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청해이씨시조(靑海李氏),이지란(李之蘭),청해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5 12:21 수정일 : 2018-08-10 11:51

시조의 본관의 유래

청해이씨(靑海李氏)의 시조(始祖)는 조선 객구에 공(功)을 세운 공신(功臣) 이지란(李之蘭)이다. 지란의 본 성명은 퉁두란(퉁豆蘭)으로서 아버지 아라부카(阿羅不花)는 여진(女眞)의 금패천호(金牌千戶)였다.

아버지에 이어 천호가 되었다가 원(元)나라 말기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많은 부하를 이끄로 귀하,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성계(李成桂) 휘하에 들어가 이씨(李氏) 성을 하사 받았으며, 이어 조선 개국공신 일등에 올라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져 그 후손들은 청해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청해(靑海)는 중국 북서부에 있는 지명으로 북서쪽은 신강(新疆), 북쪽과 동쪽은 감숙(甘肅), 남동쪽은 사천(四川), 남서쪽은 티벳을 접하고 있다. 험준한 대고원 지대로, 황하․양자강 등에 발원을 이룬다.

시조 지란(之蘭)의 아들 화영(和英)은 세종 초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이르렀고, 6대손 인기(麟奇)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밖에 인기(麟奇)의 아들 중로(重老),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핵(翮)의 아들 유민(裕民),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수민(壽民) 등이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해이씨(靑海李氏)는 남한(南韓)에 13,39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청해이씨조상인물

이화상(李和尙) 조선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였다.

이화영(李和英) ? ~ 1424(세종 6) 시호(號)는 무후(武厚), 개국공신 지란(之蘭)의 아들. 본래 여진(女眞) 사람으로 아버지와 함께 이성계(李成桂)에서 투항하여 18세 때 낭장(郎將)이 되고,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다. 1392년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으며, 1398년(태조 7) 보공 대장군(保功大將軍)을 거쳐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1400년(정종 2) 태종을 잘 호위한 공으로 토지를 받았다.

이듬해 예조 전서(禮曹典書)에 승진, 그 후 승추부 동지총제(承樞府同知摠制)․도총제(都摠制)․지의정 부사(知議政府事)․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등을 거쳐 1423년(세종 5)판좌군도총제(判左軍都摠制)가 되고,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이르렀다.

이화미(李和美) 조선(朝鮮) 때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이화수(李和秀) 조선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이효정(李孝貞) 조선조(朝鮮朝)에 봉조하(奉朝賀)에 오르고, 청해군(靑海軍)에 봉해졌다.

이효량(李孝良)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이효온(李孝溫) 조선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이효검(李孝儉) 조선 때 사재시 소윤(司宰寺少尹)을 지냈다.

이효양(李孝讓) 조선조에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역임하였다.

이돈(李 敦) 조선에서 도정(都正)을 지냈다.

이효공(李孝恭)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이희당(李希唐) 자(者)는 국순(國純), 시호(諡號)는 창열(彰熱).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정호(李挺豪) 조선조(朝鮮朝)에 정언(正言)을 지냈다.

이광도(李廣道)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인기(李麟奇) 1549(명종 4)~1631(인조 9) 자(字)는 인서(仁瑞), 호(號)는 송계거사(松溪居士), 개국공신(開國功臣) 지란(之蘭)의 6대손. 1589년(선조 22) 41세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도화서 별제(圖畵署別提)를 거쳐 경안도 찰방(慶安道察訪)․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형조 좌랑(刑曹佐郞) 보은(報恩)과 영덕(盈德)의 현감(縣監)을 지낸 뒤 광해군의 실정으로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가평 군수(加平郡守)가 되었으며, 이듬해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에 특진, 이어 군기시정에 올랐으며 아들 중로가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진하고, 1630년(인조 8)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했고, 초서(草書)를 잘 썼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청릉군(靑陵君)에 추봉되었다.

이중로(李重老) ?~1624(인조 2) 자(字)는 진지(鎭之), 시호(號)는 충장(忠壯), 개국공신(開國功臣) 지란(之蘭)의 후손. 16세로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이듬해 선전과(宣傳官)을 거쳐, 1621년(광해군 13) 이천 부사(伊川府使)가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청흥군(淸興君)에 봉해졌다.

이해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올라 훈련 도정(訓鍊都正)을 겸임, 이듬해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었다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경기․강원 양도 좌방어사(京畿․江原兩道左防禦使)가 되어, 예성강을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금천(金川)의 충민사(忠愍祠)에 향(祭享)되었다.

이성남(李聖男) 조선(朝鮮)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이르렀다.

이핵(李 翮)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이수민(李壽民) 자(字)는 일경(一卿), 시호(號)는 충정(忠貞), 개국공신(開國功臣) 지란(之蘭)의 후손. 1676년(숙종 2)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과(宣傳官)을 거쳐 고원 군수(高原郡守)․철산 부사(鐵山府使)를 역임하고, 1713년(숙종 39)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근(李 根) 조선 때 보덕(輔德)을 지냈다.

이유민(李裕民) 자(字)는 덕유(德裕), 시호(號)는 정민(貞敏).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부안 현감(扶安縣監)을 거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이어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그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도총관(都摠管)․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냈다.

이지식(李枝植)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재우(李在祐) 조선(朝鮮)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이우규(李羽逵)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이진석(李晋錫) 조선(朝鮮)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