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여주이씨(驪州李氏),여주이씨시조,교위공파,문순공파,경주파,여주이씨유래,여주이씨조상인물,여흥이씨

작성일 : 2017-05-02 19:41 수정일 : 2018-07-27 15:12

여주이씨시조와 여주이씨유래(본관)

여주이씨(驪州李氏)는 고려시대 인용교위(仁勇校尉)를 지낸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하는 교위공파(校尉公派), 중윤(中尹) 이은백(李殷伯)를 시조로 하고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를 비조(鼻祖)로 하는 문순공파(文順公派),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중조(中祖)로 받드는 경주파(慶州派) 3파가 있다. 3파의 선조들은 다 같이 고려 중기에 경기도 여주(驪州) 고을에 자리 잡아 대대로 향직(鄕職)을 세습(世襲)하면서, 이 지역에 오랫동안 세거(世居)해온 호족(豪族)인데 그 관향은 대체로 여주또는 여흥(驪興여강(驪江)이라 하였다.

여주는 경기도 동남부에 위치하며 본래 골내근현(骨乃斤縣)이 그 최초의 지명이었다. 940(고려 太祖23)에 황려현(黃驪縣)이 된 후 1018(顯宗9)에 강원도 원주(原州)에 영속되었다가 1214(高宗1)에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1305(忠烈王31)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된 후 1401(조선 太宗1)에 음죽현(陰竹縣)의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驪興府)로 승격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태종 때 다시 도호부(都護府)가 되었고 1469(睿宗1)에 세종대왕의 능침인 영릉(英陵)을 지금의 능서면 왕대리(旺垈里)로 옮기면서 이웃 천녕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驪州牧)으로 높혀 목사(牧使)를 두었다. 1501(燕山君7)에는 여주목을 폐쇄하여 그 관할구역을 충주부(忠州府)로 이관했다가 1895(高宗32)에 충주부 소속의 여주군(驪州郡)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시 경기도 여주군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씨족사의 개요

고려 중엽에 여주를 관향으로 하여 가문을 창립한 3파의 여주이씨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일세의 문호(文豪) 이규보(李奎報)를 낸 것을 시작으로,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망천(忘川) 이고(李皐)나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과 같은 명현과 문장가가 배출되었다. 조선조에는 그 전기(前期)에 우리나라 성리학의 거봉(巨峰)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있고 후기(後期)에는 실학(實學)의 창시자격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있으며, 근대에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과 같은 인물이 뒤를 이어 겨레역사와 학술문화 발전에 큰 몫을 담당한 자랑스러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조선조 때의 문과(文科) 급제자는 모두 114인인데 그 중에서 2인의 정승(政丞)· 2인의 대제학(大提學)· 3인의 청백리(淸白吏)를 냈었고, 그 밖에도 호당(湖堂)에 든 사람이 3, 봉조하(奉朝賀)에 오른 사람이 1, 군호(君號)에 봉해진 사람도 6인이나 되었으며 왕실과의 통혼(通婚)으로 일대 벌열(閥閱)로서의 지위를 누리었다. 2015년에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여주이씨는 남한(南韓)84,3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교위공파는 시조 이인덕(李仁德)에서 2세 이원걸(李元傑)을 거쳐 3세 이효온(李孝溫)까지는 여주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으나, 4세 이교(李喬)에 이르러 중앙관인으로 진출함으로써 개성 북부 흥국리(興國里)에서 살았다. 그 아들 3형제 가운데 장자 이수산(李秀山)은 유배지인 평북 선천(宣川)에서 살았고 6세 이상(李詳)은 중화군(中和郡) 상원(祥原)으로 옮겼다. 13세 이호신(李好信)에 이르러선 다시 중화 풍동(楓洞)에 자리 잡은 후, 일부 자손은 수산(水山)에 이주했으며 정주(定州수안(遂安평양(平壤)과 전남 광양(光陽)에도 그 후손들이 세거(世居)하였다.

