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수안이씨시조(遂安李氏),이견웅(李堅雄),수안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1 15:45 수정일 : 2018-07-26 15:46

시 조

수안이씨시조(遂安李氏 始祖)는 이견웅(李堅雄)이다.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후손 연송(連松)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며, 수안(遂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수안(遂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본관의 유래

수안(遂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있는 지명(地名)으로, 원래 고구려의 장색현(璋塞縣)이었는데, 신라시대에 서암군(栖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수안현(遂安縣)이 되었다가 현종(顯宗) 때에 곡주(谷州)에 속하였으며, 후에 다시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때에는 원(元)의 환관(宦官) 이대순(李大順)이 청하여 수주(遂州)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조선 초에 현재의 지명인 수안군(遂安郡)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견웅(堅雄)의 손자(孫子) 빈(彬)이 사공(司空)을 지냈고, 충렬왕 때 판례빈시사(判禮賓寺事)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한 연송(連松)은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 평장사(三重大匡太師平章事)에 이르렀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수산(壽山)의 아들인 염(恬)은 고려에서도 벼슬을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에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특히 정한(廷翰)의 아들 시항(時恒)은 성품(性品)이 고결(高潔)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화은집(和隱集)」을 저술하여 명성을 날렸고,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한 준식(俊植)은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수안 이씨(遂安李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안이씨(遂安李氏)는 남한에 20,76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수안이씨조상인물

이빈(李 彬): 고려(高麗)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

이단(李 端): 1011년(현종 2)에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중추원사(中樞院使)․좌복야(左僕射)․평장사(平章事) 등을 거쳐 1034년(덕종 3) 추충좌리공신(推忠左理功臣)․상주국(上柱國)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이위(李 威):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이송(李 竦):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이연송(李連松): 자(字)는 백심(栢心), 호(號)는 용계(龍溪),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충렬왕 때 판례빈시사(判禮賓寺事)를 거쳐 1309년(충선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다. 그 후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으로 삼중대광 태사 평장사(三重大匡太師平章事)에 이르렀고 수안군(遂安君)에 봉(封)해졌다.

이수산(李壽山): ?~1376(우왕 2). 시호(諡號)는 공량(恭良). 충혜왕(忠惠王) 때 총관(摠管)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라 추성익대좌명공신(推誠翊戴佐命功臣)이 되고, 춘성군(春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수춘부원군(壽春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삼사 우사(三司右使)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使)로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推忠保節翊戴佐理功臣)이 되었다.

이인우(李仁祐): ?~1358(공민왕 7). 청주 목사(淸州牧使) 관(觀)의 아들. 벼슬이 밀직(密直)․삼사 부사(三司副使)에 이르렀고, 1358년(공민왕 7) 모거경(毛居敬) 등이 이끄는 4만의 홍건적(紅巾賊)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자 장군(將軍)으로 안 우(安 祐)․이방실(李芳實) 등과 출전, 적을 대파했으나 적의 재침 때 천호(千戶) 오중흥(吳仲興)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수안(遂安)의 추원사(追遠祠)에 제향되었다.

이수생(李遂生):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존암(尊巖).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 수안(遂安)의 율리(栗里)에 은거,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벼슬을 내렸으나 사퇴했다.

이염(李 恬): ?~1403(태종 3). 판삼사사(判三司使) 수산(壽山)의 아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고, 우왕 때 예의(禮儀)․전공(典工)의 판서(判書) 및 밀직부사(密直副使)․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역임, 공양왕(恭讓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얼마 후 경상도 도절제사(慶尙道都節制使)가 되고 1392년 조선건국 후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이시항(李時恒): 1692(현종 13)~1736(영조 12). 자(字)는 사상(士尙), 호(號)는 화은(華隱․和隱)․만은(晩隱), 정한(廷翰)의 아들. 운산(雲山) 출신. 유상운(柳尙運)의 문인. 진사(進士)로서 1699년(숙종 2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군수(郡守)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평양에 은거하며 제자들을 교육했다. 문장에 능숙하여 유상운의 문하에서 학문(學問)을 연찬(硏鑽)할 때 특히 대구(對句)에 능란했고, 대신 심수현(沈壽賢)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갈 때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문명을 떨쳤다. 만년에는 학문에 전심하여 장서(藏書)가 수천 권에 이르렀고, 저서에「화은집(和隱集)」이 있다.

이희팔(李羲八): 1796(정조 20)~?. 자(字)는 하경(河經), 호(號)는 수불(少芾), 서흥(瑞興) 출신. 문장과 그림에 능하여 산수화(山水畵)와 인물화(人物畵)에 뛰어났다. 일찌기 판서(判書) 서염순(徐念淳)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소문연수부(蘇文烟樹賦)>와 <산해관(山海關) 상향문(上樑文)>을 지어 중국(中國) 명사(名士)들의 찬탄(讚嘆)을 받았다.

이준식(李俊植): 1900(광무 4)~1966. 독립운동가․군인. 평남 순천(順天) 출신. 3․1운동 후 상해(上海)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 그후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나와 정의부 군사위원장(軍事委員長)을 지냈다. 1940년 광복군(光復軍)이 창설되자 참모(參謀)가 되고 이어 광복군 제1지대장(第一支隊長)으로 서안지구(西安地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해방 후 귀국하여 국군의 창설에 힘쓰고 사단장(師團長)․군단장(軍團長)을 역임. 육군중장(陸軍中將)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그 후 재향군인회 회장(在鄕軍人會會長), 광복회 회원(光復會會員)․한국전력주식회사 고문(韓國電力株式會社顧問)을 지냈다. 국립묘지(國立墓地)에 안장(安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