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선산임씨시조(善山林氏) ,임양저(林良貯),선산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6 21:01 수정일 : 2018-08-20 14:56

선산임씨 연원 (善山林氏 淵源)

(1) 임씨(林氏) 득성설(得姓說) : 중국 은(殷)나라 왕손인 태정전자(황제의 32세손)의 아들 비간(比干)공의 부인 전씨가 목야 장림산(長林山) 석실(石室)에서 아들 천(泉)을 낳았다 하여 성(姓)을 임(林)씨로, 이름을 견(堅)으로 정해 주어 그때부터 임씨성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임견(林堅)공이 임(林)씨의 일세(一世)가 되었다(중국 성씨편).

손 임온(林蘊 : 9목연파의 제 6방) 공의 고손자인 임팔급(林八及)공은 당(唐)나라에서 한림학사로 시작하여 병무상서로 있었는데 당시 칠학사(七學士)와 같이 신라(新羅)로 와 도시조(都始祖)가 되었다. (문집: “일제치하 (日帝治下) 전국 임씨는 한 뿌리다“라는 대동합보(大 同合譜)시 상계저작(上系著作)편,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譜鑑), 2002년 4월 25일)

(2) 선산임씨(善山林氏) 시조 : “임씨출 일선(선산) 중랑장 양저기 시조야”(林氏出一善(善山)中郞將 良貯其始祖也) [石川集(1496년생 林億齡), 규장각(奎章閣)소장].

선산임씨는 양저(良貯)를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임만(林蔓)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조선임씨 1회보, 평택 1764년, 선산 1766년, 족보편집 260년전; 선산임씨 3회보 1855년 : 시조 양저(良貯) → 무(珷)→우(佑)→ ........)

그후 1916년 병진보(丙辰譜: 5회)에서는 일제치하 동족결합의 일환으로 씨족의 대운동이 일어나 “조선 임씨는 한 뿌리다”라는 운동으로 합보과정에서 중국의 주요인물인 임팔급공을 도시조로 모시고, 양저공을 시조로 하여 [팔급(八及)→양저(良貯)→무(碔 = 珷 )→희(禧)→면(冕)→득우(得雨)→몽주(夢周)→희윤(喜胤)→연(璉)→정(禎)→언수(彦修)→팔미(八味)중 七男 = 의미(毅味)→]등의 11대를 세계를 가저작한 대동보를 받들어 왔다.

그러나 1995년 선산임씨 을해보(乙亥譜, 8회) 때는 많은 논의 끝에 양저(良貯) 이하 의미(毅味)까지 왜곡(歪曲)된 11세계(世系)를 제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선산임씨종친회에서는 상계조사위원회(上系調査委員會)를 구성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와 경북선산에서 펴낸 「일선지(一善誌)」, 「조선왕조실록」과 각종 문헌 및 북조선 선산임씨 족보, 남한 선산임씨복보, 전국의 각 임씨족보를 규장각에서 원본과 확인하면서 고찰하고, 경북선산의 선산김씨 선산을 답사하여 “선산야성(善山野城)”을 구성하였던 부락의 위치와 지형을 확인하고, 도시화에 따른 들성(坪城) 비석 등을 고증하였다.

그 결과 [양저(良貯)→→....→→임무(林珷) 묘지(墓地)를 발견하고, 2001년 5월 29일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국 임씨중앙회회장과 각 관향의 종친회장을 초청한 설명회 자리에서 양저의 묘가 “평택 용주방”이 아니라 “선산야성”에 존재함을 밝혔다.

따라서 선산임씨의 상계보는 우선 [ 팔급(八及 = 都始祖)→양저(良貯 = 始祖)→영화(永和)→자허(自栩)→견미(堅味)→박(樸)→가(稼)→]로 하고, 만(蔓)을 일세(一世)로 하여 세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비록 관향은 다르게 쓰고 있지만 한국의 후손들은 “뿌리는 한 조상이다”라는 이념에서 서로 돕고 참되게 살고 있다.

1519년 조광조의 문하생인 임천령(林千齡 : 1492~1567)은 1501년(연산군 6년) 진사(進士)가 되고, 1506년(중종원년) 홍문관 부재학(弘文館 副齊學) 및 지성균과사(知成均館事)이 되었으나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함북단천(端川)으로 유배되었으며(문헌 : 북한 선산임씨 세보), 동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1511년(중종 5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1525년(중종19년)에 문과에 급제한 반면 그의 동생인 임백령(林百齡 : 1498~1546)은 1525년에 진사가 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기성사류와 신진사류 간에 4차례에 걸친 반목과 대립 및 정권다툼으로 사림파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나 학문적으로는 주리파(主理派)인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주기파(主氣派)인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나누어져나 지도층의 분열로 이어지기도 하였다(남도영, 1968, 정통 국사 신설, 성문각).