차자 이수해(李秀海)는 처음 개성 덕산리(德山里)와 오관리(五冠里)에 거주를 정했으나 조선조 개국과 함께 후손들이 한양(漢陽)으로 옮겨 세거하였다. 8세 망천(忘川) 이고(李皐)는 고려가 망하자 수원(水原) 팔달산(八達山)에 은거했으므로 그곳이 세거지가 되었는데, 그의 5세손인 이난(李鸞)은 함안의 여항(餘航)으로 이응(李鷹)은 전북 남원(南原)으로 각각 남하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11세 경헌공(敬憲公) 이계손(李繼孫)의 자손들도 한양에서 수원으로 낙향하여 살았으나, 조선조 중기 이후 16세 춘주공(春洲公) 이상홍(李尙弘)의 자손은 공주(公州홍주(洪州장호원(長湖院) 등지에서, 익헌공(翼憲公) 이상의(李尙毅)의 자손은 양주(楊州김포(金浦안산(安山덕산(德山부평(富平) 등지에서, 이상준(李尙準)의 자손은 충주(忠州포천(抱川홍성(洪城청양(靑陽)에서 각각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3자인 이수룡(李秀龍)은 개성 오관리(五冠里)로 분가하여 자손들이 수대를 눌러 살다가 8세 충주목사(忠州牧使) 이천백(李天白)에 이르러 평해(平海) 처가향으로 옮겨 살았고, 그 아들 9세 문절공(文節公) 이행(李行)은 고려가 망한 후 개경(開京)에서 한때 강음(江陰)과 평해(平海)를 번갈아가며 주거를 옮겼다. 문절공의 맏아들 직제학(直提學) 이척(李逖)은 조선조의 천도(遷都)에 따라 개경에서 한양의 남촌(南村)으로 이사를 하였고, 셋째아들인 여천군(驪川君) 이몽가(李蒙哥)는 평산(平山봉산(鳳山배천(白川) 등지에 자손들이 세거지를 이루었다. 이척(李逖)의 세 번째 증손인 13세 충순위(忠順衛) 이사필(李師弼)은 당시 형망제급(兄亡弟及)의 관습에 따라 자연적으로 종통(宗統)을 계승했는데, 연산군(燕山君) 때에 한양에서 멀리 처가향인 경상도 밀양(密陽)으로 낙향하였다.

이분이 곧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하는 밀양파(密陽派)의 입향조(入鄕祖)로서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군내 곳곳에서 자리를 잡아 각기 집성촌을 이루어 500년 가문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이척(李逖)의 아들 지돈령(知敦寧) 이자(李孜)의 차자인 12세 포천군수(抱川郡守) 이증약(李曾若)의 후손들은 홍성(洪城영광(靈光춘천(春川)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밀양파에서 갈려나간 14세 월연(月淵) 이태(李迨)의 차자 증참의(贈參議) 이원충(李元忠)은 대구 파동(巴洞)으로 옮겼고 다시 그 아들 증우윤(贈右尹) 이윤수(李潤壽)는 용궁(龍宮) 무이리(武夷里)에서 터전을 잡고 세거지를 이루었다.


역대 주요인물(여주이씨조상인물) -밀양파(密陽派)-

이교(李 喬) 1187-?. 처음 이름은 당주(唐柱)이다. 시조인 고려 인용교위(仁勇校尉) 이인덕(李仁德)의 증손이고 부호장(副戶長) 원걸(元傑)의 손자이며 호장군윤(戶長軍尹) 효온(孝溫)의 아들이다. 처음으로 중앙관인으로 진출하여 고려 고종(高宗) 때 중랑장(中郞將)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이르렀다.

이수룡(李秀龍): 1237-?. 중랑장(中郞將) ()의 셋째아들이다. 고려 명종(明宗) 때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역임했다.

이벽(李 璧): 1256-?.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숭정대부(崇政大夫)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이윤침(李允琛): 1299-?. 대제학(大提學) ()의 아들이다. 음직(蔭職)으로 검교중문사인(檢校中門舍人)의 직첩을 받았다.

이천백(李天白): 1320-?. 일명은 천백(天伯)이고 중문사인(中門舍人) 윤침(允琛)의 장자이다. 충목왕(忠穆王) 때 백문보(白文寶전록생(田祿生) 등과 함께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整治官)으로 활동했으며 벼슬이 충주목사(忠州牧使)에 이르렀다.

