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덕산이씨시조(德山李氏),이존술(李存述),덕산이씨조상인물,이사맹(李思孟)

작성일 : 2017-04-30 12:07 수정일 : 2018-03-03 17:01

시 조

덕산이씨(德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존술(李存述)은 고려 명종(明宗) 때 덕풍(德豊 : 충남 예산군 덕산) 호장(戶長)을 지내고, 그의 아들 언후(彦厚)와 손자(孫子) 극보(克甫), 그리고 증손 핵(翮)이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내며 명문의 기틀을 다졌으므로 후손들이 덕산(德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덕산(德山)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예산군(禮山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덕풍(德豊)․이산(離山) 두 현(縣)의 합명인데, 덕풍현(德豊縣)은 백제(百濟)의 금물현(今物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금무(今武)로 개명하고 고려(高麗) 때 덕풍으로 고쳤다.

이산현(李山縣)은 본래 백제의 시산군(尸山郡)인데 경덕왕 때 이산군으로 개명하였으며, 1405년(태종 5) 두 현을 합하여 덕산현(德山縣)을 만들었고, 1847년(현종 13) 군(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3년 일제시대에 덕산면이 되어 지금은 예산군(禮山郡)에 속한 덕산면(德山面)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의 5세손 유실(瑜實)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그의 아들 겸(謙)이 비서교서랑(祕書校書郞)을 역임하고 겸의 아들 사목(思牧)은 집현전의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영(英)은 존술(存述)의 8세손으로 그의 아들 3형제 중에 장자 유(愉)가 조선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차남 조(造)는 관직에 재직 중 대간의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유배를 당한 후 풀려 나와 이조의랑(吏曹議郞)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이사맹(師孟)은 유(愉)의 아들로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거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한편 순(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봉상시정(奉常侍正)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고 규문(奎文)은 참판(參判)을 지냈다.

그외 근대에 와서 가문을 빛낸 상만(尙萬)의 아들 종원(宗原)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산이씨(德山李氏)는 남한(南韓)에 8,3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덕산이씨조상인물

이언후(李彦厚) 고려 때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이극보(李克甫) 고려 때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이핵(李 翮)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이유실(李瑜實) 고려 때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다.

이겸(李 謙) 고려에서 비서교서랑(祕書校書郞)을 역임하였다.

이사목(李思牧) 고려 때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이르렀다.

이영(李 英)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다

이유(李 愉) 호(號)는 은재(隱齋). 조선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이조(李 造) 호(號)는 상정. 조선(朝鮮)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이사맹(李思孟) 호(號)는 죽산(竹山), 시호(諡號)는 온혜(溫惠). 조선 태종(太宗) 때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綠線)되었다.

이사중(李師仲)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사정(李師程) 조선(朝鮮) 때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이사증(李師曾) 조선조에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이사계(李師季) 조선 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이익박(李益朴) 호(號)는 영재(靈齎). 조선 때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청백리(淸白吏)에 천거되었고 문장과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이창손(李昌孫)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순(李 純) 자(字)는 희문(希文), 관찰사 익복(益福)의 증손, 형문(亨門)의 아들.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523년 장령(掌令), 1535년 초계문신(哨戒文臣)이 되고, 1537년 봉상시정(奉常侍正)을 거쳐 이듬해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내고 뒤에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올랐다.

이규문(李奎文) 호(號)는 지주헌(砥柱軒).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이진길(李震吉) 1561(명종 16)~1589(선조 22) 자(字)는 자수(子修), 정림(廷霖)의 아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올라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우신(李友信) ?~1822(순조 22) 자(字)는 익지(益之), 호(號)는 문원(文原)․죽촌(竹村)․수산(睡山), 이조 판서 식(植)의 후손. 김양행(金亮行)의 문인.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며, 1818년(순조 18) 경연관(經筵官), 이듬해 자의(字意)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