따라서 선산임씨는 조선초기의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사림파(士林派)에 속하여 조선초기의 혼란기에도 가문(家門)의 명성을 떨친 대표적인 선산임씨는 석천(石川) 임억령공과 괴마(槐馬) 임백령이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선산임씨는 전국에 13,726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歷代人物)-선산임씨조상인물

도시조 임팔급(林八及)  임팔급 공은 당나라에서 한림학사, 병부상서로 있었는데 난을 피해 당시 칠학사와 함께 신라말 신라로 들어와 도시조가 되었다. (일체치하전훙 대동보, 2002년도 임씨상계보감)

시조 임양저(林良貯)  임씨(林氏) 출선산(出 善山 = 一善) 신라중랑장(新羅中郞將) 양저(良貯) 기시조야(其始祖也). 사성(賜姓). 묘(墓)는 선산야성(在善山野城)에 있다. 신라말 경순왕자(敬順王子) 정현의 사위로 신라 때 재상을 지냈으며, 충직하고, 절개가 높아서 경순왕이 고려조에 항복하려 하자 직간하다가 선산으로 유배되었다.

임영화(林永和)  선주인(善州人)으로 선산토성(善山土姓) (고려사(高麗史)와 일선지(一善誌)에 기록에 따르면 선산토성출신으로 임영화(林永和), 임자허(林自栩), 임견미(林堅味), 임박(林樸), 임가(林稼)가 기록되어 있어 전후의 보첩을 견주어 추감한다)

임자허(林自栩)  선산토성, 거남면(居南面) 평성사(坪城仕), 고려관(高麗官) 지판도판서(至版圖判書) (문헌 : 一善誌)

임견미(林堅味)  선산남면(善山南面), 평성인(坪城人), 우거(寓居) 송경. 고려조 공민왕(1352 - 1374)때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고, 우왕(1375 -1388)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나 신지파의 최영과 이성계에게 1388년에 주살되었다.

임박(林 樸)  견미지자(堅味之子)로 청백자지(淸白自持)하야 불처권세(不處權勢)하고, 대사성(大司成)하다.

임가(林 稼)  박의 아들자(樸之子) (문헌 : 고려사)

임만(林 蔓)  일세조(一世祖) 휘(諱) : 판서(判書)

임득무(林得茂)  조선조 세종때 황해감사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임천령(林千齡)  1492년(성종 23년)~1567년(선조 원년) : 장남으로 동생 만령(萬齡)과 함께 연산조때 진사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한원당 한서(寒愃서) 김안필(金安弼)과 홍문관 사간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생으로 수학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년: 1519)때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시 조광조와 연좌되었다는 죄목으로 함북 단천(端川)으로 유배갔다. (문헌 : 북한선산임씨족보에는 묘가 함경북도 단천부 과도면 연측리로 기록됨)

임만령(林萬齡)  1494년(연산군 1년)~?. 옥야로 유배된 후 무소식으로 사망일자로 모르고 있었으나 옥야임씨 임선주씨의 할아버지(13923년 1월 8일생)의 말씀은 “ 단천을 오가가면서 형을 만났다. 우리는 옥야임씨가 아니라 선산임씨이로서 해남읍 구교리 임씨 선산벌 하에서 사대(4代)를 살아오면서 뿌리깊은 선산임씨의 대단한 기풍에 보니 선산임씨가 자랑스럽다”라고 말하면서 1998년 만령(萬齡)조가 옥야임씨 삼세(三世)조임을 발견하고, 203년 3월에는 옥야 임광세 종친회장과 선산 임권신 종친간에 “옥야임씨 만령조이하 상계를 선산임씨 계보에이기하여 임선주씨를 그의 후손으로 승계하겠다”고 합의하기도 하였다.

임억령(林億齡)  1496년(연산군 2년)~1568년(선조 1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석천(石川)이며, 이름은 대수(大樹)로서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고 1525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45년(명종 즉위) 금산군수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小尹)인 동생 백령(百齡)이 대윤(大尹)의 선배들을 내몰자 자책을 느껴 벼슬을 사직하고 해남에 은거했다. 1552년 동부승지에 등용되어 병조참지를 지내고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석천집(石川集)」이 있다.

