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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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9 17:10 수정일 : 2018-08-01 11:26

광주이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비조(鼻祖)는 신라(新羅) 내물왕(奈勿王 : 17대 왕,재위기간 356~402)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래 칠원(漆原)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世襲)해 오다가 제56대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자 그 후손이 이에 불복(不服)하고 절의(節義)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太祖)가 강계(降階)하여 회안호장(淮安戶長)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본관(本貫)을 회안으로 칭관(稱貫) 하다가 940(고려 태조 23) 지명이 광주(廣州)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광주(廣州)는 경기도(京畿道)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마한(馬韓)의 일부로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쫓겨 이 곳에 남하해서 한왕(韓王)이 되어 세운 회안국(淮安國)의 일부였다.

371년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남한산(南漢山: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이도(移都)하여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553(백제 성왕 31,신라 진흥왕 14) 신라(新羅)에게 나라를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고려 태조 23)에 광주(廣州)로 고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 광주군(廣州郡)이 되었다.

그 후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말에 현달(顯達)했던 현조(顯祖)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수보(收譜)를 하게 되었다.

생원공(生員公) ()의 후손은 생원공(生員公) 휘 당(諱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遁村) ()1(一代)로 하여 족보를 만들어 대종회라 칭하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一代로 하여 종회를 구성하였으나 현재는 십운과공 종회만이 존재한다.

석탄공(石灘公), 암탄공(巖灘公) 댁은 한희(漢希)를 시조로 하여 율정공댁과 합보하여 오다가 1987년 정묘(丁卯)대동보(大同譜)에서 석탄공과 암탄공을 1대조로 하였으며 율정공 댁은 록생공(祿生公)1대로 하여 족보를 만들었다.

씨족사 개요(氏族史 槪要)

. 대종회(大宗會)생원공당(生員公唐)의 五子 둔촌(遁村)과 십운과공(十韻科公) 가문(家門)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빼어난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생원공(生員公) ()의 후손에서는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오자구등과(五子俱登科)> 현달하여 광주이씨의 중추를 이루었으니 인령(仁齡)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경선고사(慶先庫使)이며 아드님 조()가 있어 문과(文科)에 올라 강원도사(江原都事)를 경력(經歷)하였으며 둘째는 초명(初名) 원령(元齡) 개명(改名) ()이고 셋째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지군사(知郡事) 희령(希齡)이고 넷째 자령(自齡)도 문과(文科) 십운과(十韻科)에 급제(及第)한 고려조(高麗朝) 판서(判書)이다. 다섯 째 천령(天齡)은 문과에 급제한 보현과공(補賢科公)이다.

그 중 둘째 아들 둔촌(遁村) ()의 인맥(人脈)이 가장 화려하다.

초명(初名)이 원령(元齡)인 집()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해박(該博)한 학문과 고상(高尙)한 지절(志節)로 명망을 떨쳤으며, 여말(麗末) 삼은(三隱: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과 같은 명현(名賢)들과 더불어 문교(文交)를 나누며 존경을 받았다.

1368(공민왕 17) 당시 요승(妖僧) 신 돈(辛旽)이 득세(得勢)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웃에 살고 있는 채판서(蔡判書)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비판했다가 화()를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되어 신변에 위험을 느낀 둔촌(遁村)은 노구인 아버지 당()을 등에 업고 개경(開京)을 빠져 나와 과거동기(科擧同期)인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가 살고 있는 경북 영천(慶北永川)으로 은거하였다.

둔촌 부자(父子)를 반갑게 맞이한 천곡 최원도는 다락방에 이들을 숨기고 4년 동안 피화생활(避禍生活)을 돌봐 주며, 가족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큰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 때 천곡(泉谷)의 집에는 열 아홉 살인 제비(燕娥)라는 여종이 있어, 한 끼에 밥을 세 그릇씩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보는 상전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친 행세를 하는 상전의 소행을 수상쩍게 여긴 주인마님은 이 제비라는 여종으로 하여금 염탐을 시켰다.

제비는 밥 세 그릇을 상전이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벽장 속에 두 사람을 숨겨 두고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약에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진 둔촌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양가(兩家) 모두가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안방마님이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니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질린 여종 제비는 마님의 걱정을 덜고 또 상전의 신의와 상전 친구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하여 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듬 해 둔촌의 아버지 당()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천곡은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영천군 나현(羅峴:광릉골) 모부인(母夫人) 묘 아래에다 예장을 치루었다.

1371(공민왕 20) 신돈(辛旽)이 역모로 주살된 후에야 비로소 둔촌은 자유의 몸이 되어 송경(松京) 용수산(龍首山) 아래에 있는 현화리(玄化里) 옛 집으로 돌아와 초명인 원령(元齡)을 집()으로 자()를 호연(浩然)으로, 호를 둔촌(遁村)으로 고치어 살면서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모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맏아들 지직(之直)1380(우왕 6) 문과(文科)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교리(校理)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정종(定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에 올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둘째 지강(之剛)은 고려 우왕(高麗 禑王) 8년 임술(壬戌) 138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태종 칠년(太宗 七年) 다시 중시을과(重試乙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올랐으며 세자 좌부빈객(世子 左副賓客)으로 세자(世子:後日의 世宗大王)에게 경서와 사적을 강의하며 군왕의 도의를 가르치는 막중한 직책을 맡게 되어 정심설(正心說)을 강()하곤 하여 세종으로 하여금 후일 성군(聖君)이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시호(諡號)가 문숙(文肅)이다.

셋째 지유(之柔)1389년 기사(己巳) 공양왕(恭讓王) 1년에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司諫)으로 발탁되어 재직 중 소도(昭悼)의 변란(變亂)을 당함에 정지아(鄭之雅)와 더불어 방원(芳遠:後日 太宗)에게 극간하여 후일 방원이 태종(太宗)으로 등극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좌천됨에 왕실형제(王室兄弟) 간의 살육전을 통탄하다가 득병(得病)하여 젊은 나이에 타계하였다.

둔촌(遁村)의 후손으로 청백리(淸白吏) 지직(之直)의 맏아들 장손(長孫)은 태종 11년 신묘(太宗 十一年 辛卯:1411)에 문과 급제(文科及第)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부친상을 당하여 산소자리를 선택할 때 의지가 잘 통하는 진사(進士) 조한필(曺漢弼)이라는 벗이 있었는데 풍수에 밝아 묘()자리를 보고 말하기를 "이 자리가 좋아서 자손들이 연이어 과거에 오르고 현달 하겠으나 다만 장자에게 흉하다고 말한 즉, 아우 충희공(忠僖公:仁孫)이 형에게 불길한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부모를 장사지내겠느냐고 한 즉 사인공은 부모를 안장하는 것이 소원이지 기타의 부족한 것은 말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그 땅에 장사지내고 독실한 효도로 슬퍼하더니 오래지 않아 서거하였다.

청백리 지직(之直)의 둘째 아들 인손(仁孫)은 태종 정유년(太宗丁酉年)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대사헌(大司憲)과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거쳐 세조(世祖) 기묘년(己卯年:1459)에 우의정(右議政)에 승임되었다. 호는 풍애(楓厓) 시호(諡號)는 충희(忠僖)로 장지는 현 영릉(英陵) 자리인데 예종(睿宗) 기축년(己丑年:1469)에 이르러 능터로 빼앗기고 연을 띄워 떨어진 곳인 여주군 능서면 연주리로 이장 모셨다. 옛날에는 연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연주리라 불리었으나 왜정 시대에 바뀌어 지금은 신지리라 한다.

청백리공의 셋째 아들 예손(禮孫)은 세종(世宗) 갑인(甲寅:1434)년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대사성과 황해도 관찰사로서 명예스러운 치적을 올렸다.

그리고 우의정(右議政) 인손(仁孫)의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오자구등과(五子俱登科)>현달하여 명문(名門)의 지반을 다졌는데, 장남 극배(克培)는 성종(成宗) 때 좌리3등공신(左理三等功臣)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특히 그는 항상 자기 가문의 세력이 너무 성함을 두려워하여 집안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허>를 설득하였고 가문이 너무 성해지면 망하는 이치를 강조하였으며, 두 손자의 이름을 겸()과 공()이라 지으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도리는 이 두 글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경계하였다.

세조(世祖) 때 좌익3등공신(左翼三等功臣)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던 인손(仁孫)의 둘째 아들 극감(克堪)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했으며 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여 필명을 떨쳤다.

우정승 인손의 셋째 아들 극증(克增)은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익대 2등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성종(成宗) 때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국가경비(國家經費)의 식례(式例)를 찬정(撰定)하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올라서는 문묘(文廟)를 증수(增修)한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우의정(右議政) 인손(仁孫)의 넷째 아들 극돈(克墩)은 이십삼세(二十三歲)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이예조좌랑(吏禮曹佐郞)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세조(世祖) 무자(戊子:1468)년 중시(重試)를 아원(亞元)으로 급제하고 도승지(都承旨)에 직배(直拜)되었다.

성종(成宗) 원년(元年) 경인(庚寅:1470) 대사헌(大司憲)으로 시무 12(時務十二條)를 상소(上疏)하여 사서인교육(士庶人敎育)의 기강(紀剛)을 법으로 정해 학훈도교수(鄕學訓導敎授)를 대읍(大邑)에는 급제(及第) 출신(出身)으로 소읍(小邑)에는 생원진사년사십정도(生員進士年四十程度) 유경행자(有經行者)로 교육실행(敎育實行)할 교직자(敎職者)를 선정하게 되었으니 일성록(日省錄)에 「李克墩之功은 不在於黃熹之下라 하고 又曰 李克墩은 今之伊尹傳說)이라」하였다. (伊尹과 傳說은 殷나라 賢相이다.)

성종(成宗) 2年 신묘(辛卯:1471)에 참좌리공신(參佐理功臣)이 되어 광원군(廣原君)의 봉호를 받고 평안ㆍ전라관찰사와 호조판서가 되었고 성종(成宗) 을사(乙巳:1485)년에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을 편찬할 책임을 맡아 실록당상(實錄堂上)으로 서거정(徐居正) 등과 공찬(共撰)하고 노사신(盧思愼) 등과 강목신증(綱目新增)과 강정무경제서(綱正武經諸書)를 편찬하고 서문을 썼다. ()은 좌찬성(左贊成)으로 시호(諡號)는 익평(翼平)이다.

