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옥구임씨 시조(沃溝林氏),임개(林槩),옥구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7 13:39 수정일 : 2018-07-30 15:3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옥구임씨(沃溝林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때 청렴결백한 관리(官吏)로 이름이 높았던 문경공(文敬公) 임개(林 槩)이다.

개(槩)는 고려 문종(文宗) 때 내시(內侍)로서 창고 관리를 정직하게 하였고, 1085년(선종 2) 공부 상서(工部尙書)로서 이자인(李資仁)과 함께 송(宋) 나라에 가서 송제(宋帝)의 등극을 축하하고 돌아와 1087년(선종 4)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서북로 병마사(西北路兵馬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형부 상서(刑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냈고,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형부사(判刑部事)로 치사(致仕)했으며, 임개의 후손들은 임개를 시조로 옥구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옥구(沃溝)는 전라북도 북서부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마서량현(馬西良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옥구(沃溝)로 고쳐서 임피(臨陂)에 속하게 하였고 1356년(공민왕 5) 금강의 조운(漕運) 기지로서 진포(鎭浦 : 현재의 군산)가 되었다. 조선시대 초에 군산열도에 있던 진영(鎭營)을 옮겨오고, 용안현의 득성창(得成倉)이 나누어져 군산창(群山倉)이 되면서 옥구현(沃溝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옥구의 아들 유문(有文)은 참지정사(參知政事)․판형부사(判刑部事)를 지냈고, 인종(仁宗) 때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손자(孫子) 완(完)은 1114년(예종 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고, 인종(仁宗)이 수창궁(壽昌宮) 옆에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자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고문이 되어 국자사업(國子司業)․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으며 뒤어 익산백(益山伯)에 봉해졌다.


인 구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전국에 6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옥구임씨조상인물

임개(林 槩) ?~1107(예종 2) 시호(諡號)는 원경(元敬). 문종 때 내시(內侍)로서 창고를 정직하게 관리했고, 1085년(선종 2) 공부 상서(工部尙書)로서 이자인(李資仁)과 함께 송나라에 가서 송제(宋 帝)의 등극을 축하. 1087년 어사대부(御使大夫)로서 서북로 병마사(西北路兵馬使), 109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로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이어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1094년(헌종 즉위) 참지정사(參知政事), 이듬해 수사공(守司空)․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판호부사(判戶副使)에 이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형부사(判刑副使)가 된 후 치사(致仕)했다. 청렴 정직했다.

임유문(林有文) 1056(문종 10)~1125(인종 3) 평장사(平章事) 개(槩)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1097년(숙종 2) 정조사(正祖使)로 요(遼)나라에 다녀오고, 1111년(예종 6) 소부감(小府監)으로 사신이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1114년 어사대부(御使大夫)․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겸 어서검토관(御書檢討官), 1117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판비서성사(判秘書聖事), 1120년 우복야(右僕射)․지문 하성사(知門下省事)를 역임, 1122년(예종 17) 수사공(守司空)․참지정사(參知政事)․판형부사(判刑府使)가 되었다.

이해 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1123년(인종 1)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검교태보(檢校太保)․수태위(守太尉)․판상서호 부사(判尙書戶副使)․상주국(上主國), 이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어 치사(致仕)했다.

임경한(林景翰) 자(字)는 군간(君幹), 호(號)는 향천(香泉), 천수(天壽)의 7대손. 개성(開城) 출신. 집에 보관되었던 소 식(蘇 軾)의 글씨를 보고 그 필법(筆法)에 감탄, 전답(田畓)을 팔아 필묵(筆墨)을 사서 50여 년간 서예에 전심하여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의 대가(大家)가 되었으며, 그 명성이 중국에 까지 알려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