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순창임씨시조(淳昌林氏),임중연(林仲流)

작성일 : 2017-05-06 21:35 수정일 : 2018-04-18 21:14

순창임씨의 연원

순창관(淳昌貫)의 관조(貫祖)는 우리나라 임씨 (林氏) 도시조(都始祖)인 층절공(忠節公) 휘(諱) 팔급(八及)의 19세손이고 고려 현종시에 금자광록대부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金紫光祿大夫壁上三韓二重大匡太師)에 이르신 부안군(扶安君) 휘(諱) 계미(季美)의 십일세손(十一世孫)이며 고려 대문호이시며 봉익대부삼사사(奉翊大夫三司使) 상장군(上將軍)에 추증(追贈)되신 절의공(節義公) 휘 (諱) 춘(才春)의 육세손(六世孫)인 휘 (諱) 중연(仲流)으로 찬성사(贊成事)로서 정동성사를 섭행한 고려공신이다.

그 연원(淵源)는 중연(仲流)의 아드님인 휘(諱) 선미(先味)은 자(字)는 양대 (養大) 호(號)는 휴암(休菴) 또는 두문제(杜門齋)이시며 시호(論號)는 문정공(文正公)인데 고려말(高麗末) 낭관(郞官-正五品)을 역임하고 태학생(太學生)이 되었는데 1392년 고려가 망하게 되자 오정문 밖 두문동 산골짜기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 로 항절불굴(抗節不屈)하고 분사순절하였다.

이때에 세 아들이 있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져 장자인 효자공(孝子公) 휘 (諱) 용배 (用培)는 순창에서 은거하였는데 그의 아드님인 남부교수공(南部敎授公) 휘 (諱) 치지(致之)가 화순(和順)에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었으며 용달(用達)은 개성(開城)에, 용계(用桂)는 홍성 (洪城)에 각각 은거하여 세거지를 이루었다. 고려가 망한지 338년후인 영조6년과 영조16년에 고려왕조에 충성한 두문동 의리를 드러낸 충신의 유적지라 표창하니 화순(和順)에 종인(宗人) 송계공(松溪公) 휘(諱) 시준의 증손인 윤(潤)이 1746년에 향리의 각종인이 보유한 사첩(私帖)을 수집 정리하여 초첩(草帖) 을 만들어 서해를 통해 개성 (開城)을 방문(訪問) 참봉공(參奉公) 서추(瑞樞)를 만나 같은 선조에 자손임을 확인 하고 족보를 편찬코자 하였으나 불의에 타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후 46년간에 걸쳐 화순종인 필록(弼祿)이 개성을 왕래하면서 족보(族譜)발간을 추진한 결과 1789년 기유년에 개성에서 덕유(德有)와 경(璟) 두종인 이 개성종인의 초첩(草帖)을 지니고 화순에 찾아와 화순종인 경일(景日)과 더불어 임중연(林仲流)을 일세조로 순창임씨세보(淳昌林氏世譜)를 발간하게 되었다. 따라서 순창관(淳昌貫)이 정립되었다.

그 후 홍성종인과 합보하여 110년간은 초보(草譜)와 같이 순창임씨 (淳昌林氏)로 지속되였는데 1901년 신축보(辛丑譜) 수보시 순창종인과 합보하면서 평택임씨세보(平澤林氏世譜)로 개칭하고 일세조(一世祖)를 충절공(忠節公) 휘 (諱) 팔급(八及)의 육세손인 득우공(得雨公)으로 족보를 발간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지속되고 있으나 구보(舊譜)에 선계(先系)가 잘못된 점이 발견되어 다음 수보(修譜) 시 우리나라 임씨의 대표적 분관 중조(中祖)인 평찰품사(評察品事) 충선공(忠宣公) 휘(諱) 몽주공(夢周公)을 일세조로 수보하기로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