좌의정으로 연산군(燕山君)의 횡포를 바로 잡으려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지인 인동(仁同)에서 사사(賜死)당한 극균(克均)은 우의정(右議政) 인손(仁孫)의 다섯째 아들로 사약을 받고서 유실(幽室)에 들어갔다가 분통함을 참을 길 없어 다시 나와서 형관(刑官)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 백병(白病)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죽은 넋이 너를 따라다니며 평생 괴롭힐 것이다."하고 들어가 약사발을 들이켰다. 형관이 돌아가 연산군에게 그 말을 전하니 더욱 노하여 극균의 뼈를 부수도록 하명하여 쇄골표풍(碎骨飄風) 하였다.

또한 예손(禮孫)의 맏아들 극기(克基)는 단종(斷種) 계유(癸酉:1453)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성종(成宗) 경인(庚寅:1470)년에 한명회가 공() 8인을 경의에 밝고 행의(行誼)가 있다 하여 사표(師表)의 소임에 맡기고자 아뢰자 신숙주(申叔舟)가 찬성하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올라 예문관 부제학(副提學) 및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겸하였는데 그 때에 모두 이르기를 「경의에 밝고 행의가 있기로는 이모(李某) 한 사람 뿐이지 그 나머지는 다소 훈고(訓고)를 알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성종(成宗)이 연산군의 어머니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던 날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었고, 그의 아들 수형(守亨:사인)ㆍ수의(守義:한림)ㆍ수정(守貞:수찬) 3형제가 이조(吏曹)와 홍문관(弘文館)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류자광(柳子光)이 크게 시기하여 밤낮으로 연산군을 충동하여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어느 날 임금과 신하들이 같이 즐기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재상들이 잇달아 술 두 잔을 올리면 연산군도 또한 끝의 술잔으로서 재상에게 돌려 주었다. 다른 재상들은 받아서 마셨는데, 세좌는 끝의 술잔을 받아서 마시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튿날 연산군은 신하가 임금이 주는 술을 받아서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하고, 또 남은 술방울을 임금의 옷자락에 흘린 것은 불경죄(不敬罪)이니 세좌를 옥에 가두라고 하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손자들과 설날 그의 집에 세배갔던 이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세좌의 손자 연경(延慶:수원의 아들)은 세좌가 북방 변지로 귀양갔을 때 모시고 다니며 모든 험난한 일을 다 겪었다. 그 후 조부와 숙부가 모두 화를 입었고, 연경도 연좌되어 귀양을 갔는 데 단정하고 깨끗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죽을 때에 갈팡질팡 하여 정당한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얼굴빛이 평화롭고 말씨가 따뜻하며 흉금(胸襟)이 쇄락(灑落)하였고, 학문은 세속의 누습을 벗어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엎지러지는 물결 같은 세상에서도 능히 우뚝 서서 시종 불변하였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3년이 지나도록 치르지 못한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모친을 모시고 충주(忠州) 북촌(北村)에 살다가 안당(安唐)이 설치한 현량과(賢良科)에 특채되어 유학(儒學)을 바탕으로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혁신 그룹에 서서 중견 구실을 하였다.

1519(중종 14)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 등의 반동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혁신정치를 추구하는 신진파를 제거할 때 그 숙청자 명단의 우두머리에 연경의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중종(中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연경은 어필로 이름이 지워져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량과가 파과(罷科)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충주(忠州)에 물러가 살았다.

수정(守貞:세좌의 넷째 아들)은 연산군 때 아버지 세좌와 함께 사화에 연좌되어 피살되었고, 당시 일곱 살인 맏아들 윤경(潤慶)과 여섯 살인 차남 준경(浚慶)의 형제는 귀양을 갔다.

어린 나이로 가난한 귀양살이에 옷이 해지고 이와 서캐가 많아서 아우인 준경이 긁으며 울자, 윤경은 웃으며 "새 옷이 입고 싶지"라고 말하니, 준경은 "어디서 새 옷을 얻겠나"하였다. 윤경은 준경을 시켜 불을 피우라고 시킨 다음 형제가 입었던 옷을 벗어 모두 불에 태우고 알몸으로 앉아 있었다. 때마침 초하루 날이라 귀양살이의 순찰점고(點考)를 하는데, 지키는 사람이 발가벗은 어린 형제의 사정을 관에 보고하자 원은 놀라서 새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온 윤경(潤慶)과 준경(浚慶)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1531(중종 26) 문과에 급제했고, 여러 관청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558(명종 13)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윤경의 아들 중열(中悅)은 중종(中宗) 때 등과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학문이 뛰어나 장래를 촉망받았으나 명종(明宗) 때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친구 이휘(李輝)를 변호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 사사(賜死) 되었다.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의하면 중열은 다정한 친구인 이휘로부터 시국에 걸리는 중대한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열은 이휘의 일당으로 몰려 처형되느냐 아니면 이휘의 말을 고발하여 자신은 모면하느냐 하는 위태로운 경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아버지인 윤경에게 찾아가 상의했더니 윤경은 "자신이 죽는 것도 애석한 일이지만 친구를 어떻게 배반한단 말이냐"하였다.

중열은 다시 숙부인 준경에게 물었더니 "우리 선대에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피해를 당하여 언제나 원통하고 한스러운 터인데, 오늘날 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위에 계신 부형(父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가문을 보존할 생각으로 글월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라고 하였다.

이 때 중열의 아버지인 윤경이 승정원에서 편지를 보내어 아들을 책망하기를 <내가 항상 이휘는 일을 저지를 사람이니 사귀지 말라고 주의시켰는데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지금 화가 눈 앞에 닥쳤다고 해서 어찌 친구를 팔아서 살기를 도모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열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살았는데, 1547(명종 2) 311일 밤 부엉이가 동북쪽 모퉁이에 모여들어 울어대니 예로부터 불길의 전조라,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가 부엉이가 운 지 9일만에 사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 이씨의 화려한 인맥(人脈)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목(巨木)인 한음(漢蔭) 덕형(德馨)은 좌의정 극균(克均)의 오대손(五代孫)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른 민성(民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이 놀라게 했으며, 양사언(楊士彦)은 덕형이 14세 때 지은 시()를 보고 <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덕형은 조정에서 베풀어진 각종 정시(庭試)마다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으므로 다른 선비가 이 정시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나 일부러 병을 핑계로 시험을 치지않았다.

31세 때 학자 관직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대제학(大提學)에 초탁(超擢)되었다. 조정에서 대제학을 회천(會薦)할 때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장만 끼고 양보하였다. 한 데 한 점의 반대표가 있어 모두를 의아해 하는 데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며 <노부(老夫)의 소위>라고 자칭하고 서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은 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좀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성숙함을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덕형은 큰절로 노대신의 충고를 흔연히 감사하니 선비들 공론이 양쪽을 모두 아름답게 일컬었다.

중국의 조사(詔使)로 조선에 건너온 왕경민(王敬民)이 덕형의 명성을 듣고 한 절귀의 시()를 써 주기를 "군의 풍도와 기상이 멀리 범류에 뛰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만나 보지 못하여 이것을 써 주어 신교(神交:얼굴은 보지 못하고 정신으로 교분이 깊다는 말)를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했다가 삭직되고 양근(陽根)으로 내려가 53세로 생을 마쳤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

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혼조삼리(昏朝三李)>라 하여 이항복ㆍ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짓밟힌 사직을 지탱한 명신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文人)으로 임진왜란 후 조정의 해잉한 기강을 바로 잡는 데 공헌했던 윤우(潤雨)는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되었고, 청명고절(淸明高節)로 명망이 높았던 아들 도장(道長)을 비롯하여 숙종(肅宗) 때 영남(嶺南)의 대기근을 구제하여 전설에 오르기까지 한 담명(聃命)과 함께 명문(名門) 광주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 석탄(石灘)과 암탄(巖灘) 가문(家門)

한편 고려 말에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를 역임하여 강직(剛直)한 충절(忠節)로 이름이 높았던 양중(養中)1392(태조 1)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후에 남한산(南漢山) 밑으로 퇴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자 몸소 양중을 찾아와 농주(農酒)로서 옛정을 나누며 시()를 짓기를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황제(光武皇帝)와 엄자룡의 우의를 보나 한()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하니, 양중이 답()하기를 "옛날의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對酌)이 있으리요"하니 왕도 그의 굳은 지조를 알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고, 양중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서 주부(司온署主簿)를 제수했다.

고려 말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형()인 석탄공 양중과 함께 충절을 지켰던 암탄공(巖灘公) 양몽(養蒙)은 자손(子孫)들에게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기를 유언했고, 지금의 서울시 고덕동(高德洞)은 양중과 양몽이 정의를 지켰던 고덕(高德)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명일동 소재 고지봉(高志峯) 또한 두 분의 뜻을 기려서 붙인 이름이다.

. 록생(祿生)의 손자(孫子) 청백리 지()의 가문과 율정공(栗亭公)의 후손 율정공파(栗亭公派)의 중시조(中始祖) 관의(寬義)는 청백리(淸白吏) ()공의 맏아들로 세종(世宗) 때 누차에 걸쳐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合格)하지 못하여 자신의 불운함을 느끼고 황야에 은거(隱居)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다가 후에 다시 송정(松亭) 김반(金泮)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修學)하여 학문에 정통했고, 덕행이 뛰어나 정여창(鄭汝昌)ㆍ손순효(孫舜孝)ㆍ남효온(南孝溫) 등과 같은 훌륭한 석학(碩學)을 배출시켰다.

성종(成宗) 때 와서 찬성(贊成) 손순효의 천거로 경연(經筵)에 나가 성리(性理)의 근원(根源)과 성신(星辰)의 도수(度數)를 강론(講論)하자 성종이 감탄하여 율정(栗亭)이라고 친서(親書)로 사호(賜號)하고 율봉찰방(栗峰察訪)을 제수(除授) 하였으나 노구를 핑계 삼아 사양함으로 왕이 가상히 여겨 지방 수령에게 명()하여 여생(餘生)을 보살피도록 하고 쌀과 비단을 내렸다.

율정공 관의(寬義) 맏아들 점()은 성종(成宗) 초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77(성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와 집의(執義)ㆍ사성(司成)을 역임한 후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

1503(연산군 9)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전북(全北) 부안(扶安)으로 유배 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복관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와 한성판윤(漢城判尹)ㆍ중추부사(中樞府使)에 이르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이씨는 남한에 181,3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이씨조상인물

이집(李 集) 1327(충숙왕 14) ~ 1387(우왕 13) 초명은 원령(元齡),자는 호연(浩然),호는 둔촌(遁村), 생원(生員) ()의 아들ㆍ1347(충목왕 3)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했다.

