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순천장씨시조(順天張氏),장천로(張天老),순천장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8 11:44 수정일 : 2019-07-23 15:44

시 조

순천장씨시조(順天張氏 始祖) 장천로(張天老)는「장씨상계세보(張氏上系世譜)」의 기록에 의하며 장씨(張氏)의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의 10세손인 연우(延佑)의 둘째 아들이라 한다. 천로는 고려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고 순천군(順天君)에 피봉되어 후손들은그를 시조(始祖)로 모시고 관향(貫鄕)을 순천(順天)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순천(順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함평군(欿平郡)이었으나 신라(新羅) 때 승평(昇平)으로 고쳤으며, 996년(고려 성종15)에 승주(昇州)로 하였다가 정종(靖宗) 때 승평군(昇平郡)이 되고, 1309년(충선왕 1) 승주목(昇州牧)으로 승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인물(人物)로는 천로의 증손인 균절(均節)이 개성윤(開城尹)을 지냈으며 균절의 아들 송저(松貯)는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그의 아들 홍(弘)이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그 외에 사검(思儉)이 문과에 급제한 후 사재소감(司宰少監)을 거쳐 중추원(中樞院) 녹사(綠事)에 이르렀으며, 헌(憲)은 중추원(中樞院) 녹사(綠事)를 지냈고, 조선 태종 때 승지(承旨)․이조(吏曹) 판서(判書)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고려조(高麗朝)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한편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낸 일신(日新)은 훈련원(訓練院) 참군(參軍)을 역임한 윤의(允義)의 아들로 무예(武藝)가 뛰어나고 청빈하기로 이름났으며, 학자(學者) 건(健)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보(文輔)는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풍기(豊基) 군수(郡守)를 거치고 진주(晉州) 목사(牧師)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효자(孝子)로 이름난 문서(文瑞)는 류성룡(柳成龍)의 천거(薦擧)로 찰방(察訪)에 발탁되어, 효자 정려(孝子旌閭)와 복호〔復戶 : 충신과 효자, 절부(節婦)가 태어난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던 일〕의 은전(恩典)이 내려졌다.

그 밖의 인물로는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을 지낸 덕순(德純)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대곤(大崑)이 유명하였고,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한 시규(是奎)와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계헌(桂憲)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한상(漢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세형(世衡)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장씨(順天張氏)는 전국에 13,31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 - 순천장씨조상인물

장중광(張仲光) : 고려(高麗) 때 판육부시사(判六府寺事)를 역임하였다.

장세열(張世悅) : 고려(高麗) 때 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

장균절(張均節) : 고려에서 개성(開城) 윤(尹)을 지냈다.

장송저(張松貯) : 고려(高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장홍(張 弘) : 고려(高麗)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장상지(張相之) : 고려조(高麗朝)에 판육부시사(判六府寺事)를 지냈다.

장보지(張輔之) : 호(號)는 달산(達山),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순성좌리공신(純城佐理功臣)에 책록되었고,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政局)을 바로 잡으려고 수 차례 주청(奏請) 하였으나 권세가(權勢家)의 희롱으로 묵살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야수(野獸)가 성(城)안으로 들어오고 까마귀 떼가 궁중(宮中)으로 모여들며 샘이 마르고 물고기가 싸우는 것을 보고, 국가(國家)에 변란(變亂)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도읍(都邑)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도당(都堂)의 압력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니 벼슬에서 물러나 순천(順天)으로 낙향하였다. 조선 개국(朝鮮開國) 후 태조(太祖)는 수 차례 벼슬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며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해 건달산(建達山)에 들어가 은거생활을 하니 그의 충절에 감탄하여 지금도 그 터를 장판서(張判書) 은신처(隱身處)라고 한다. 비안(比安)의 백천서원(白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장사언(張思彦) : 고려(高麗) 때 판서운관사 (判書雲觀事)를 지냈다.

