 받아들일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신무왕이 갑자기 서거(逝去)하고 문성왕(文聖王)이 등극한 후 842년 3월 왕은 전왕(前王)의 약조에 따라 장보고 장군의 딸을 제2왕비로 맞아들이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귀족들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만한 청해진의 세력이 중앙정계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강력히 반대한 결과 무산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의 반목과 대립의 골이 깊어 가던 중 조정에서 청해진으로 파견한 염장(閻長)에 의해 장보고 장군이 암살됨으로써 납비(納妃) 문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본래 염장은 신라 하대의 무장(武將)으로 장보고 장군의 진영에 거짓 투항하여 신임을 받은 이후 자신을 위해 준비한 주연석상(酒宴席上)에서 장군을 살해하고 돌아갔다.

그 결과 청해진이 붕괴되어 장군의 가족과 막료(幕僚)들은 원래 장보고 장군의 활동무대이던 당나라의 적산촌(赤山村)으로 돌아갔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으로 강제 이주되고 말았다.

장군의 증손(曾孫)인 원(源)은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당의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아들 길(吉)을 얻었다.

그런데 이때 당의 정국은 격변기로 크게 혼란하여 민심(民心)이 매우 흉흉(洶洶)하였다. 그래서 안주(安住)할 곳을 물색하던 원(源) 공은 증조(曾祖)께서 살던 신라로 다시 이주(移住) 할 것을 결심하여 다섯 살의 길(吉)을 등에 업고 오랜 항해 끝에 명주(溟洲: 지금의 강원도 강릉)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시조를 당나라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신라 또한 국가 체제가 몰락하면서 각 지역별로 호족(豪族) 세력이 할거하는 이른바 후삼국이 분열하는 상황에 돌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향 속에서 원(源) 공은 일단 내륙(內陸)으로 들어와 중원경(中原京: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후일 길(吉)은 성장하여 입당수학(入唐修學)의 꿈을 키웠는데 마침 당(唐)으로 가는 사신(使臣)을 따라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입당(入唐)하였다.

그곳에서 스승을 만나 학문에 전력하다가 마침내 24세에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하였다. 그렇지만 길(吉) 공은 관직에는 별다른 뜻을 두지 않았으며 곧 입산(入山)해 성인과 현인의 도리를 배우면서 강론(講論)하였는데, 그 현명함이 황제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리하여 황제가 예(禮)를 갖추어 공을 초빙하고자 하였지만 극구 이를 사양하다가 끝내 신하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출사해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임명되었다. 출사 후 공(公)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중원 전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떨칠 수 있었다.

특히 공(公)은 성균관을 창건해서 전란으로 황폐해진 학교(學校)를 건립하고 의례(儀禮)․의관(衣冠)․문물(文物)․혼상(婚喪)을 주(周)나라 초기의 제도대로 복원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공을 가리켜 당대의 부자(夫子)라고 크게 칭송하였다.

그러나 재상에 재직하던 중 시기하던 자들의 무고(無辜)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서 당나라를 떠나 부모님이 계시던 충주지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신라는 외형상 국가로서의 모습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으며 궁예가 제거되고 왕건이 고려의 국왕으로 등극한 후 2년 여 정도 되는 시점이었다.

공(公)은 충주로 돌아온 얼마 후 고창(高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방면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일부 고문(古文)에서는 노전(蘆田)에서 은둔해 살았다 (卜居蘆田)라고 하여, 노전(蘆田)을 현재 구미(龜尾) 지역의 인동(仁同)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그 이유와 관련하여, 우선 927년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태워버렸다(天成二年秋九月 萱功取近品城 燒之, 삼국사기 권 50, 열전10, 견훤)라는 자료와 공산(公山: 지금의 팔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을 이기고 대목군(大木郡: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을 점령하였다(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 萱乘取大木郡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라는 자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927년 12월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국서에 의하면,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의 견훤군이 주둔하고 있는 진지(陣地)에서 손을 묶였다고 한 사실(고려사 권1, 세가, 태조 10년 12월)을 고려하면 고창 전투가 개시되기 3년 전 이미 인동(仁同)지역은 물론 상주․공산․대목군․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까지 이어지는 서쪽지역 전체가 견훤의 점령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고려와 후백제간의 전선은 예천․풍산․고창(안동) 등 경북 북부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노전’(蘆田)은 인동(仁同)의 옛 지명이 아니라 갈대가 많이 있던 강변(江邊) 곧 갈대밭을 일컫는 일반명사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더욱이 공(公)께서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착한 지역이 고창지역 일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930년 태조와 견훤 간에 전개된 고창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했을 때 당시 고창군의 주민이었던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 원래는 金幸이었음)․장길(張吉)이 적극적으로 태조를 지원한 사실이 확인되는 점에서도 방증(傍證)된다(고려사 권57, 지리지2, 안동부조). 즉 고창전투 이전 장길 공은 고창성주(古昌城主) 김선평․영장(營將) 김행과 우의를 돈독히 구축하는 한편 다가올 전란의 소용돌이에 대비하여 성군(城軍)을 강병으로 단련하고 창의병(倡義兵)을 모집․양성하다가 고창전투에서 군사적으로 열세에 직면한 태조를 도와 승리를 한데 따른 공로로 인하여 태조로부터 고창군 성주 김선평을 대광(大匡), 권행․장길을 대상(大相)에 임명하는 인사조치 및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려사절요 권1 태조 13년 정월).