1368(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천(永川)으로 피신, 1371년 신돈이 주살(誅殺)되자 송경(松京)에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驪州) 천녕현(川寧縣)에서 독서(讀書)로 세월을 보내며「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한 질문서를 정몽주에게 보내 문사들을 경탄케 했다. 서울시 강동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광주이씨대종회(廣州李氏大宗會)1(一代)이다.

이자령(李自齡) 생원공(生員公) ()의 넷째 아들로 고려조 십운과(十韻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판서(判書)에 이르렀으며 십운과공종회(十韻科公宗會) 1(一代)이다.

이양중(李養中) ()는 자정(子精), ()는 석탄(石灘), 둔촌(遁村) 이집(李集)11촌 조카로, 고려 말기에 벼슬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 후 은거하며 절개를 지키다가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400년 태종의 즉위와 함께 검교(檢校) 한성윤(漢城尹)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양하므로 태종이 수차 방문하여 부임을 종용했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후에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석탄공종회(石灘公宗會)1(一代)이다.

이양몽(李養蒙) 호(號)는 암탄(巖灘). 고려말(高麗末)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고 형(兄) 양중(養中)과 함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抗節臣)으로 조선조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암탄공종회(岩灘公宗會)의 1대(一代)이다.

이지직(李之直) ?~1419(세종 1) 초명(初名)은 도(), ()는 백평(伯平), ()는 탄천(炭川),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학문(學問)이 고명하고 성품이 강정(剛正)하였으며 1380(우왕 6) 사마서승(司馬署丞) 문과(文科)에 아원(亞元)으로 급제, 교리(校理)ㆍ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1400(정종 2)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받았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영의정에 증직 되었다.

이지강(李之剛) 1363(공민왕 12) ~ 1427(세종 9) 자(字)는 중잠(仲潛),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아들ㆍ1382년(우왕 8)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조선 개국 후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ㆍ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1407년(태종 7) 경승부소윤(慶承府少尹)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ㆍ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ㆍ수원부사(水原府使)를지내고 1411년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충청도ㆍ전라도에 파견되었으며 1414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416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이듬해 경상도(慶尙道) 도관찰사(都觀察使)를 거쳐 형조ㆍ호조의 참판(參判)이 되었다.

1418(태종 18) 평안도 관찰사가 되고 이 해 세종 즉위 후, 호조참판 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으로 정조부사(正祖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호조판서ㆍ예조판서ㆍ의정부참찬겸대사헌(議政府參贊兼大司憲)을 지낸 뒤 1425(세종 7) 중군도총제(中軍都總制)로 사직했다.

이지유(李之柔) ()는 숙명(淑明),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의 아들. 1389(공민왕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사간(司諫)과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이장손(李長孫) ()는 맹윤(孟胤), 청백리(淸白吏) 지직(之直)의 장자(長子). 태종(太宗) 신묘(辛卯:141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30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진사(進士) 조한필(曺漢弼)이 산소자리를 보고 「이 자리는 좋아서 자손들이 연이어 과거에 오르고 현달하겠으나 다만 장자에게 흉하다」고말한 즉 아우 충희(忠僖)가 형에게 불길한 곳에 어떻게 부모를 장사 지내겠느냐고 말하니 사인은 부모를 안장하는 것이 소원이지 기타의 부족한 것은 말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그 땅에 장사지내고 독실한 효도로 슬퍼한 나머지 이듬해에 서거하니 향년 31세였다. 후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인손(李仁孫) 1395(태조 4) ~ 1463(세조 9) ()는 중윤(仲胤), ()는 풍애(楓厓), 시호(諡號)는 충희(忠僖), 참의(參議) 지직(之直)의 아들. 1411(태종 11)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14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에 발탁되고, 1434(세종 16)에 감찰(監察)을 거쳐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냈다.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453(단종 1)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정권을 쥐게 되자 호조판서에 승진,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임, 이어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1459(세조 5) 우의정에 올라 곧 치사(致仕)했다.

이예손(李禮孫) ?~1459(세조 5) ()는 계윤(季胤). 1434(세종 16) 생원(生員)으로서 문과(文科)에 급제,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이관의(李寬義) 1409(태종 9) ~ ? ()는 의지(義之), ()는 율정(栗亭).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일두(一두) 정여창(鄭汝昌) 손순효(孫舜孝) 남효온(南孝溫) 등 일류석학(碩學)들이 스승으로 섬기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이 되었으나 사퇴, 1843(성종 14) 학문에 밝은 자로서 성종에게 불려 진강(進講), 왕을 감탄케 했고 늙도록 학문을 열심히 한다 하여 포상되었다. 이천(利川)의 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율정공종회(栗亭公宗會)는 율정공의 증조부(曾祖父) 록생(祿生)1(一代)이다.

이우생(李遇生) 형조참의(刑曹參議) 양중(養中)의 아들. 조선조에 사온서 주부(司온署主簿)를 역임하였다.

이극규(李克圭) ()는 공서(公瑞). 사인(舍人) 장손(長孫)의 아들. 1471(성종 2) 문과(文科)에 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해주 수양산으로 낙향하여 지방인재들을 양성하였고, 창녕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극배(李克培) 1422(세종 4) ~ 1495(연산군 1) ()는 겸보(謙甫), ()는 우봉(牛峰)ㆍ매월당(梅月堂), 시호(諡號)는 익평(翼平),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77(세종 2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감찰(監察)ㆍ정언(正言)ㆍ병조좌랑(兵曹佐郞)ㆍ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총애를 받다가 1455년 그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고, 1457(세조 3)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라 세조가 영남지방을 순행(巡幸)하게 되자 특히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병조와 예조의 참판(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거쳐, 1459년 북변의 야인(野人)을 정벌할 때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출전하였고, 돌아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62(세조 8) 이조판서에 승진했고, 형조와 예조의 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어 병조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예종 때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1471(성종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를 겸하고 147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승진, 1481년과 1482년의 대기근(大饑饉)을 구제하고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성종 16) 우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1493년 영의정에 올라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극감(李克堪) 1427(세종 9) ~ 1468(세조 14) ()는 덕여(德與),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44(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集賢殿)에 보직되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어 다음해 강서원(講書院)이 새로 설치되자 우찬독(右贊讀)이 되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55(세조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아 즉위하자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오르고, 이 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겸하여 맡았다.

1458(세조 4)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 이듬해 좌승지(左承旨)로 있을 때 「치평요람(治平要覽)」과 「의방유취(醫方類聚)」를 수교간행(수校刊行)했으며, 도승지(都承旨)ㆍ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1461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찬진(撰進)했다.

이극증(李克增) 1431(세종 13) ~ 1494(성종 25) 자(字)는 경위(景僞), 시호(諡號)는 공장(恭長),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1년(문종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종묘녹사(宗廟綠事)가 되었다가 1456년(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군기시직장(軍器寺直長)을 거쳐 1461년 이조정랑(吏曹正郞), 1463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겸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지내고 사인(舍人)이 되었다.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고, 1468(예종즉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470(성종 1) 이조판서에 올라 국가경비(國家經費)의 식례(式例)를 찬정(撰定),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 되었으며, 호조판서ㆍ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482(성종 13) 우참찬(右參贊)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병조판서ㆍ지경연사(知經筵事)ㆍ형조판서ㆍ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1484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어 문묘(文廟)를 대대적으로 증수(增修), 1488(성종 19)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이극돈(李克墩) 1435(세종 17) ~ 1503(연산군 9) 자(字)는 사고(士高),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7년(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ㆍ응교(應敎)ㆍ필선(弼善)ㆍ집의(執義) 등을 역임했다. 146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승진, 이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470년(성종 1) 대사헌ㆍ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광원군(廣遠君)에 봉해졌다. 1473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87년(성종 18)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494년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ㆍ호조판서를 지내고 그 동안 평안(平安)ㆍ강원(江原)ㆍ전라(全羅)ㆍ경상(慶尙)ㆍ영안(永安) 5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이극균(李克均) 1437(세종 19) ~ 1504(연산군 10) 자(字)는 방형(邦衡),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으나 무술(武術)에도 뛰어남으로써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460년(세조 6) 회령도사(會寧都事), 이듬해 지평(持平)ㆍ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하고 1472년(성종 3)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1년 이조판서로 서북면(西北面)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야인(野人) 토벌에 공을 세우고,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497(연산군 3)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을 때 경상우도의 지도(地圖)를 만들어 바쳤다. 1499년 좌찬성(左贊成)ㆍ평안도 경변사(警邊使)를 지내고 1503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나, 누차 연산군의 황음(荒淫)을 바로 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인동(仁同)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이극기(李克基) 1426(세종 8) ~ 1491(성종 21) ()는 백온(伯溫), 관찰사(觀察使) 예손(禮孫)의 아들. 1446(세종 2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453(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전랑(銓郞)에 보임(補任)되었다. 이어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올라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ㆍ직제학(直提學)ㆍ지제교(知製敎) 및 삼사(三司)의 장()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승진(陞進),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전임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관提學)ㆍ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명유(名儒)로 명성을 떨쳤다.

이극견(李克堅) ()는 중고(仲固), 관찰사(觀察使) 예손(禮孫)의 둘째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성주목사(星州牧使)를 거쳐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고,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종반(縱班) 숙질(叔侄) 등이 참화(慘禍)를 당()하자 처가(妻家) 고장인 전북 옥구로 내려가 은거(隱居)하며 여생을 보냈다. 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 되었다.

이천기(李天奇) ? ~ 1516(중종 11) 석탄공(石灘公) 양중(養中)5대손으로 호가 퇴암(退菴)으로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로 있을 때 연산군(燕山君)이 간신들의 간계(奸計)에 빠져 국법을 어기고 장사고(藏史庫)를 열어 폐비사실의 내용을 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사초(史草)에 가담된 연루자를 극형(極刑)할 때(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혹독한 국문(鞠問)를 받으면서 말하기를 "나 한 사람 죽는 것은 좋으나 죄 없는 많은 대신들이 죽는 게 아깝다. 후일 누구와 더불어 국사(國事)를 하리오"하니 좌우 대신들이 극간(極諫)하여 구명(救命)되었다.

그러나 모든 벼슬을 삭탈관직 당하고 조수(曹壽), 김훤(金暄), 강학손(姜鶴孫) 4인과 같이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니, 4인은 결의형제(決議兄弟)하였다. 그 후손들은 사성연모비(四姓戀慕碑)를 세우고 선조를 회상하며 420 여 년 간 돈목하게 살고 있다.