이행(李 行): 1352-1432. 자는 주도(周道)이고 호는 기우자(騎牛子) 또는 백암거사(白巖居士일가도인(一可道人)이라 했으며 목사(牧使) 천백(天白)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 말 혼란기에 국방· 외교· 산업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붙들기 위하여 이성계(李成桂)의 역성(易姓) 혁명세력과 마지막까지 대결함으로써 충절을 빛내었다. 특히 100년에 가까운 원()나라의 직할통치로 본토에서 이탈해 있던 탐라(耽羅: 지금의 濟州道)로 건너가 성주(星主) 고신걸(高信傑)을 설득하여 제주도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귀순(歸順)시킨 일이라든지, 공양왕(恭讓王) 때 문란한 인사행정의 시정을 위해 올린간첨설직소(諫添設職疏)및 토지개혁을 주장한전제소(田制疎)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을 때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조영규(趙英珪)만고의 흉인으로 몰았고 자신이 기초한고려사(高麗史)의 개찬(改撰)을 거부하여 사관(史官)으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일도 특기할 만하다. 야인(野人)으로 물러나 있을 때는양잠방(養蠶方)이란 책을 만들어 누에고치의 생산 등 산업진흥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고, 조선조에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번갈아가며 벼슬을 내렸으나 행공(行公)을 하지 않는 채, 평해(平海)와 강음(江陰)에서 소를 타고 시주(詩酒)로서 여생을 자정(自靖)하였다. 사후에 세종(世宗)은 제문(祭文)과 함께 문절(文節)이란 시호와 여산부원군(驪山府院君)의 봉호를 내려 추모하였다. 저서에기우자집(騎牛子集)1책이 있다.

이척(李 逖): 1370-1418. 자는 평로(平虜)이고 문절공(文節公) ()의 장자이며 서령군(瑞寧君) 유숙(柳淑)의 외손자이다. 공양왕 때 국자감시(國子監試) 장원(壯元)에 이어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조에서 첫 벼슬을 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조(新朝)에 벼슬을 하지 않으려했으나 너는 나와는 처지가 다르다는 부명(父命)을 좇아 출사하여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장주(莊周)의 소요자재(逍遙自在)와 천명사상(天命思想)에도 일가견을 가져 만년에는언토장자(諺吐莊子)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적(李 迹): 1375-1450. 자는 소부(素夫)이고 호는 부훤당(負暄堂) 또는 강역정(講易亭)이라 했으며 문절공(文節公) ()의 둘째아들이다. 조선조 건국 직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후에 벼슬이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특히 각도의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우리나라의 잠업진흥(蠶業振興)과 수리시설(水利施設) 등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몽가(李蒙哥): 1404-1487: 처음 이름을 원()이라 하였고 자를 계팽(季彭)이라 했으며 문절공(文節公) ()의 제3자이다. 경적(經籍)과 무예에 뛰어났으며 세조(世祖) 때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어 벼슬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고 봉조하(奉朝賀)의 은전(恩典)을 입었다. 사후에 여천군(驪川君)의 봉호와 호양(胡襄)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자(李 孜): 1409-1443. 자는 선보(善甫)이고 직제학(直提學) ()의 아들이다. 나이 16세에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장녀 재령군주(載寧郡主)에게 장가들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돈령부 주부(主簿)의 실직이 내려졌다. 이후 판관(判官호군(護軍공조참의(工曹參議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벼슬이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재령군주(載寧郡主): 1409-1444. 조선조 제3대 임금 태종(太宗)의 장손녀이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적장녀(嫡長女)로 태어났다. 1425년에 세종(世宗)의 특명으로 고려유신인 문절공(文節公) 이행(李行)의 손자인 지돈령(知敦寧) 이자(李孜)의 배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전의현주(全義縣主)로 봉해졌다가 나중에 재령군주로 승봉(陞封)이 되었다.