장사로(張思老) : 고려 때 개성(開城) 소윤(少尹)을 역임하였다.

장사검(張思儉) : 호(號)는 이은(二隱),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고려(高麗) 말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재시(司宰寺) 소감(少監)을 거쳐 중추원(中樞院) 녹사(綠事)에 이르니 고려(高麗)가 망할 것을 예측하고 통탄하며 가사(歌詞) 1장(章)을 짓고 은둔하여 시서(詩書)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장비(張 斐) : 고려(高麗)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장은(張 隱) : 고려(高麗)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장헌(張 憲) : 호(號)는 삼은재(三隱齋). 고려(高麗) 말에 중추원(中樞院) 녹사(錄事)에 이르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開國)하자 고려의 멸망을 개탄하고 낙향하였다. 조선 태종 (太宗) 때 승지(承旨)․이조(吏曹) 판서(判書)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거듭 불사(不仕)하고 다시는 벼슬에 나오지 않고 고려조(高麗朝)에 절개(節愾)를 지켰다.

장맹손(張孟孫) : 고려(高麗) 때 호군(護軍)을 지냈다.

장종손(張宗孫) : 고려(高麗)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장윤인(張允仁) : 조선(朝鮮)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장윤의(張允義) : 조선 때 훈련원(訓練院) 참군(參軍)을 지냈다.

장윤례(張允禮) : 조선(朝鮮)에서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장혼(張 渾) :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장맹원(張孟元) : 조선조(朝鮮朝)에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를 지냈다.

장일신(張日新) : 1471년(성종 2) 무과에 급제한 후 부산(釜山) 첨사(僉使)․진주(晋州)․경주(慶州) 판관(判官) 등을 거쳐 기장(機張) 현감(縣監)을 지냈다.

장일취(張日就) : 조선 때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장옥동(張玉童) : 조선(朝鮮) 때 현신교위(顯信校尉)에 이르렀다.

장량(張 良) :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장건(張 健) :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노계(老溪 ). 1488년(성종1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개탄하여 대과(大科)를 단념하고 노계정사(老溪精舍)를 세워 성리학(性理學)연구에 전념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장숙(張 俶) : 자(字)는 선중(善中). 조선(朝鮮) 때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을 지냈다.

장세온(張世溫) : 조선(朝鮮)에서 우후(虞侯)를 지냈다.

장복겸(張福謙) : 조선 때 적순부위(迪順副尉)에 이르렀다.

장문서(張文瑞) : 자(字)는 응휴(應休), 호(號)는 문암(文巖). 조선(朝鮮)때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인의(引儀)․남부(南部) 참봉(參奉)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보안도(保安道) 찰방(察訪)에 발탁되었고 효자(孝子) 정려(旌閭)가 명(命)해졌으며 복호(復戶)의 은전(恩典)이 내려졌다.

장문보(張文輔) : 자(字)는 백훈(伯勳).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慶尙道) 도사(都事)로 나아가 진휼구황(賑恤救荒)에 힘써 민심(民心)을 안정시켰다. 그뒤에 풍기(豊基)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후 진주(晉州) 목사(牧師)가 되어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다.

장문익(張文翼) : 조선(朝鮮) 때 중추원(中樞院) 녹사(錄事)를 지냈다.

장두(張 斗) : 조선 때 수의부위(修義副尉)에 올랐다.

장흡(張 翕) : 조선(朝鮮)에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장운(張 運) : 자(字)는 여중(汝中), 호(號)는 신재(愼齋). 효성이 지극하여 1564년(명종 19) 효행으로 천거되어 첨정(僉正)을 지냈다.

장윤갑(張胤甲) :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장원(張 遠) :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장희설(張希說) : 자(字)는 자후(子厚). 조선(朝鮮) 때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지냈다.

장덕형(張德亨) : 자(字)는 성통(性通). 조선(朝鮮) 때 상주(尙州) 목사(牧使)를 지냈다.