이두신(李斗信) 십운과공(十韻科公) 자령(自齡)의 증손(曾孫)으로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으나 문신옥사(文臣獄事)에 연루되어 장흥에 귀양갔었다. 시호(諡號)는 충민(忠愍)이다.

이수철(李守哲) 1411(태종 11) ~ 1473(성종 4) 주부(主簿) 우생(遇生)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평안도(平安道) 절도부사(節度副使)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졌다.

이손(李 蓀) 1439(세종 21) ~ 1520(중종 15) ()는 자방(字芳), 시호(諡號)는 호간(胡簡), 병마절도사 수철(守哲)의 아들. 1459(세조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1470(성종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예조정랑(禮曹正郞)ㆍ김해부사(金海府使)ㆍ판결사(判決事) 등을 지냈다.

이어 충청도 와 함경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충청도ㆍ황해도ㆍ전라도의 관찰사(觀察使), 이조ㆍ예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1501(연산군 7)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어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져 우참찬(右參贊)에 승진, 궤장(궤杖)을 하사받았다.

1513(중종 8)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만년에는 영의정 류순(柳洵), 판서 안침(安琛) 등 남학(南學)의 친우들과 구로회(九老會)를 조직, 친목을 두텁게 했다.

이점(李 점) 1446(세종 28) ~ 1522(중종 17) 율정공(栗亭公) 관의(寬義)의 맏아들. 시호(諡號)는 문호(文胡). 1471년(성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내고 사간(司諫)ㆍ집의(執義)ㆍ사성(司成)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올라 1503년(연산군 9)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ㆍ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부안(扶安)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 복관(復官)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고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漢城判尹)ㆍ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이세좌(李世佐) 1445(세종 27) ~ 1504(연산군 10) 자(字)는 맹언(孟彦), 판서 극감(克堪)의 아들. 1477년(성종 8) 첨정(僉正)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이튿날 대사간에 특진, 1485년(성종 16)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다.

이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1503년 예조판서로서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여 왕이 내리는 술을 어의(御衣)에 엎지른 실수로 무안(務安)에 부처(付處), 이어 평해(平海)에 이배(移配),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이 윤비(尹妃:연산군의 생모)를 폐할 때 이를 극간하지 않았다 하여 다시 거제도(巨濟島)로 이배(移配)되던 중, 곤양군(昆陽郡) 양포역(良浦驛)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한뒤 효수(梟首) 당했다.

이은(李 誾) 1455(세조 1) ~ 1522(중종 17) ()는 자화(子和), ()는 음애(陰厓), 참판(參判) 극기(克基)의 아들. 1480(성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건릉참봉(健陵參奉)을 거쳐 봉사(奉事) 직장(直長), 주부(主簿)를 지내고 공조(工曹)ㆍ형조정랑(刑曹正郞)에 승진(陞進)되었다. 이어 첨정(僉正)과 안성(安城)ㆍ고원군수(高原郡守)를 역임하였고,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학파(新進學派)에 연좌(蓮座)되어 영광(靈光)으로 유배(流配)되어 적소(謫所)에서 여생을 마쳤다. 영광의 보촌서원(甫村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수언(李粹彦) 1457(세조 3) ~ 1496(연산군 2) 자(字)는 사미(士美), 좌찬성(左贊成) 손(蓀)의 아들. 1477년(성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48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로 기용되고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ㆍ형조좌랑(刑曹佐郞)ㆍ예조좌랑(禮曹佐郞)ㆍ지평(持平)ㆍ충청도도사(都事)ㆍ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했다.

1491년 북방에 야인(野人)이 침입하자 문무를 갖춘 자로서 발탁되어 장령(掌令)에서 사예(司藝)로 전직되고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전공을 세워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이 되었다. 1494년 집의(執義)로 있을 때 즉위한 연산군(燕山君)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가, 서계(西界)에 둔전을 설치하게 되자 교리(校理)로 기용되어 둔전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해주(海州)에서 죽었다.

이수공(李守恭) 1464(세조 10) ~ 1504(연산군 10) 자(字)는 중평(仲平), 영의정 극배(克培)의 손자, 세충(世忠)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6년(성종17) 진사(進士)가 되고, 148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장령(掌令)ㆍ응교(應敎)ㆍ전한(典翰)을 거쳐 1498년(연산군 4)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이 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창성에 유배된 뒤, 광양(光陽)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501년에 풀려나왔다.

이연경(李延慶) 1477(성종 19) ~ 1552(명종 7) ()는 장길(長吉), ()는 탄수(灘수), 시호(諡號)는 정효(貞孝),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좌(世佐)의 손자, 봉사(奉事) 수원(守元)의 아들. 1504(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되는 조부를 배소(配所)까지 따라갔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돌아왔다.

이듬해 생원(生員)이 되고, 음보(蔭補)로 선릉참봉(宣陵參奉)을 거쳐 1518년 공조ㆍ형조의 좌랑(佐郞)을 지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ㆍ교리(校理) 등을 지내다가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 파직되었다가 1545(인종 1) 폐과(廢科)되었던 현량과가 복구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약수(李若水) 1486(성종 17) ~ 1531(중종 26) ()는 지원(止源), ()는 우천(牛泉), 현감 자()의 아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동료 유생 150 여 명을 이끌고 궐내에 들어가 조광조의 설원(雪寃)을 호소하다가 의금부(義禁府)에 갇혔다. 1521(중종 16)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창성(昌盛)에 유배, 대흥(大興)에 이배(移配)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대흥(大興)의 우천사(牛泉祠)에 제향되었다.

이약빙(李若氷) 1489(성종 20) ~ 1547(명종 2) ()는 희초(熹初), ()는 준암(樽巖), ()의 아들. 성균관 유생으로 1508(중종 3) 왕이 성균관을 찾아 시험할 때 수석으로 뽑혀 「예기(禮記)」를 하사받았고, 1513(중종 8) 수석으로 생원(生員)이 되어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518(중종 18)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된 조광조(趙光祖)와 형 약수(若水)의 사면을 주청하다 삭직(削職)되고, 1537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보직, 1539년 노산군(魯山君:단종)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복성군(福成君)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또 파직되었다.

1543(중종 38) 경기도에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고, 이듬해 수원부사(水原府使)ㆍ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거쳐 1547(명종 2) 좌통례(左通禮)로 재직 중 소윤(小尹)인 윤원형(尹元蘅)ㆍ이기(李芑) 등이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 사건을 일으켜 대윤(大尹)을 제거할 때 윤임(尹任)의 인척이라 하여 사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다. 선조 때 신원(伸寃)되었다.

이약해(李若海) 1498(연산군 4) ~ 1546(명종 1) ()는 경용(景容), ()는 수암(首巖), ()의 아들. 1516(중종 11)에 진사(進士)가 되고, 153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서 1538년 탁영시(擢英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종학교수(宗學敎授)가 되었다. 1544(중종 39) 좌보덕(左輔德)을 지내고,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영접, 1545(인종 1)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이해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小尹) 윤원형(尹元형)이 정권을 잡자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좌천되고, 이 해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잔당(殘黨)으로 몰려 경원(慶源)에 안치(安置),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신원(伸寃)되고,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윤경(李潤慶) 1498(연산군 4) ~ 1562(명종 17) 자(字)는 중길(重吉), 호(號)는 숭덕재(崇德齋), 시호(諡號)는 정헌(正獻), 수찬(修撰) 수정(守貞)의 아들.

1504년 아버지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자 전 가족이 원지(遠地)에 유배,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서울에 올라와 1531(중종 26) 진사(進士)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된 후 저작(著作)ㆍ수찬(修撰)ㆍ교리(校理)를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어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거쳐, 1545(명종 즉위)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의 복설(復說)을 청했고,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으나, 아들 중열(中悅)이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자 관작(官爵)이삭탈(削奪)되었다가 1550년 용서되어 승지(承旨)를 지내고, 이해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라는 무고로 문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

1553년 등용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보직, 이듬해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고,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관찰사의 명으로 영암(靈巖)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구(倭寇)의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전라도 관찰사에 승진했다. 그 후 도승지(都承旨)ㆍ병조판서를 지내고,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 중 병사했다.

이준경(李浚慶) 1499(연산군 5) ~ 1572(선조 5) ()는 원길(原吉), ()는 동고(東皐)ㆍ남당(南堂)ㆍ양와(養窩)ㆍ홍련거사(紅蓮居士), 시호(諡號)는 충정(忠正), 부수찬(副修撰) 수정(守貞)의 아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화를 입은 조부와 부친에 연좌하여 형 윤경(潤慶)과 같이 괴산(傀山)에 유배(流配)되었으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온 뒤 신승연(申承演)ㆍ황효헌(黃孝獻)에게 수학, 1522(중종 17) 생원(生員)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에 등용되었다가 1533년 사경(司經)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피죄인(被罪人)의 무죄를 논()했다가 김안로(金安老) 등의 미움을 사서 파직,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응교(應敎)ㆍ보덕(報德)ㆍ승지(承旨) 등을 거쳐 직제학(直提學)ㆍ부제학(副提學), 1543년 문신정시(文臣廷試)에 장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오르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이듬해 중종이 죽고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이 되었고, 1545(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1548년 병조판서ㆍ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550년 대사헌이 되었다.

앞서 병조 판서 때 이기(李기)가 뇌물을 받고 구관자(求官者)의 이름을 적어 보내어 등용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했던 일로 그 일당인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으로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이기(李기)가 파직되자 석방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553년 함경도 지방에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자 함경도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했다. 1555년 호남지방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자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출정, 이를 격퇴하고 돌아와 우찬성(右贊成) 겸 병조판서가 되고,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명종 20)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명종이 죽자 교지를 받들어 선조를 영립(迎立)하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사를 다스리며, 신진사류(新進士類)와 기성사림 사이의 알력을 조정하려다가 신진사류의 정적(政敵)이 되어 기대승(奇大升) 등의 공격을 받았다.

1571(선조 4) 영의정을 사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죽을 때 붕당(朋黨)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려 이이(李珥)3()의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 선조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청안(靑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영현(李英賢) 1507(중종 2) ~ 1572(선조 5) ()는 희성(希聖). 1537(중종 3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1540년 박사(博士)ㆍ부수찬(副修撰)ㆍ정언(正言) 등을 지내고, 1543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시독관(試讀官)ㆍ교리(校理)를 거쳐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승진, 1545(인종 1) 「중종실록(中宗實錄)」편수관(編修官)을 겸직했고, 장령(掌令)ㆍ응교(應敎)ㆍ사간(司諫)을 지냈다. 1547(명종 2) 큰 기근이 들자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황해도 지방의 구제사업을 독려했고, 전라도에 내려가 구휼사업을 태만히 한 관리들을 적발했다.