이증석(李曾碩): 1427-1490. 자는 직지(直之)이고 지돈령(知敦寧) ()의 맏아들이다. 세종 때 음직(蔭職)으로 관계로 진출한 후 사헌부 감찰(監察) 등 요직을 거쳐 세조(世祖) 때 곡성(谷城간성(杆城흥해(興海중화(中和) 등지의 군수(郡守)로서 많은 치적(治績)이 있었다.

이사준(李師準): 1454-1523. 자는 여정(汝正) 또는 군도(君度)이고 호는 침류당(枕流堂)이며, 중화군수 증석(曾碩)의 맏아들이다. 성종(成宗) 때 문음(門蔭)으로 참봉(參奉)에 특채된 후 경력(經歷) 등 여러 요직을 거쳤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보고 진양(晉陽)의 농장(農庄)으로 은퇴하였다. 만년에는 한강 서호(西湖) 가에 침류당(枕流堂)을 짓고 당대의 명사들과 어울려 창화(唱和)를 즐겼다, 만년에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崗주헌(酒軒) 김준손(金俊孫)과 삼로(三老)의 동갑계(同甲契)를 맺어 교분이 매우 두터웠는데, 정수강은 그의 시문과 필법(筆法)을 찬양한 글을 남겼다.

이사필(李師弼): 1460?- ?. 자는 여량(汝良)이고 중화군수 증석(曾碩)의 셋째아들이다. 성종(成宗) 때 유음자제(有蔭子弟)로 충순위(忠順衛)에 입속(入屬)하여 교위(校尉)의 관록을 받았다. 연산군의 난정을 보고 처가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그곳 사인당리(舍人堂里)에 터전을 잡아 여주이씨 밀양파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이원(李 遠): 1479-1525. 자는 고운(孤雲)이고 호는 알 수 없으며 충순위(忠順衛) 사필(師弼)의 큰 아들이다. 150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문과에 대비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혼정(昏政) 때문에 드디어 과업(科業)을 포기하였다. 만년에는 향리 사인당리(舍人堂里)에서 강학(講學)의 장소를 마련한 후 후진들을 가르치는 한편, 향중선비들과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고 향속(鄕俗)을 순화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밀양의 향선생(鄕先生) 24()의 한분으로 추앙되었다.

이태(李 迨): 1483-1536: 자는 중예(仲豫)이고 호는 월연(月淵) 또는 금서자(琴書子)라 했으며 충순위(忠順衛) 사필(師弼)의 아들이다. 중종(中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를 거쳐 한원(翰苑)의 검열(檢閱대교(待敎봉교(奉敎)를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시정일기(時政日記)를 기록하였다. 그는 사관(史官)으로 종사하는 동안 권력자의 회유와 협박이 있었으나, ‘사필(史筆)은 마땅히 임금의 득실(得失)과 신하의 선악(善惡)을 직필(直筆)하는 것이라하면서 굴하지 않았다. 후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에 협력하다가 김안로(金安老) 등 훈구세력의 배척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정진했다. 벼슬은 풍기군수(豊基郡守)·· 삼척부사(三陟府使) 등 지방관을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과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에 이르렀다. 학문이 출중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필법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에월연집(月淵集)1책이 있다.

이원량(李元亮): 1504-1567. 자는 영경(英卿)이고 호는 월영(月盈) 또는 월영옹(月映翁)이라 했으며, 월연(月淵) ()의 맏아들이다. 1536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을 했으나 그 해에 아버지의 병환으로 대과(大科)를 단념한 채 시골로 내려와 독서와 자기 수양에 정진했다.

이광로(李光輅): 1510-1539. 자는 희은(希殷)이고 진사(進士) ()의 큰아들이다. 22세 때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동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중종(中宗)의 문묘 알성시(謁聖試)가 있어 문과회시(文科會試)에 직부(直赴)하는 은전을 입었다. 그러나 그 식년(式年)의 방()을 보지 못한 채 나이 30세로 요절(夭折)하니, 사람들은 안회(顔回)와 백어(伯魚)의 죽음에 비유하여 슬퍼하였다. 친우(親友)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그에게 보낸 시에서 그 기상과 인품이 세속을 벗어났다하였고 특히 그 글씨를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에 견주어 칭찬하였다.