장덕림(張德霖) : 자(字)는 시습(時習). 조선(朝鮮)에서 이조(吏曹)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장덕순(張德純) : 자(字)는 경부(敬夫). 조선 때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충효(忠孝)가 극진하여 아침과 저녁에 가묘(家廟)의 배알(拜謁)을 거르지 않았고 국상(國喪)을 당할 때마다 매양 부모(父母)님의 상(喪)과 같이 집상(執喪)하였다.

장덕겸(張德謙) :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장지걸(張之傑) : 조선에서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냈다.

장대곤(張大崑) : 조선 때 첨지중추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장지한(張之漢) : 조선조(朝鮮朝)에 평구도(平邱道) 찰방(察訪)을 지냈다.

장내유(張乃維) :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장핵(張 翮) : 자(字)는 운거(雲擧).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장시흥(張始興) : 자(字)는 무백(武伯), 호(護)는 괴헌(槐軒). 조선(朝鮮)때 첨지(僉知)를 역임하였다.

장두성(張斗星) : 자(字)는 자앙(子仰), 호(號)는 의재(義齋). 조선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장모식(張慕栻) : 자(字)는 효원(孝元). 조선에서 성현도(省峴道) 찰방(察訪)을 지냈다.

장세강(張世綱) :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문과에 등과(登科)한 후 아산(牙山) 현감(縣監) 등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장시규(張是奎) : 1627(인조 5)~?. 자(字)는 여상(汝常), 익(翊)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여러 지방관(地方官)을 거쳐 경기도(京畿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겸 삼도(三道)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1702년(숙종 28)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경무(張景武) : 조선 때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장계헌(張桂憲) : 자(字)는 옥삼(玉三). 조선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장한상(張漢相) : 1694년(숙종 20)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서 탐학(貪虐)한 행위로 파직, 이어 삼척(三陟) 부사(府使)로 기용되었다. 1712년(숙종 38) 함경도(咸鏡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서 왕명을 따라 백두산(白頭山) 남쪽지대의 지형을 그려 바쳤으며, 이어 국경을 넘어가 남벌(濫伐)하고 행패부리는 자들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직 당했다. 뒤에 복직하여 1716년 경기도(京畿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어 영변(寧邊) 부사(府使), 1723년(경종 3) 다시 함경도(咸鏡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거쳐 황해도(黃海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장세기(張世紀) : 자(字)는 시보(時輔). 조선(朝鮮) 때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장세규(張世奎) : 자(字)는 권빈(權彬), 호(號)는 화은(華隱). 조선(朝鮮)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장중필(張重弼) : 조선 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장세형(張世衡) : 자(字)는 임중(任中). 조선(朝鮮)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장윤덕(張潤德) :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장인환(張仁煥) : 1877(고종 14)~1930. 평양 출신. 어려서 기독교인이 되고, 1905년(광무 9) 하와이 이민(移民)으로 마우이에 갔다가 이듬해 미국에 가서 철도 노무자, 알래스카 어장(漁場) 노무자로 근무하는 한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회원이 되었다. 1908년(융희 2) 한국 정부의 외부(外部) 고문인 스티븐슨이 휴가 차 귀국하여 기자 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그를 죽일 것을 결심, 스티븐즈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가 오클랜드 역에서 하차하는 기회를 이용, 저격(狙擊)하려 했으나 한국인 청년 전명운(田明雲)이 먼저 쇠뭉치로 구타(毆打)하고 격투를 벌이는 것을 보고 권총으로 스티븐슨을 쏘아 중상을 입히어 2일 후에 죽게 했다. 재판(裁判) 결과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애국심과 예의 있는 품행으로 10년만에 출옥(出獄)했다. 1927년 조만식(曺晩植) 등의 환영을 받으면서 귀국, 51세에 윤치복(尹致福)과 결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세탁업(洗濯業)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병고(病苦)로 자살했다. 1962년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