이어 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直提學)ㆍ상호군(上護軍)ㆍ종부시정(宗簿寺正)ㆍ이조참의(吏曹參議)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역임, 1562년 청홍도(淸洪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1567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전직,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을 지휘했고, 1571년 한성부좌윤(副修撰左尹)이 되었다.

이홍남(李洪男) 1515(중종 10) ~ 1572(선조 5) ()는 사중(士重), ()는 급고자(汲古子), 약빙(若氷)의 아들. 1538(중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1546(명종1)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듬해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사사(賜死)된 아버지와 연좌,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장단부사(長湍府使)1561년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이홍윤(李洪胤) 문경공(文景公) 극감(克堪)의 현손(玄孫)이며 준암(樽巖) 약빙(若氷)의 둘째 아들, 영의정(領議政) 윤임(尹任:仁宗의 外叔)의 사위이다. 진사로서 문학이 뛰어나 공에게 수학하는 선비가 많았었다.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尹元형:明宗의 外叔), 이기(李기) 등이 홍윤(洪胤)이 윤임의 사위라는 것을 트집잡아 죽일 무렵 명종 정미(丁未 1547)년에 소윤측(小尹側)에게 홍윤이 모역(謀逆)한다고 무고(誣告)하여 명종(明宗) 기유(己酉:1549)년에 가족과 문인(門人) 40 여 명이 같은 날 죽임을 당하였다. 공과 조금만 관련이 있다는 혐의만 있어도 조사나 문초도 없이 죽여 충주(忠州) 일경이 가루가 되고 충주군명(郡名)까지도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시키었다. 동고준경(東皐浚慶)까지도 이 사건에 관련시켜 보은(報恩)으로 귀양을 보내었다.

이중경(李重慶) 1517(중종 12) ~ 1567(선조 즉위) 자(字)는 숙선(叔善), 영부(英符)의 아들. 1546년(명종 1)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 1548년 검열(檢閱), 이듬해 정언(正言)ㆍ부수찬(副修撰)을 역임, 1550년 수찬(修撰)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고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52년 헌납(獻納)에 승진, 장령(掌令)ㆍ사인(舍人) ㆍ응교(應敎)를 지냈다. 1559년 직제학(直提學)에 승진, 이듬해 대사간, 1561년 예조참의(禮曹參議)ㆍ부제학(副提學) 1563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을 겸했으나 당시의 권신 이양이 유배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파직, 1565년 풀려 나와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튿날 다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중열(李中悅) 1518(중종 13)~1547(명종 2) ()는 습지(習之), ()는 과재(果齋), 병조판서 윤경(潤慶)의 아들. 1539(중종 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1545(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이휘(李輝)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 갑산(甲山)에 유배되고, 1547년 사사(賜死)되었다. 학문이 뛰어나 이황에게 크게 촉망을 받았고, 류희춘(柳希春)ㆍ노수신(盧守愼) 등 학자와 교유가 깊었다. 선조 때 신원(伸寃)되었다.

이덕열(李德悅) 1534(중종 29) ~ 1599(선조 32) 자(字)는 득지(得之), 호(號)는 양호당(養浩堂), 동고(東皐)의 셋째 아들이다. 퇴계(退溪)를 스승으로 섬기어 궁리(窮理)에 정력을 다하여 나갔으며 덕 이루는 것을 근본으로 하며 문학과 재기(才器)와 도량이 세상에 드러났다. 명종 정묘(1567)년에 진사에 급제, 선조 기사(1569)년에 문과에 올라 옥당 검상사인을 거쳐 도승지에 이으렀다. 겸직제학(兼直提學) 임진난에 용만관(龍灣館)에 호가(扈駕) 하였고 광국공신(光國功臣)의 훈을 받았다. 1599년 동지의금(同知義禁)으로 승진되어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출장명령을 받았으나 출발하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이정립(李廷立) 1556(명종 11) ~ 1595(선조 28) 자(字)는 자정(子政), 호(號)는 계은(溪隱), 시호(諡號)는 문희(文僖), 판결사(判決事) 시무(時茂)의 아들. 이이(李珥)의 문인.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82년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대제학(大提學) 이이(李珥)에게 추천되어 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시강(侍講),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좌랑(吏曹佐郞)ㆍ형조참의(刑曹參議)ㆍ좌승지(左承旨) 등을 역임, 1589(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왕을 호종(扈從), 평양(平壤)에 이르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승진했다. 1594년 한성부좌윤(漢城府佐尹)ㆍ황해도 관찰사를 역임,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고, 1595(선조 28)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이광악(李光岳) 1557(명종 12) ~ 1608(선조 41) 자(字)는 진지(鎭之),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군수(郡守) 호약(好約)의 아들. 1584년(선조 17)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92년 곤양(昆陽) 군수(郡守)가 되었다.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 지방에서 선봉에 나서서 왜군과 격전, 적이 진주를 포위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으로 진주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좌익장(左翼將)으로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4년 곽재우(郭再祐)의 부장(副將)으로 동래 전투에 종군했고, 이후 1백여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돋구었다. 159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錦山)ㆍ함양(咸陽)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백 여 명과 우마 60여 필을 탈환했다.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을 거쳐 1604(선조 37) 경기방어사(京畿防禦使)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남군(廣南君)에 봉해졌다.

이이첨(李爾瞻) 1560(명종 15) ~ 1623(인조 1) ()는 득여(得輿), ()는 관송(觀松)ㆍ쌍리(雙里), 좌찬성(左贊成) 극돈(克墩)의 후손, 우선(友善)의 아들. 1582(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3년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내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99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고, 160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壯元)했다. 이때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大北)ㆍ소북(小北)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光海君)의 옹립을 주장하고 정인홍(鄭仁弘)과 모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받드는 류영경(柳永慶) 등 소북을 논박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甲山)에 유배당하게 되었으나, 이해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일약 예조판서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덕형(李德馨) 1561(명종 16) ~ 1613(광해군 5)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한음(漢蔭)ㆍ쌍송(雙松)ㆍ포옹산인(抱擁散人),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민성(民聖)의 아들. 좌의정(左議政) 극균(克均)의 오대손(五代孫).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 때 율곡이 다섯 명을 천거하였는데 이 중 같은 해에 급제한 이항복(李恒福) 이정립(李廷立)과 함께 세 분을 삼학사라 하였다. 이듬해 박사가 되고,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이조좌랑(吏曹佐郞)ㆍ대사간ㆍ대사성(大司成)을 역임, 159231세로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고,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ㆍ야니가와(柳川調信) 등과 화전(和戰)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했다.

그후 왕을 호종(扈從), 정주(定洲)에 이르러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원병을 요청, 지원군 파견에 성공했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오르게 되고, 명나라 원병이 들어오자 명장(名將)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전쟁 중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1593년 병조판서에 승진, 이듬해 이조판서로 전직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堂上)을 겸임. 1595년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 등 4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지냈으며, 159838세로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 도제조(都提調)를 겸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는 한편, 대마도(對馬島)의 정벌을 건의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 1606년 한 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한직(閒職)에 밀려났다가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에 복직, 1613(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 양근(陽根)에 내려가 죽었다.

남인(南人) 출신으로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어, 남ㆍ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복귀했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글씨에 뛰어났다. 인조 때 복관(復官)되었고, 포천(抱川)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尙州)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윤우(李潤雨) 1569(선조 2) ~ 1634(인조 12) ()는 무백(茂伯), ()는 석담(石潭),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의 후손, 희복(熙福)의 아들. 정구(鄭逑)의 문인. 성주(星州) 출신. 1591(선조 24) 진사(進士)가 되고, 1606(선조 3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광해군 즉위 초 주서(注書)를 지냈다.

1601(광해군 2)에 검열(檢閱)로서 설서(設書)를 겸임, 이어 사관(史官)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필(直筆)했다가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그뒤 예문관의 대교(待敎)ㆍ봉교(奉敎)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거쳐 1613년 경성(鏡城) 판관(判官)을 역임, 대북(大北)의 전횡(專橫)이 심해지자 사직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어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ㆍ사간(司諫)ㆍ사성(司成)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흥립(李興立) 1582(선조 15)~1624(인조 2) 무과(武科)에 급제, 1623년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김류(金류)ㆍ이귀(李貴) 등의 인조반정(仁祖反正) 모의에 가담하여 반정군(反正君)이 창덕궁(昌德宮)을 습격하자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사를 이끌고 이에 대응, 광해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반정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나,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수원부사(水原府使)겸 경기방어사(京畿防禦使)로 적에게 투항했다가 난이 평정된 후 자결했다. 후에 경립(景立)으로 개명(改名)하였다.

이필영(李必榮) 1573(선조 6) ~ 1645(인조 23) ()는 이빈(而賓), ()는 만회(晩晦), 영의정 준경(浚慶)의 증손. 시정(寺正) 사수(士修)의 아들. 1597(선조 3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ㆍ사서(司書)ㆍ병조좌랑(兵曹佐郞)ㆍ수찬(修撰)ㆍ지평(持平)ㆍ문학(文學)ㆍ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1605(선조 38) 함경도어사(咸鏡道御史), 이어 상의원정(尙衣院正)ㆍ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1608(광해군 즉위) 장령(掌令), 1610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대사간(大司諫)으로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612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1618년 한남군(漢南君)을 습봉(襲封), 우참찬(右參贊)ㆍ특진관(特進官)을 지냈다.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다시 황해도 관찰사, 1641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1644년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이듬해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상안(李尙安) 1575(선조 8) ~ 1627(인조 5) ()는 정이(靜而),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1603(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광해군 때 곡산(谷山)ㆍ가산(嘉山) 등지의 군수(郡守)를 거쳐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의 별장(別將)으로 안주(安州)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우찬성(右贊成)에 추증(追贈),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지하(李祉遐) 1601(선조 34) ~ 1681(숙종 7) ()는 자수(子綏), 부사(府使) 효훈(孝訓)의 아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 15세 때 향시(鄕試), 1633(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특임(特任), 군수(郡守)에 이르러 81세로 죽었다.