이광진(李光軫): 1513-1566. 자는 여임(汝任)이고 호는 금시당(今是堂)이며 진사 원()의 차자이다. 1540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그 6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正字)로 출사한 후 곧 한림(翰林)으로 발탁되어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와 각조(各曹)의 좌랑(佐郞정랑(正郞)을 거쳐,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해 순천(順天흥양(興陽사천(泗川창녕(昌寧) 등지의 목민관이 되어 치적(治績)을 거두었다. 1562년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친 후, 1564년에는 43인 사유(師儒)의 수반(首班)으로 뽑혔으며 마침내 승정원의 승지(承旨)가 되어 오랫동안 왕명을 출납하였다. 사관(史官)들이 사초(史草)에서 평하기를 맑고 단아하며 매사에 신중하고 과묵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를 취하였다(淸雅愼黙 人皆取焉)’이라 하였다. 저서에금시당집(今是堂集)1책이 있다.

이경홍(李慶弘): 1540-1595. 자는 백긍(伯兢)이고 호는 근재(謹齋)이며 금시당(今是堂) 광진(光軫)의 아들이다. 1569년에 사마시에 합격을 한 후 성균관에 유학을 했으나 영리(榮利)를 취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덕기(德器)를 닦는데 주력하였다. 1591년에는 그가 학덕(學德)을 겸비하고 효행이 드러남에도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하여 국천(國薦)으로 준원전참봉(濬源殿參奉)에 제수되어 북관(北關)의 임지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머나 먼 임지에서 밤낮없이 고향으로 달려와, 아우 경승(慶承)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한 후 석골동(石骨洞)에서 진을 치고 창의(倡義)를 하였다.

이경옥(李慶沃): 1541-1593?. 자는 계원(季源)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며 월영(月盈) 원량(元亮)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으며 사후에 증손 만전(萬全)의 귀현(貴顯)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의 증직이 있었다.

이경승(李慶承): 1553-1594?. 자는 숙긍(叔兢)이고 생원(生員) 광로(光輅)의 아들인데 생부(生父)는 금시당(今是堂) 광진(光軫)이다. 158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산내(山內) 석골동(石骨洞)으로 피난을 한 다음, 그곳에서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방어했다. 그 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의진(義陣)으로 합류했으나 전장(戰場)에서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유(李 瑜): 1583-1648: 자는 군보(君寶)이고 겸재(謙齋) 경옥(慶沃)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의 직책을 받은 일이 있고 사후에 손자의 구현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의 증직을 받았다.

이장화(李長華): 1621-1682.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번수(樊叟)이며 증참의(贈參議) ()의 아들이다. 1636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가 성립됨에 중로(中路)에서 철수하였다. 사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이만용(李萬容): 1643-1711. 자는 여관(汝寬)이고 처사 장윤(長胤)의 아들이다. 30대 중반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다.

이만전(李萬全): 1650-1722. 자는 안숙(安叔)이고 호는 첨헌(忝軒)이며 번수(樊叟) 장화(長華)의 아들이다. 1676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20년 만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출사하였다. 그 후 첨절제(僉節制부호군(副護軍순천영장(順天營將위원군수(渭原郡守)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한 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승진하였다.

이만백(李萬白): 1656-1716. 자는 여백(汝白)이고 호는 자유헌(自濡軒)이며 처사 장윤(長胤)의 아들이다. 숙종(肅宗) 때의 학자로 그 시문이 전아(典雅)하고 격()이 매우 높았다는 평판이 있었으며 필법이 또한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자유헌집(自濡軒集)2책이 간행되었다.

이만재(李萬材): 1671-1720. 자는 하숙(廈叔)이고 호는 묵헌(黙軒)이며 처사 장신(長新)의 아들이다. 1699년 기묘식년(己卯式年) 문과 초시에서 장원을 하고도 조모(趙某)라는 주시관(主試官)을 피혐(避嫌)하여 전시(殿試)를 포기한 기개 높은 선비이다. 만년에는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탐독했는데 저서로묵헌집(黙軒集)1책이 있다.

