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서산이씨시조(瑞山李氏).이영모(李永謨),서산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1 15:19 수정일 : 2018-07-27 10:2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서산이씨(瑞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영모(李永謨)는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그의 선계(先系)와 득관 유래(得貫由來)는 자세히 알 수 없고 그 후손(後孫)들은 서산을 관향(貫鄕)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서산(瑞山)은 충청남도 서북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인데 통일신라 때 부성군(富城郡)이라 하였으며 1284년(충렬왕 10)에 서산군으로 개칭하였다. 1308년 다시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하고 1310년(충선왕 2) 서령부(瑞寧府)가 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서산(瑞山)으로 복명하고 군(郡)이 되었으며, 그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913년 태안(泰安)․해미(海美)를 서산에 통합하여 서산군이 되고 1989년 1월 1일 서산읍이 서산시로 승격하면서 태안군이 분리 독립되고, 1995년 1월 1일 서산군이 서신시에 통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 이영모(李永謨)의 아들 덕원(德源)이 고려(高麗)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냈고, 손자 공환(公環)과 증손(曾孫) 규서(圭瑞), 규서의 손자 맹상(盟祥)이 모두 상서(尙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한 맹(盟)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戰死)하였으며, 응운(應運)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아들과 함께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밖에 항일운동의 선봉자로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진룡(鎭龍)이 서산 이씨(瑞山李氏)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의하면 서산이씨(瑞山李氏)는 남한에 1,17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 - 서산이씨조상인물

이덕승(李德升) : 고려(高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였다.

이덕원(李德源) : 고려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釾)를 역임하였다.

이공담(李公譚) : 고려조(高麗朝)에 부정(副正)을 지냈다.

이공환(李公環) :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이규서(李圭瑞) : 고려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이금(李 禽) : 고려조(高麗朝)에 판도(版圖)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이맹상(李孟祥) : 고려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냈다.

이중상(李仲祥) : 고려에서 사과(司果)를 지냈다.

이경윤(李景胤) :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만춘(李萬春) :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조선조(朝鮮朝)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이연(李 讌) :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부사(府使)․예빈시(禮賓寺) 정(正) 등을 지냈다.

이원중(李元仲) : 조선 때 군기시(軍器寺) 정(正)을 역임하였다.

이남(李 楠) : 조선조(朝鮮朝)에 부위(副尉)를 지냈다.

이계(李 桂) :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한좌(李漢佐) : 조선에서 사과(司果)를 지냈다.

이한우(李漢佑) :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난(李 鸞) : 조선조에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이맹(李 孟) : 자(字)는 회성(希聖). 조선 선조(宣祖) 때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었으며 이어 무과에 급제한 후 영등포(永登浦: 거제도) 만호(萬戶)를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재임 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다가 임진(臨津) 전투에서 순절(殉節)하였다. 그 공(功)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정려(旌閭)와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응운(李應運) : 자(字)는 공망(公望). 1592년( 선조 25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잃고 매형(妹兄)에게 의탁(依託)하여 살다가, 장성해서 평산군(平山郡) 적암면(積岩面) 장의리(長義理)에 들어 와 서산 이씨(瑞山李氏)의 세거지(世居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무과(武科)에 장원(壯元)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부산 첨절제사(釜山僉節制使)를 역임했다.

이복선(李復先) : 자(字)는 증술(曾術). 조선(朝鮮) 때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역임하였다.

이기선(李起先) : 조선조에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이증거(李曾擧) : 자(字)는 현길(顯吉).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여 세인(世人)의 추앙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황해도(黃海道) 연안(延安)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이중거(李仲擧) : 조선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富護軍)을 지냈다.

이흥원(李興元) : 조선에서 봉산(鳳山)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이민수(李民秀) : 조선조(朝鮮朝)에 평산(平山)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진룡(李鎭龍) : 자(字)는 운서(雲瑞), 호(號)는 기천당(己千堂). 1907년 평산(平山)의 유학자들이 도평산(桃平山)에서 의진(義陣)을 결성할 때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돌격장(突激獎)이 되어 평산(平山)․연안(延安)․예성강(禮成江) 연안지역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때로는 만주(滿洲)․노령(露領) 등지의 동지들과 구국(救國) 방략(方略)을 협의하기도 하고 새로운 무기를 반입하여 사기를 진작하기도 하여 해서명장(海西名將)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만주(滿洲)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1916년에는 귀국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운산(雲山) 금광(金鑛)으로 가는 금 수송차를 습격하였고 헌병 분견대 습격 등 활동을 하다가 임 곡(林 谷)의 밀고로 관전현(寬典縣)에서 체포되어 일제 법정(法庭)에서 그들의 침략 불의를 매도하다 사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우씨(禹氏)도 따라 자결하였는데 중국 소아하(小雅河) 언덕 위 우부인(禹夫人)의 묘전에 중국인들이 세운 열녀비(烈女碑)가 있다. 1963년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授與)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