이도장(李道長) 1603(선조 36) ~ 1644(인조 22) 자(字)는 태시(胎屎), 호(號)는 낙촌(洛村), 공조참의(工曹參議) 윤우(潤雨)의 아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630년(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권지정자(權知正字)에 등용되고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ㆍ주서(注書) 등을 역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했다.

이듬해 검열(檢閱)에 이어 지평(持平)에 올랐으며, 그후 교리(校理)ㆍ이조좌랑(吏曹佐郞)ㆍ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이르렀다.

이원정(李元禎) 1622(광해군 14) ~ 1680(숙종 6) 자(字)는 사징(士徵), 호(號)는 귀암(歸巖),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도장(道長)의 아들.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2년(효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검열(檢閱)ㆍ교리(校理)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東來府使)가 되었다.

167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1673년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1677(숙종 3) 대사간(大司諫), 이해 형조판서를 지냈다. 1680년 이조판서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초산(楚山)에 유배되었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도빈(李道彬) 1627(인조 5) ~ 1670(현종 11) 자(字)는 욱재(郁哉), 극견(克堅)의 6대손으로 1648년(인조 26)에 무과(武科) 급제(及第)하여 효종(孝宗) 때 이완(李浣)과 구인기(具仁旣)와 더불어 전재(專才)로 뽑히어서 세칭 3무신(三武臣)이라고 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영변(寧邊)에 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평안도(平安道) 병사(兵使)를 역임하였으며 관직이 통제사(統制使)에 이르렀다.

이원록(李元祿) 1629(인조 7) ~ 1688(숙종 14) ()는 사흥(士興), ()는 박곡(朴谷)이며 허미수(許眉수)를 스승으로 섬기고 효종 신묘(1651)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현종(顯宗) 계묘(癸卯 1663)년 식년시(式年試)에 을과(乙科) 장원(壯元)으로 문과(文科)하여 전적(典籍) 및 형조 및 공조정랑, 의주부윤, 호조 및 병조참의 좌우승지, 경상 및 함경관찰사, 예조 및 호조참판, 한성우윤, 대사간을 역임하고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연정(李延禎) 1629(인조 7) ~ 1678(숙종 4) ()는 군원(君遠), 극견(克堅)7대손으로 1654(효종 5)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유고(遺稿) 1권이 있다.

이시만(李蓍晩) 1641(인조 19) ~ 1708(숙종 34) 자(字)는 정응(定應), 호는 동애(東厓)이며 극감(克堪)의 8대손으로 현종 경자(1660)년에 생원이 되고 숙종(肅宗) 무오(戊午 1678)년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삼사(三司)를 거쳐 1689년(숙종 15)에 승지(承旨)가 되어 왕에게 간(諫)함이 간절하니 궁중에 곧은 소리가 있었다. 호서(湖西)와 관북(關北) 두 지방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대사간과 승지를 거쳐 가선대부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유고(遺稿)가 있다.

이담명(李聃命) 1646(인조 24) ~ 1701(숙종 27) 자(字)는 이로(耳老), 호(號)는 정재(靜齋), 이조판서 원정(元禎)의 아들. 1666년(현종 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7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6년간 성균관(成均館) 벼슬로 지내다가 1675년(숙종 1) 수찬(修撰)에 등용되었다.

교리(校理)ㆍ대사간ㆍ병조참의(兵曹參議)ㆍ홍주목사(洪州牧使)를 거쳐 1679년 승지(承旨)로서 홍우원(洪宇遠)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관직이 삭탈(削奪)되고 유배되었다가 1662년 석방, 복관(復官)되었다. 전라도 관찰사ㆍ대사간(大司諫)ㆍ부제학(副提學)ㆍ공조참판(工曹參判)ㆍ대사헌ㆍ경상도 관찰사ㆍ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또 원배(遠配), 1699년 풀려 나왔다.

이우항(李宇恒) 1648(인조 26) ~ 1722(경종 2) 자(字)는 여구(汝久), 시호(諡號)는 경무(景武),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도빈(道彬)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사과(司果)를 지내고 1698년(숙종 24)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1701년 총융사(摠戎使), 이어 포도대장(捕盜大將)ㆍ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 1721년(경종 1)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이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소론(少論)의 탄핵을 받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 이듬해 백망(白望)ㆍ이희지(李喜之) 등과 함께 모역(謀逆)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투옥, 신임사화 3장신(三將臣)의 한 사람으로 불렸으며 1724(영조 즉위) 신원(伸寃)되었다.

이의만(李宜晩) 1650(효종 1) ~ 1736(영조 12) ()는 선응(善應), ()는 농은(農隱), 문경공 극감(克堪)8대손으로 숙종(肅宗) 기미(己未 1679)년에 생원이 되고 춘방(春坊) 삼사(三司)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고 호서와 관북 두 지방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靑白)으로 특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백리(淸白吏)로 록선되고 정정공(靖貞公)으로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이윤수(李允修) 1653(효종 4) ~ 1693(숙종 19) ()는 면숙(勉叔), ()는 풍애(楓崖), 좌의정(左議政) 극균(克均)8대손으로 숙종(肅宗) 기미년(己未1677)에 진사(進士)가 되고 168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 검상(檢詳) 사인(舍人)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1689년 모후출궁(母后出宮)을 극간함으로 그의 충직함을 인정받아 황해도 관찰사를 제수받았다. 유고 1권이 있다.

이상성(李相成) 1663(현종 4) ~ 1723(경종 3) ()는 원경(元卿), 극돈(克墩)7대손으로 어렸을 적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숙종(肅宗) 정축년(丁丑年 1693)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으며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장남(光運) 또한 문과 급제하여 좌부승지(副承旨)를 지냈는데 역시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이하원(李夏源) 1664(현종 5) ~ 1747(영조 23) ()는 원례(元禮), ()는 예남(蘂南)ㆍ정졸재(貞拙齋), 도승지(都承旨) 시만(蓍晩)의 아들. 1691(숙종 17) 생원(生員)이 되고, 169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05년 장령(掌令)을 거쳐 1712년 교리(校理)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했다.

경종 때의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내고, 1725(영조 1) 동지부사(冬至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이 되었다. 1734년 대사간을 지낸 뒤 다시 대사헌을 거쳐 1743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여러 번 대사헌을 지내다가 1746년 공ㆍ예조판서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학문에 밝았고 영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이헌(李瀗) 1677(숙종 3) ~ 1722(경종 2) 좌통례 극견(克堅)8대손으로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벼슬이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에 이르렀으나 경종 2년에 무옥(誣獄)으로 체포되어 극형을 당하였다. 영조(英祖) 을사(乙巳 1725)년에 신설복관(伸雪復官)되었다가 1727년에 반안추탈(反案追奪)되었다가 1741년에 다시 신원복관되었다.

이기덕(李基德) 1701(숙종 27) ~ 1769(영조 45) 자(자)는 경이(景履), 호(號)는 시림(市林), 문경공 극감(克堪)의 12대손으로 경종(景宗) 계묘(癸卯 1723)년에 생원, 진사 양과 모두 합격하고 1740년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한림(翰林)을 역임하고 1766년에 중시(重試)에 아원(亞元)하였다. 관(官)은 이조참의(吏曹參議)와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이광현(李光鉉) 1732(영조 8) ~ 1797(정조 21) ()는 백겸(伯謙), 한원군(漢原君) 수철(守哲)의 후손. 1761(영조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1762(영조 38) 장헌세자(壯獻世子)가 사사(賜死)될 때 가주서(假注書)로 있으면서 그의 구명에 힘쓰다 쫓겨났다. 1899(광무 3)에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만운(李萬運) 1736(영조 12) ~ 1792(정조 16) 자(字) 희원(希元), 호(號)는 묵헌(默軒), 원정(元禎)의 5대손. 1777년(정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乙科)로 급제, 벼슬은 지평(持平)에 그쳤다. 박학(博學)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천문(天文)ㆍ역산(曆算)ㆍ지리(地理)ㆍ명물(名物)에 이르기까지 모두 밝았다.

1782(정조 6) 앞서 1770(영조 46) 홍봉한(洪鳳漢) 등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보정(補正)하라는 왕명을 받고, 9년 간에 걸쳐 그 잘못을 고치고 탈락된 사항을 첨가한 뒤 새로이 칠고(七考)를 첨가하여 편찬을 완료,「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하였으나 간행되지 못하고, 1903(광무 7)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 하여 간행을 보아 국학(國學) 연구에 큰 지침이 되고 있다.

이기양(李基讓) 1744(영조 20) ~ 1802(순조 2) ()는 사흥(士興), ()는 복암(伏菴), 덕형(德馨)7대손. 1774(영조 50)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합격, 영릉참봉(英陵參奉)이 되고, 1795(정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이어 검상(檢詳)ㆍ승지(承旨)를 역임하고, 1798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서 청나라에 갔다. 이 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은밀히 신봉했으며, 돌아와 실학자 이가환(李家煥) 등과 사귀며 서학(西學)을 강론, 나라의 혁신을 위해 서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병조참판(兵曹參判)ㆍ우승지(右承旨)ㆍ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801(순조 1) 대사간에 전임, 예조참판ㆍ좌승지를 지냈다. 이해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단천(端川)에 유배되었다가 죽은 후 신원(伸寃), 복관(復官)되었다.

이의익(李宜翼) 1794(정조 18) ~ 1873(고종 10) ()는 문약(文若), ()는 자암(紫巖).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 일곱 고을의 군수(郡守)를 역임하고 헌종(憲宗) 무신(戊申 1884)년에 여주목사(驪州牧使)로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즉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특별히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제수받았고 경술(庚戌 1850)년에 동래부사(東來府使)로 옮겼다가 신해(辛亥 1851)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발탁(拔擢)되었다. 강화유수(江華留守)를 지냈으며 이ㆍ예ㆍ형ㆍ공ㆍ조(吏禮刑工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세 차례나 한성부윤을 맡았다.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와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를 지내고 보국숭록대부(補國崇祿大夫)로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

이봉덕(李鳳德) 1818(순조 18) ~ 1876(고종 13) ()는 순서(舜瑞), 좌의정 극균(克均)13대손으로 갑진(甲辰 1844)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함안군수(咸安郡守) 도원부사(都原府使) 좌승지(左承旨), 전라병사(全羅兵使) 진무중군(鎭武中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발탁되었다. 1871년에 중군장(中軍將)으로 미국 아세아 함대의 강화도 침입을 맞아 양선을 공격하니 그들이 많이 죽었다. 그의 포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의금중추(義禁中樞) 한성부윤(漢城府尹) 훈중포장(訓中捕將) 동의금총융(同義禁摠戎) 중군훈련정(訓鍊正)을 역임하였다.