임백령(林百齡)  1498년(연산군 4년)~1546년(명종 2년) 조선 중기 문신으로 형 억령(億齡)과 함께 눌재 박상(朴祥)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 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상서원직장·사헌부지평·승정원도승지 등을 거쳐 대사헌·판서에 이르렀다. 45년(인종 1) 윤원형(尹元衡) 등과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시켰는데 이 공로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다. 이듬해(명종 1)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던 중 병사하였다. 문장에 뛰어났다. 70년(선조 3) 을사간당으로 지목되어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임구령(林九齡)  1501년(연산군 7년)~1562년(명종 17년) 조선조에 광주목사(光州牧使)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내고, 은퇴하여 영암 구림(鳩林)으로 귀향하여 진남제(鎭南堤)라는 제방을 가는 간척공사를 하였다.

임현령(林玄齡) 1508. 자 春樹. 중종때 春承文院博士, 冬校書館 判校

임홍령(林洪齡) 1513. 자 景瑗. 중종때 文校書館 校理

임능(林 能) 1513. 자 光連. 武科 行德源府使

임개(林 漑) 1525. 자 光輝, 호 齊隱. 인종때 內禁衛將,

임광형(林光亨) 1544. 선조때 武科部將

임발(林 潑) 1556. 자 光明. 武重試行德源府使

임극충(林克忠) 1565. 자 直卿. 行宣務郞, 贈吏曹參判

임극진(林克震) 1568. 자 允道, 호 雲亭. 선조때 奎章閣 檢校, 弘文館副校

임현(林 晛) 1569. 자 子昇. 선조때 文科합격, 玉堂藝文弘文 校理, 康津縣監, 丞議院 禮曹左郞

임몽용(林夢龍) 1578. 자 汝見. 광해군때 訓練院主薄 行通政大夫 兵馬僉 節制使

임기룡(林起龍) 1582. 자 仁天, 호 節巖. 광해군때 將仕과郞, 贈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영암에서 강진으로 移居

임경선(林景善) 1587. 禮賓寺主簿 軍資判官

임영수(林永壽) 1590. 자 萬年. 광해군때 武科 합격, 特拜 嘉善同知 中樞府事

임성익(林聖翊) 1594. 자 翊之. 광해군때 進士, 인조때 武科장원, 贈吏曹參判 겸 弘文館副提學, 世子師, 綾州牧師,

임필(林 泌) 1600. 자 子靑. 文吏曹佐郞,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임진영(林振榮) 1601. 자 茂叔. 壽職通政大夫 吏曹參議

임석후(林碩厚) 1605. 선조때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임희(林 曦) 1605. 자 天盈. 襲資通政大夫

임유해(林有獬) 1606. 자 威瑞. 효종때 武科합격, 振威將軍 行訓練院主簿 又 行城津鎭兵馬僉節制使

임극성(林克誠) 1612. 武科統制使

임휘(林 暉) 1612. 壽職襲資 通政大夫 承文院判校

임득의(林得義) 1613. 자 君實. 壽職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임홍일(林弘一) 1623. 자 重甫. 인조때 武科 宣傳秘書郞

임중표(林中豹) 1626. 자 子文. 인조때 武科壯元 元襲訓練院副正

임대일(林大一) 1634. 자 貫之. 襲資通政大夫

임중기(林中기) 1636. 자 子相. 인조때 禦烸將軍行龍驤衛副司果, 顯陵參奉

임세휘(林世輝) 1637. 자 時晦 : 僉知中樞府事

임취유(林就有) 1646. 通政大夫 尙衣院正

임우백(林友栢) 1663. 자 士祐. 通政大夫 折衡將軍副護軍

임신백(林信伯) 1670. 자 君弼. 折衡將軍 行龍驤衛副護軍

임석장(林碩樟) 1694. 자 章叔, 호 南菴. 영조때 壽職 嘉善大夫 龍驤衛副護軍, 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

임수광(林洙光) 1695. 자 士文. 숙종 때 展力副尉 겸 司僕, 宣略將軍 行龍驤衛 副司果, 振威將軍行訓練院判官

임도휘(林道輝) 1698. 자 卿彬 : 壽職通政大夫 僉 中樞

임성근(林成根) 1712. 자 晦之 :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임계복(林桂馥) 1716. 자 秀而 : 영조때 通政大夫 折衡將軍 行龍驤衛副護軍

