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그에 닫는 태그가 없습니다. error :320 옥구이씨시조(沃溝李氏),이여(李驪),옥구이씨조상인물

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옥구이씨시조(沃溝李氏),이여(李驪),옥구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3 14:27 수정일 : 2018-07-19 15:0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옥구이씨(沃溝李氏)의 시조(始祖) 이여(李驪)는 옥구(沃溝)에 토착(土着) 세거(世居)해 온 사족(士族)으로 그 후손들은 옥구를 관향(貫鄕)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옥구(沃溝)는 전라북도 북서부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마서량현(馬西良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옥구로 고쳐서 임피군(臨陵郡)에 속하다가 1356년 (공민왕 5) 금강의 조운(漕運) 기지로서 진포(鎭捕: 현재의 군산)가 되었다. 조선 초에 군산열도에 있던 진영(鎭營)을 옮겨오고, 용안현의 득성창이 나누어져 군산창(郡山倉)이 되면서 옥구현(沃溝縣)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군으로 승격하였다.

시조의 후예(後裔)로 연산군(燕山君) 때 울산부사(蔚山府使)를 역임한 후 월성군 강동면 단구리(月城郡 江道面 丹邱里)에 이거(移居)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그 후 그의 맏아들 변룡(變龍)이 효행(孝行)으로 습독(習讀)에 천거되었고. 차남 희룡(希龍)은 신조(宣祖) 때 문과 (文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여 가세(家世)를 일으켰다.

특히 희룡(希龍)은 임진왜란 때 왕명(王命)을 받아 경주 (慶州)와 울주(蔚州) 사이의 적세(賊勢)를 살피려고 내려 가다가 충주(忠州) 달천(獺川)에서 적을 만나 분전 중 장렬하게 순절하였는데, 그의 아들 문진(文軫)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창의({昌義)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문진의 처 김씨(金氏)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반장(返葬)을 하려다 찾지 못하자 자결하여 이씨삼강(李氏三綱)으로 일컬어졌으며, 숙종(肅宗) 때 정려가 내려져 가문을 더욱 빚냈다.

그 외 습독 변룡(變龍)의 아들 문익(文翼)이 임진왜란 때 창의({昌義)하여 홍의장군(洪衣將軍)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충절(忠節)의 가맥(家脈)올 이었고. 희룡(希龍)의 둘째 아들 문참(文參)은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를 역임하여 예빈시(禮賓寺) 첨정(僉正)을 지낸 지온(之馧)과 함께 옥구 이씨(沃溝李氏)의 가통(家統)올 지켰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옥구이씨(沃溝李氏)는 진국에 1,0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옥구이씨조상인물

이변룡(李幾龍) : 자(字)는 견서(見瑞). 아버지의 상을 당해 아우 희룡(希龍)과 함께 묘소에 여막을 짓고 3년 시묘하였다. 이에 감동한 마을사람들이 그의 거실을 우애당(友愛堂), 시묘한 골짜기를 효막동(孝幕運)이라 하였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습독(習讀)에 제수(除授)되었다.

이희룡(李希龍):자(字)는 응서(鷹瑞). 1576년(선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금제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 (監察)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慶州)와 울주(蔚州) 사이의 적세를 엿보고자 내려가다 충주(忠州)의 달천(獺川)에서 적을 만나 분전하다 순절(殉節)했다. 1689년(숙종 15)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삼강려(二綱間)의 특전)이 내려 졌고, 삼강사(三綱祠)에 제향되었다.

이문익(李文翼):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곽재우(郭再佑) 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문성(李文里):조선조(朝鮮朝)에 훈도(訓導)를 지냈다.

이문진(李文珍):아버지 희룡(希龍)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싸움터로 가다가 신령 (新寧)에서 적을 만나 역전하다 전사하였다. 1689년(숙종 15) 아버지 희룡, 그의 부인 월성김씨(月城金氏)와 함께 삼강려(三綱間)의 특전이 내려졌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증직(贈職), 삼강사(三綱祠)에 제향되었다.

이문참(李文參) : 조선(朝鮮) 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이지온(李之編):조선조에 예빈시(禮濱寺) 첨정(余正)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