이지복(李之復): 1672-1759. 자는 복초(復初)이고 호는 월암(月庵)이며 증참판(贈參判) 만형(萬亨)의 아들이다. 1752년에 81세의 높은 나이로 나라에서 우로(優老)의 은전(恩典)이 있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함이 내렸다. 저서로월암시문집(月庵詩文集)1책이 전한다.

이지운(李之運): 1681-1763. 자는 휴중(休仲)이고 호는 백곡(栢谷)이며 사인(士人) 만종(萬種)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과업(科業)을 단념하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경사(經史)의 탐독에 정진했다. 중년 이후 선대의 문적을 채집하여철감록(綴感錄)2책을 저술하는 한편 자신의 문집백곡집(栢谷集)1책을 남겼다. 1763년에 수직(壽職)으로 나라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사작(賜爵)이 있었다.

이지관(李之觀): 1682-1740. 자는 광백(光伯)이고 호는 운암(雲菴)이며 첨헌(忝軒) 만전(萬全)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 전국을 주유하면서 지은주유록(周遊錄)이란 시문집을 남겼다. 사후에 아들의 귀현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이태주(李泰周): 1698-1748. 자는 중래(仲來)이고 처사 지술(之述)의 아들이다. 172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判官훈련원정(訓練院正) 병마우후(兵馬虞候)를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와 훈련원 도정(都正)에 까지 승진하였다.

이홍(李 泓): 1707-1786. 자는 사범(士範)이고 호는 오호(午湖) 또는 유유헌(唯唯軒)이라 했으며 운암(雲菴) 지관(之觀)의 아들이다. 1734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철산부사(鐵山府使나주영장(羅州營將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등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책에 임하였다.

이숙(李 潚): 1720-1807. 자는 유청(幼淸)이고 호는 반계(盤溪)이며 사인(士人) 지적(之迪)의 아들이다. 일찍이 관환(科宦)에 대한 뜻을 거두고 정각산(正覺山) 아래에 반계정(盤溪亭)을 지어 은거하였다. 나이 80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직함을 받았다. 저서에반계집(盤溪集)1책이 있다.

이병덕(李秉德): 1743-1808. 자는 이대(彛大)이고 호는 모포(慕圃)이며 오호(午湖) ()의 아들이다. 50세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비변사의 낭청(郎廳)이 되었고, 여러 요직을 거친 끝에 함평현감(咸平縣監)에 이르러 은퇴하였다.

이병성(李秉晟): 1745-1791. 자는 수도(修道)이고 통덕랑(通德郞) ()의 아들이다. 영조(英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정랑(正郞)을 거쳐, 정조(正祖) 때 장기현감(長耆縣監)에 이르렀다.

이장박(李章璞): 1779-1822.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지지헌(知止軒)이며 처사 휘춘(輝春)의 아들이다. 경사(經史)에 관통한 학자로서 그의 사후인 1893년에 경상도 사림들의 천거로 조정에서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포증(褒贈)되었다.

이유수(李攸秀): 1784-1840. 자는 근지(謹之)이고 호는 죽와(竹窩)이며 처사 휘연(輝淵)의 아들이다. 순조(純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과 사간원 정언(正言) 및 사헌부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이장한(李章漢): 1800-1850. 자는 문로(文老)이고 호는 추남(推南) 또는 소계(小溪)이며 만취정(晩翠亭) 휘오(輝五)의 아들이다. 문장에 능하여서암기(西巖記)」「한거설(閑居說)등 많은 산문(散文)을 남겼는데, 저서로는추남유고(推南遺稿)1책이 있다.

이종원(李鍾元): 1805-1874. 자는 선여(善汝)이고 호는 무릉옹(武陵翁)이며 처사 유정(攸珵)의 아들이다. 중년에 무릉서당(武陵書堂)을 세워 원근의 후진들을 가르쳤으며 향리에 의장(義庄)을 설치하여 많은 빈민들을 구휼하였다.

이장근(李章瑾): 1807-1856. 자는 내유(乃瑜)이고 호는 반구(盤邱)이며 처사 휘발(輝發)의 아들이다. 일찍이 종계(宗契)를 창설하여 선조를 위한 의물(儀物)과 규전(圭田)을 장만하여 친족과 이웃을 위해 많은 시의(施義)가 있었다.