그리고 태조는 삼공(三公)에게 안동(安東)으로 사관(賜貫)하고 이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보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해 12월에는 신흥사(新興寺)를 중수(重修)하고 공신당(功臣堂)을 설치하여 동․서벽(東西壁)에 통합삼한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 1등에 최응(崔凝),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2등에 유금필(庾黔弼),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유차달(柳車達), 이도(李棹), 함규(咸規), 김선궁(金宣弓), 홍규(洪規), 왕희순(王希順), 김훤술(金萱述), 윤신달(尹莘達), 박윤웅(朴允雄)을 그려 붙였다. 3등은 왕식겸(王式兼), 진평(秦評), 견권(堅權), 박희술(朴希述), 능식(能寔), 권신(權愼), 염상(廉相), 김락(金樂), 연주(連珠), 마난(麻煖)이며, 4등은 김홍술(金洪述), 박수경(朴守卿)이다.

이로써 보면 안동장씨의 시조 장길(張吉, 貞弼) 공은 고창군에 들어와 거주한 이후 후삼국 쟁패기(爭覇期)라는 전란의 와중에서 맞이한 고창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까닭에 대상(大相)에 임명되었고 후일 통합삼한익찬공신이등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二等功臣)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그 후 장(張)․김(金)․권(權) 삼공(三公) 모두는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으로 태사(太師)에 올랐고 특히 장길(張吉) 공은 정필(貞弼)로 개명 한 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되어 고려의 정무(政務) 최고기관인 삼성(三省)에서 정치적 사안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안동으로 낙향(落鄕)하여 많은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감수자: 송인주, 대구교육대학교 교수, 한국사 전공)


본관지 연혁

안동은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인데, 경덕왕 때 고창군으로 고쳤다.

고려조 태조가 안동으로 고쳐 부를 삼았으며, 성종은 고주자이로, 현종은 안무사로 하였는데, 뒤에 다시 안동부로 고쳤다.

명종 때 도호부로, 신종 때 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충렬왕 때 복주목으로 고쳤으나, 공민왕 때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만들었다.

조선조 세조 때 진을 두고 부사가 병마절도부사를 겸임하게 하였으나, 곧 부사는 폐지하였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이 되었고, 1914년 예안군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장․권․강․고․금․동․노․이․림․문․박․전․조․최씨 등이 있었다.


주요 세거지와 변천

1세 장정필이 경북 안동군에 터를 잡은 후 4세 장광현이 금천(지금의 시흥군)으로, 6세 장보성이 다시 경기도 광주군으로 이거 하였음이 ‘임술보’에 보인다.

6세 장보성 이후 13세 장수명까지는 대체로 서울과 경기도 광주․과천․장단․양주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14세 화령백 우정승 장려는 고려말에 신돈의 정사를 간하다가 의주목사로 전보되어 밀직사사이던 장남 장사길을 중심으로 대거 의주 이주하였다.

그후 장사길의 아들로 부사를 지낸 장철은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였던 관계로 한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6세 화성군 장양공 장철은 동지중추원부사로 있을 때 태조가 죽으니, 자칭하여 영흥부사로 부임․정착하여 많은 후손들이 함경도 지방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평안도와 함경도에 큰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20세 장의가 다시 경북 안동군에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1930년에 안동장씨는 경기도 양주군, 강원도 횡성군, 충남 천원군․홍성군, 평남 성천군, 평북 의주군․용천군․선천군․정주군․구성군․령변군․초산군․창성군․삭주군, 함남 영흥군․정평군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오늘날에는 경기도 의정부시․양주군․파주군․금포군․옹진군․화성군, 강원도 횡성군, 충북 음성군․진천군․제천시, 충남 천원군․홍성군․예산군․청양군․부여군, 경북 안동시․안동군․예천군․금릉군․선산군․영풍군․영양군, 경남 창령군․의창군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장씨는 남한에 총 39,939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