이용복(李容復) 1841(헌종 7) ~ 1918(융희 9) ()는 군삼(君三), 문경공 극감(克堪)16대손으로 1867년에 무과(武科)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 남해현령(南海縣令) 영종첨사(永宗僉使)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병사(忠淸兵使)에 이르렀다.

이용관(李容觀) 1844(헌종 10) ~ 1919(융희 10) ()는 계광(季光), 문경공(文景公) 극감(克堪)16대손으로 1866년 무과(武科) 급제(及第)하여 공사관(公事官) 선전관(宣傳官)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 강령(康翎)ㆍ언양(彦陽) 현감(縣監)을 역임한 다음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황해병사(黃海兵使) 육군보병참령(陸軍步兵參領) 1900년에 북청안무사(北靑按撫使) 1904년에 평안북도 관찰사겸안무사, 총위장위경리삼영병방금군별장(摠衛壯衛경理三營兵房禁軍別將)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한성좌윤(漢城左尹) 동지의금(同知義禁)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을 역임하셨다.

이채연(李采淵) 1861(철종 12) ~ 1900(고종광무4) 좌통례 극견(克堅)의 14대손으로 1886년에 진사(進士)가 되어 제상원(濟象院) 주사(主事)를 역임하고 1887년에 미국(美國) 공사서(公使署) 번역관(飜譯官)이 되고 6품으로 주차(駐箚) 미국(美國) 서기관(書記官)이 되고 1893년 선공감별제(繕工監別提)를 제수(除授)받고 이어서 단성현감(丹城縣監)이 되고 전우국방변(電郵局幇辯)을 겸하였고 1894년 갑오(甲午)에 문과(文科)급제(及第)하여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공조참의(工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하동부사(河東府使)가 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로 옮겨지고 1895년 종2품(從二品)에 올라 경기관찰사가 되고 농상부협판(農商部協判)으로 옮겼으며 1896년에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判)을 역임하고 1897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올라 교전소지사(校典所知事)를 하고 정이품(正二品)에 올랐으며 1898년에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을 지내고 1899년에 아문부총재(衙門副摠裁)와 시종원경(侍從院卿), 귀족원경(貴族院卿)을 전후 9차례나 배명받았다.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다가 졸(卒)하였다.

 

독립유공자 (獨立有功者)

이이익(李以翊) (左通禮公 克堅의 十三代孫) ()는 맹기(孟棋), ()는 만산(晩山), 현감공(縣監公) 인부(仁符)11대손(十一代孫)이며 유학자(儒學者)로서 기미삼일운동(己未三一運動) 당시 파리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호소(呼訴)하는 장서문(長書文)을 제출(提出)할 때 유림대표(儒林代表) 137人의 한 사람이다. 김창숙(金昌淑)ㆍ이중업(李中業)ㆍ곽대연(郭大淵)ㆍ김정호(金丁鎬)ㆍ한상도(韓相道) 등은 상의하여 유림단(儒林團)을 조직하고 가장 인망(人望)이 높은 사람이 주재(主宰)하여 총궐기(總厥起)할 것을 숙의(熟議)한 끝에 구한말(舊韓末) 의정참찬(議政參贊)을 지낸 곽종석(郭鍾錫)을 선두로 독립을 호소할 것을 결의하고 김창숙이 거창(居昌)으로 내려가 곽참찬을 만나 뜻을 전하니 곽참찬은 노부(老夫)가 사소(死所)를 얻었다며 쾌락(快諾)하므로 김창숙은 십여일 동안 각지를 순회하여 장서(長書)에 서명을 받아 상해(上海)로 가서 파리로 가려다가 가지 못하고 영문으로 번역하여 파리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영ㆍ중ㆍ한문으로 번역, 오천 장을 인쇄하여 각국대표와 중국 각 언론기관과 국내 각 신문사에 배부하였다. 그 후 왜경(倭警)은 일삼칠인(一三七人)을 체포하여 대부분 대구 감옥에 수옥(收獄)시키고 김복한(金福漢)은 전주 감옥에 수감하였으며 노령으로 병세가 심한 사람과 같이 공()은 일찍 출옥(出獄)하였다. 광복(光復) 후 서울 장충단(奬忠壇) 공원(公園)에 파리장서기념비(巴里長書記念碑)가 세워졌으며 이 비()에는 곽종석ㆍ김복한ㆍ이이익 등 일삼칠인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출전 : 삼ㆍ일독립운동사)

이지강승연(李芝岡昇淵) (左通禮公 克堅 十四代孫) ()는 응오(應五), ()는 지강(之剛). 신유(辛酉 1861)年 十月 四日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칠곡면(漆谷面) 자지리(紫芝里)에서 출생하니 천성(天性)이 영우(英遇)하고 재기(才氣)가 출중하여 15세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通達)하였다. 그 후 더욱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여 세전(世傳)의 유학(儒學)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고루 읽었고 천문, 지리, 의학, 복서(卜筮)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精通)하여 당시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도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청하여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논의하고 걱정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관찰사 이용직(李容直)은 공()을 조정(朝廷)에 천거(薦擧)하였으나 그는 고사(固辭)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910년 민족의 치욕인 합방조약(合邦條約)이 있은 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매국노(賣國奴)를 성토(聲討)하였다. 1913년 그는 구국책(救國策)을 모색한 나머지 동지(同志) 황종언(黃鍾彦-新義州)ㆍ박경종(朴慶鍾-盈德)ㆍ이승화(李承和-衡國(安東))ㆍ이헌교(李憲敎-英陽)ㆍ이종태(李鍾泰-忠南燕岐) 등과 연락하여 만주(滿洲)에서의 독립군(獨立軍) 양성(養成) 자금(資金) 이십만원의 모금운동을 펴기로 합모(合謀)하고 경기, 충남, 경상도 등지의 동지들에게 전달하고 모금활동을 하던 중 왜경(倭警)에 탐지(探知) 여러 동지들과 체포되어 갖은 고문당한 끝에 일년형을 받고 서대문(西大門) 형무소(刑務所)에서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1933326일 그는 조국광복을 염원하면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73세이었다. 방은(放隱) 성락훈(成樂薰)이 지은 그의 묘비명에 이르기를「효행(孝行)에 있어서는 소남(邵南)과 같고 역학(易學)에 있어서는 강절(康節)과 같도다. 나라를 위해 한 번 탈기(奪起)하자 그 의기(義氣)가 드높더라. 나라는 이제 광복(光復)이 되었으니 선생(先生)도 지하(地下)에서 기뻐하시리. 이 곳을 지나가는 모든 길손이여, 선생의 묘전(墓前)에서 옷깃을 여밀지어다」하였다.

(소남지행(邵南之行)ㆍ강절지학(康節之學)ㆍ위국일탈(爲國一奪)ㆍ의기지탁(義氣之卓)ㆍ국경복의(國竟復矣)ㆍ공소구원(公笑九原)ㆍ범백과자(凡百過者)ㆍ식차묘문(式此墓門) (출전 충북판 독립운동실록)

이병찬(李秉燦) (廣原君 克墩의 十四代孫, 正會의 子) 호(號)는 우재(愚齋)이며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 후 전남 보성군 복내면사무소 회계원이 되어 징수한 세금 이천원을 강도당한 것으로 위장보고하고 그 금액을 박문용(朴文鎔)과 모의(謀議)하여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헌납(獻納)하였다. 을묘(乙卯 1915)년에 임시정부와 연락, 민족전선(民族戰線) 전라도지부장(全羅道支部長)으로 중책(重責)을 맡고 도내각군(道內各郡)을 순회 활동 중 왜경에 피체(被逮)되어 공주(公州)형무소(刑務所)에서 7년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이병택(李秉澤) (廣原君 克墩의 十四代孫) ()는 공준(公俊), ()는 운암(雲唵)이며 기미(己未 1915)년 삼일운동 당시 충북(忠北) 중원군(中原郡)을 포점(抛點)으로 각지를 다니면서 만세시위운동(萬歲示威運動)을 지휘(指揮)하다가 일경(日警)에 피체(被逮)되어 대구(大邱), 부산(釜山) 등 감옥에서 옥고(獄苦)를 마치고 192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선동대원(煽動隊員)으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계속하였다.

이백래(李白來) 초명(初名)은 웅래(雄來), ()는 윤선(允善), ()는 성재(省齋)이며 광원군(廣原君) () 극돈(克墩)15대손(代孫)으로 보성읍(寶城邑) 우산리(牛山里)에서 철종(哲宗) 임술(壬戌 1862)814일 병규(秉奎)의 차자(次子)로 출생하였다. 소년시절에 종숙(從叔) 병응(秉應)의 문하(門下)에서 경서(經書)를 수학(修學)하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을 사사(師事)하였으며 서울로 와서 만민공동회의(萬民共同會議)에도 참가하였다. 소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후에 동지(同志)와 같이 오적암살(五賊暗殺)의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결행미수(決行未遂)로 끝났다. 정미(丁未 1907)4월에 호남창의도대장(湖南倡義都大將)으로서 능주(綾州), 화순(和順), 동복(同福) 등지를 접수(接受)하고 광주(光州)로 진군(進軍) 중 왜적(倭賊)에게 피체(被逮)되어 八十八人 중 한 사람으로 십 년의 유형(流刑)을 받고 정배(定配) 중 순종(純宗) 즉위(卽位)로 은사해금(恩赦解禁)을 받고 1908년에 數十次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하던 끝에 1909517일 왜적(倭賊)에게 피체(被逮)되어 동월(同月) 20일 왜진(倭陳) 중에서 애석히도 순국(殉國)하였다. (出典-皇城新聞, 湖南節義史 等)

이동하(李東下) (文景公 克堪의 十五代孫) 원명(原名)은 정래(淨來)이며 병일(秉一)의 삼남(三男)으로 철종(哲宗) 병진(丙辰 1856)104일 경북 문경군(聞慶郡) 동로면(東魯面) 명전리(鳴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 의병장(義兵將) 이강년(李康年) 밑에서 참모장(參謀長), 군자장(軍資長) 등을 역임(歷任)하고 신해(辛亥 1911)년 이후 풍기(豊基)의 노병식(盧炳植)과 군자금(軍資金)모금에 활동하다가 문도(問島)로 망명(亡命)하였다. 1914년에 국내로 돌아와 이듬해에 제천(提川) 이은영(李殷榮)ㆍ청양(靑陽) 이세영(李世榮 在問島)과 비밀결사(秘密結社)인 민단조합(民團組合)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獨立運動資金)을 모금하고 문경군(聞慶郡) 동노면(東魯面) 석항리(石項里) 김락문金洛文), 이식재(李湜宰) 등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맹(加盟)시키고 비밀활동을 계속하다가 기미(己未 1919)61일 세상을 뜨시니 향년(享年) 63세이었다. 아들은 용태(容泰)이다. (出典 慶北道史)