이종극(李鍾極): 1811-1856. 자는 건오(建五)이고 호는 도원(桃源)이며 지지헌(知止軒) 장박(章璞)의 아들이다. 평생의 학행(學行)과 효성으로 1890년에 경상도 사림들의 천거로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우모록(寓慕錄)1책을 간행했다.

이용구(李龍九): 1812-1867. 자는 이용(而用)이고 호는 만성(晩惺)이며 처사 상규(尙奎)의 아들이다. 평소에 청고(淸高)한 행의와 풍부한 문사(文詞)로 세평이 높았고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는 음양(陰陽수리(數理의약(醫藥풍수(風水)에도 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저서로는만성문집(晩惺文集)1책을 간행하였다.

이장오(李章五): 1820-1886. 처음 이름은 장운(章雲)이고 자는 여룡(汝龍)이며 호를 일성(日省)이라 하였다. 풍채가 맑고 엄숙했으며 지조가 경개(耿介)하고 특히 문사(文辭)와 필한(筆翰)에 일가를 이루었다. 철종(哲宗) 때 삼정(三政)의 문란을 비판한 상소문을 올린 일이 있고, 저서로주해천자문(註解千字文)1책을 친필로 썼다.

이종곤(李鍾崑): 1826-1890. 자는 여진(汝鎭)이고 호는 농은(農隱)이며 처사 장봉(章琫)의 아들이다. 일찍이 향리에 단구이숙(丹丘里塾)과 조양서당(朝陽書堂)을 세워 후진들을 교육하는 한편, 이창(里倉)을 설치하여 춘궁기 때 많은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저서로농은유고(農隱遺稿)1책을 간행했다.

이종호(李鍾昊): 1834-1915. 자는 맹흠(孟欽)이고 호는 소호(小湖)이며 우연(愚淵) 장간(章幹)의 아들이다. 선재(先齋)에 서숙(書塾)을 열어 많은 촌수(村秀)들을 가르쳤으며 1902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수계(壽階)를 받았다.

이종상(李鍾庠): 1837-1925. 처음 이름은 종술(鍾述), 자는 양길(養吉)이고 호는 수당(睡堂)이며 병와(兵窩) 장원(章遠)의 아들이다. 선정(先亭)의 복원 등 위선사업에 공적이 많았고 1902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수직(壽職)을 받았다.

이익구(李翊九): 1838-1912. 자는 능백(能伯)이고 호는 항재(恒齋)이며 도원(桃源) 종극(鍾極)의 아들이다. 성재(省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경사(經史)와 사학(辭學)에 널리 통달했는데, 특히 근기실학(近畿實學)의 종사(宗師)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상과 학풍을 존모(尊慕)하여 그 이론을 일상생활에 많이 응용 실천하였다. 이조말엽의 삼정(三政)에 대한 책문(策問)과 휼빈계(恤貧契)의 조직,이창설(里倉說)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저서로독사차기(讀史箚記)104책과항재집(恒齋集)95책을 간행했다.

이종각(李鍾珏): 1839-1900. 처음 이름은 종대(鍾大), 자는 도일(道一)이고 호는 괴파(槐坡) 또는 만한당(晩恨堂)이라 했으며 일성(日省) 장오(章五)의 아들이다. 문사(文詞)에 능했으며 저서로만한당유고(晩恨堂遺稿)1책이 있다.

이능구(李能九): 1846-1896. 자는 익중(翊仲)이고 호는 정존헌(靜存軒)이며 도원(桃源) 종극(鍾極)의 아들이다. 문사(文詞)에 능하여 저서로관규쇄록(管窺瑣錄)」「황년기사(荒年記事)등의 잡저(雜著)가 그의 저서정존헌집(靜存軒集)2책에 실려 있다.

이명구(李命九): 1852-1925. 자는 명숙(命叔)이고 호는 용재(庸齋)이며 도원(桃源) 종극(鍾極)의 아들이다. 1904년에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으나 국운의 쇠망으로 벼슬을 단념한 채, 화악산(華岳山) 기슭에 삼은정(三隱亭)을 짓고 수양하였다.