임봉양(林鳳陽) 1722. 자 聖壽 : 行折衡將軍 龍驤衛 副護軍

임재광(林再光) 1722. 자 春卿 : 司憲府監察 行金泉察訪

임지환(林之桓) 1741. 자 汝經 : 襲資通政大夫 吏曹參議 겸 同知 中樞府事

임봉선(林奉善) 1749. 자 奉秋/君敬 : 壽 通政大夫 僉知 中樞府事

임광언(林曠堰) 1776. 자 起之 : 通政大夫 行龍驤衛副護軍

임방선(林邦善) 1789. 자 乃弼 : 壽嘉善大夫 戶曹參判 겸 同知 中樞府事

임유찬(林有燦) 1797. 자 化先 : 甕院直長

임진영(林震榮) 1805. 자 寅之 :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임원춘(林元春) 1805. 자 乃義 : 순조: 通政大夫 知中樞府事

임영원(林英沅) 1817. 자 得瑞 : 嘉善大夫 戶曹參判 겸 五衛 都摠府 副摠官

임영운(林英運) 1818. 자 榮郁 : 순조때 壽嘉善大夫 戶曹參判 겸 五衛都摠府부 副摠官

임민찬(林玟燦) 1820. 자 永瑞 : 通訓大夫 忠憲府監察

임상대(林尙大) 1820. 자 化允 : 孝誠篤至古人之大孝 故士論有文

임심근(林深根) 1824. 자 在燮 : 초등학교장

임상순(林相舜) 1826. 자 德仁 : 壽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겸 經莚 參贊官

임인국(林仁國) 1826. 자 乃弘 : 行通政大夫 司憲府 監察

임영상(林英祥) 1827. 자 壽通政大夫

임달춘(林達春) 1827. 자 元瑞, 호 : 南湖 : 通政大夫 戶曹參議

임중춘(林仲春) 1827. 자 仲璟 : 순조때 通仕郞行長陵參奉 行龍驤衛 副護軍 嘉善大夫 都摠府 副摠官

임사석(林士錫) 1827. 자 宅奎/士洪 : 嘉善大夫 工曹參議

임달춘(林達春) 1831. 자 雲弼 : 行司憲府監察

임도석(林道錫) 1839. 자 道淳 : 折衡將軍行龍驤衛副護軍 겸 僉知中樞府事

임영업(林英業) 1843. 자 源洪 : 壽嘉善大夫 兵曹參判

임주석(林周錫) 1846. 자 道鉉 ; 관휘 : 鶴周 : 고종때 登科 連除忠勳府都事 旌義大靜縣監 善大夫 同知 中樞府事

임봉석(林鳳錫) 1851. 자 文贊 : 武科司果

임영문(林英文) 1854. 자 靈白 : 行都正 嘉善大夫 吏曹參判 同知 中樞府事

임영기(林英淇) 1854. 자 成津 : 嘉善大夫 同知 中樞府事

임우석(林瑀錫) 1854. 자 炳奎/魯聸 ; 호 : 湖隱 : 行章陵參奉中樞院議官

임복찬(林福燦) 1855. 자 正春 :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임학석(林學錫) 1856. 자 芳學 : 司憲府監察

임인석(林麟錫) 1866. 자 文厚 ; 호: 松菴) : 通政大夫 承政院 同 副承旨

임태환(林泰煥) 1868. 자 致明 ; 호: 春吏) : 通政大夫 司憲府 監察

임영률(林英律) 1868. 자 桂紅 :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임태집(林泰執) 1871. 자 致賢 : 贈 通訓大夫 承政院 秘書丞

임성린(林聖麟) 1875. 자 希文 ; 호: 農圃 : 아세아전쟁과 한일합방시 장군으로 알려짐

임영안(林英安) 1878. 자 在午 : 行宮內府事 永陵參奉 通政大夫

임영한(林英漢) 1880. 자 靑坡 : 고종때 宮內府柱事, 中樞院議官 贊成公府院君

임덕근(林德根) 1884. 자 大洪; 호 : 松坡 : 孝行으로 성균관교지에 기록됨, 贈 通政大夫 承政院

임상겸(林相謙) 1889. 자 成春; 호 : 柳隱 : 3.1운동만세 참여투옥, 건국준비위원에 참여

임태도(林泰道) 1892. 자 道五/漢成 : 목사

임태종(林泰宗) 1893. 자 宗五/宗澤 : 한의사,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