이용태(李容兌) (廣陵府院君 克培의 十六代孫) 고종(高宗) 경인(庚寅 1890)년에 813일 충북(忠北) 제천군(提川郡) 봉양면(鳳陽面) 원박리(院朴里)에서 출생하였다. 상해(上海)에 망명(亡命)활동(活動)하던 弟 용준(容俊)의 兄으로 면직원(面職員)으로 있으면서 19333월 弟 용준(容俊)으로부터 국내 운동 비밀 연락을 받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910월 만주(滿洲)동경성(東京城) 대종교총사(大倧敎總司)에서 尹世復 敎主와 敎正一部를 전담(全擔)하여 표면상(表面上) 종교(宗敎)활동을 가장(假裝)하고 그 실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21226일 대종교(大倧敎) 간부(幹部) 25명과 같이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어(대종교임오교변(大倧敎壬午敎變)이라함) 8년형을 받고 모단강(牡丹江) 액하감옥(液河監獄)에서 服役 중 39개월만에 조국해방(祖國解放)으로 출감(出監)되었다. 귀국 후 서울 대종교(大倧敎) 총본사(總本司)의 중직(重職)을 역임(歷任)하다가 1966815일 세상을 뜨시니 향년(享年) 75세였다. 19771213일자 건국공로자(建國功勞者)로 표창장(表彰狀)을 받았다.

이용준(李容俊) (廣陵府院君 克培의 十六代孫) 19333월 천진총영사(天津總領事) 천항(天恒)에게 폭탄을 투척(投擲)하고 광복운동(光復運動)의 비밀결사를 조직하다가 19391월 사대문감옥(四大門監獄)과 신의주감옥(新義州監獄)에서 5년 형기(刑期)를 마치고 출옥하였다. 19771213일자 건국유공자(建國有功者)로 표창장을 받았다.

이수각(李壽珏) (左通禮公 克堅의 十七代孫) ()는 이주(李周), ()는 긍재(兢齋) 박곡원록공(朴谷元祿公)의 十代孫으로 고종(高宗) 경진(庚辰1880)1120일생이며 공은 한학(漢學)에 깊었으며 특히 국사(國史)와 지리(地理)에도 밝았다. 31세때는 훈도(訓導)가 되어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이바지하다가 뜻한 바 있어 1917년에 진주(晋州)로 내려가 출판인쇄소를 설립하고 오적신(五賊臣)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노(賣國奴)를 규탄하는 저서(著書)를 발간하여 각지에 배부하였다. 찾아오는 동지들과 뜻을 모아 서울, 진주, 천안 등지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던 중 왜경에 피체(被逮)되어 동지 십여명과 같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공주감옥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815광복을 맞아 남북평화통일론(南北平和統一論)을 제창(提唱)하다가 1952년 향년 73세로 세상을 뜨셨다.

이일몽수택(李一夢壽澤)(左通禮公 克堅의 十七代孫) ()는 덕윤(德潤), ()는 일몽(一夢)이요 문익공(文翼公) 원정(元禎)의 十代孫으로 고종(高宗) 신묘(辛卯 1891)217일 경북(慶北) 왜관읍(倭관邑) 석전동(石田洞)에서 출생하였다. 나면서부터 과묵(寡默)준수(俊秀)하고 기개(氣槪)가 있어 7살에 한문(漢文)을 배울 적에도 충신의사(忠臣義士)들이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는 구절(句節)에 이르러서는 매양 감탄(感歎)하였다. 20세에 향리의 동락학원(同樂學院)을 거쳐 서울보혜학교(普惠學校)에서 신학문(新學問)을 배우던 중 문득 국권(國權)회복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분연히 몸을 독립운동에 던졌다. 23세에 안자산(安自山) 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밀양(密陽)에서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고 비밀투쟁을 전개하였다. 己未年 三一運動 이후 이각(李覺)이라 변명(變名)하고 만주로 건너가 김상윤(金相潤)ㆍ김원봉(金元鳳)ㆍ곽재기(郭在驥) 등의 의열단(義烈團)에 가담, 실천방법을 세우고 2년 뒤에 왜정기관(倭政機關)의 폭파(爆破)사명(使命)을 띠고 입국하여 서울, 안동, 밀양, 부산, 창원, 마산 등지를 왕래하던 중 부산에서 체포되자 벙어리 노릇으로 꾀를 써서 풀려났다. 그 후 10년 동안 중국의 독립단(獨立團)에 국내(國內)정세(情勢)를 밀통(密通)하며 자금조달에 힘쓰는 한편 동지 이종암(李鍾岩)ㆍ김상윤(金相潤)ㆍ서상락(徐相洛) 등과 모의(謀議) 재거(再擧)를 꾀하던 중 고향 본가에 잠시 들렸다가 일경에 탐지(探知)되어 1924125일 새벽에 붙잡혀 7년형의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동지 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복역하던 중 3년 만에 출옥(出獄)하였으나 악독한 고문의 여독(갈비뼈가 부러졌음)으로 정묘(丁卯 1927)6637세로 세상을 뜨셨다. 혹독한 고문에도 연루 동지를 한 사람도 불어대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사회장(社會葬)으로 모시고저 하였으나 왜경(倭警) 저지(沮止)로 실행되지 못하고 쓸쓸히 가족장(家族葬)으로 모셨다. 천도(天道)가 무심치 아니하여 가신지 18년만에 조국은 광복되고 또 광복된 지 20년만인 196666일에 일몽선생추모기념사업회(一夢先生追慕紀念事業會)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지었는데 그 글 끝에 이르기를 「늦게나마 선생(先生)의 뜻과 행적(行跡)을 돌에 새겨 고향 땅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 기념비(記念碑)를 세우게 되었으니 어찌 느꼅지 아니하랴! 겨레의 자유를 위해 조국의 제단에 생명을 바친 투사(鬪士)의 혼()이 깃드신 곳 만고(萬古)에 끊임없이 흐르는 저 낙동강(洛東江)물도 목메여 울어 예는 여기, 동포(同胞)여 이 앞에 이르거던 부디 님의 뜻 가슴에 새겨 내 나라 빛낼 것 잊지 마소서」하였다. (出典 獨立運動史)

이종훈(李鐘勳) (讚狀國譯)(十韻科公 二十一代孫) ()는 경측(敬測)이니 단기(檀紀) 4189(1856)병진(丙辰) 210일 경기도 경주군 실촌면 유사리에서 출생하였는데 근조(近祖)이신 충민공(忠愍公)의 十八代孫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학(漢學)을 수학(修學)한 뒤에 천도교(天道敎)에 입적(入籍)하여 甲午年 혁신운동(革新運動) 甲辰年 개화운동(開化運動)에 가담하여 민족을 계몽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천도교의 장로급으로 취임하였다. 단기 4243년 庚戌 729일 한일합병(韓日合倂) 후에는 치욕적이고 이가 갈리는 원통함에 잠겨 슬퍼하던 중 교강(敎綱)에 의거(依據)해서 각지방의 교인(敎人)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표면인 즉 종교의 신앙지심(信仰之心)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이면(裡面)인즉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鼓吹)시켰으니 경기도 시외(市外)에 있는 우이동 별장(別庄) 봉황각(鳳凰閣)을 신축(新築)하고 교인(敎人) 중에 두령도사급(頭領道士級)이 第一回 21, 第二回 第三回 49명 총계(總計) 5백여명에게 성심(性心)을 수련(修練)시켰고 전반(全般) 교인(敎人)2149105일씩 수십회에 걸쳐 기도(祈禱)를 하는 데 자신도 일반 교인과 같이하여 덕을 천하에 펴고 널리 창생(蒼生)을 구제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염원이 여기 있으니 일편단심으로 정신을 통일하고 靈과 육인(肉人)이 일치하고 마음과 몸이 쌍전(雙全)하여 행동이 일치하도록 교훈 지시하고 이를 실행하는 동시에 전반교인들로 하여금 국권회복의 사상을 뇌리에 주입시켜 시기가 왔다하면 명령 한 마디로 행동을 개시하면 천운이 순환(循環)할 것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때는 마침 단기 4252년 기미년 봄을 만나 세계일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개최하여 미국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부르짖으니 이에 호응(互應)하여 동년 31일에 독립선언식(獨立宣言式)을 명월관지점(明月館支店)과 태화관(泰和館)에서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자유민(自由民)임을 중외(中外)에 발표하던 도중에 일본경찰에 체포됐으니 이것이 곧 大正8년에 제령(制令) 第七號 第一條 第一項에 해당하고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 42條 보안법(保安法) 第七條 등에 해당한다는 이유를 붙여서 사대문감옥에서 2년간 복역을 하게 되었다. 출옥한 후 만주 간도지방으로 돌아다니며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76세 일기로 서거하니 곧 신미(辛未)년이라. 한많은 조국의 광복을 완수치 못하고 그 몸이 먼저 가셨으니 오랜동안 베푼 충성된 마음 저 저승길 구천에까지 사무치리로다. ()하여 曰 한 많은 눈물 옷깃을 적시니 이내마음 아픔이여 그 충성 원통해라. ()에 칠원윤씨(漆原尹氏)시니 부친은 영렴(永廉)이시다. 장자(長子)에 적수(적洙) 일명 관영이며, 二子에 광수(光洙)가 있다.

이종건(二鍾乾) (廣陵府院君 十七代孫) 일명(一名) 동초(東初)ㆍ세장(世章)ㆍ남건(南乾) 1928년에 휘문고보(徽文高普)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상해,남경 등지에서 한족동맹(韓族同盟),의열단(義烈團) 등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밀정신모(密偵申某)를 살해하였으며 25년의 약관(若冠)으로 임시정부의정원의원(臨時政府議政院議員)들을 역임하였다. 1935년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졸업하였으며 김구(金九)선생과 더불어 일본천황 살해를 모의하였다. 후에 지나사변(支那事變)과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때는 조선광복군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조국광복 후인 1946년에 귀국하였으나 병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떴다. 1977년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