이경구(李景九): 1856-1921. 자는 찬경(贊卿)이고 호는 묵산(黙山)이며 무초(武樵) 종룡(鍾龍)의 아들이다. 중년 이후 향리에 목산정(沐山亭)을 짓고 후진들을 교육하였으며 저서로묵산유집(黙山遺集)1책이 있다.

이병희(李炳憙): 1859-1936. 자는 응회(應晦)이고 호는 성헌(省軒)이며 항재(恒齋) 익구(翊九)의 장자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젊은 시절부터 경···(經史子集)에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특히 부친으로부터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실학사상을 전수받아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을 수립하는데 힘썼다. 화산의숙(華山義塾)의 설치,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단연회지부(斷煙會支部)의 결성, 방대한성호집(星湖集)의 간행 등이 모두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919년에는 종제들과 힘을 합해 종전의 화산의숙을 정진의숙(正進義塾)으로 개편하여, 후일 민족사학으로서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저서로조선사강목(朝鮮史綱目)14책과성헌집(省軒集)189, 그리고성헌요언별고(省軒堯言別稿)가 전한다.

이정구(李鼎九): 1861-1906. 자는 중경(重卿)이고 호는 만천(彎川)이며 수당(睡堂) 종상(鍾庠)의 맏아들이다. 188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부사과(副司果)를 거쳐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서 시종원분시어(侍從院分侍御)에 발탁되었다.

이병수(李炳壽): 1861-1930. 자는 경기(景箕)이고 호는 화하(華下)이며 항재(恒齋) 익구(翊九)의 차자이다. 구한말에 원릉참봉(元陵參奉)의 실직에 제수되었으나 국운이 날로 기울어지는 것을 탄식한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경사(經史)와 시문에 침잠하였다. 저서로화하시집(華下詩集)1책이 간행되었다.

이시철(李是哲): 1862-1930. 자는 화영(華永) 또는 준부(濬夫)이고 호는 해산(海山)이며 사인(士人) 공섭(公燮)의 아들이다. 1887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곧 7품직으로 초수(超授)되어 출사하였다.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1895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올랐으며 1907년에는 김해군수(金海郡守)를 역임하였다.

이병규(李炳圭): 1868-1951. 자는 경용(景容)이고 호는 도하(桃下)이며 정존헌(靜存軒) 능구(能九)의 장자이다. 고종(高宗) 때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어 6품 관직에 올랐으나 기울어지는 국운을 한탄하고 벼슬을 포기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향리에서 신문화(新文化)의 보급과 근대산업 개발을 통한 자력갱생(自力更生) 운동에 헌신했다.

이연구(李演九): 1869-1936. 자는 인겸(仁兼)이고 처사 종만(鍾晩)의 아들이다. 구한말에 등용되어 판임관(判任官) 8등의 서품(敍品)과 순릉참봉(純陵參奉)으로 출사하였다. 그 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과 주임관(奏任官) 3등으로 비서감승(秘書監丞)에 올랐다.

이병곤(李炳鯤): 1882-1948. 처음의 이름은 병준(炳駿), 자는 경익(景翼)이고 호는 퇴수재(退修齋)이며 용재(庸齋) 명구(命九)의 장자이다. 경학(經學)의 깊은 소양과 현대의 신지식을 흡수함으로써 신구겸전(新舊兼全)의 홍유(鴻儒)’라는 평판이 있었다. 일제말기 정진학교(正進學校)가 강제 폐교되면서 반일인사(反日人士)로 몰려 옥고(獄苦)를 치렀다. 저서로퇴수재집(退修齋集)4책과위득록(爲得錄)이라는 일기(日記) 수십 책이 전한다.

이세형(李世衡): 1883-1931. 자는 혁부(奕夫)이고 호는 일정(一亭)이며 성헌(省軒) 병희(炳憙)의 장자이다. 1905년에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경술국치를 겪게 되어 세사(世事)와 인연을 끊고 향리에 칩거하였다. 저서로일정집(一亭集)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