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강화이씨(江華李氏) 시조는 고려에서 중랑장 · 태자태보를 역임한 이대평(李大平) 이다

작성일 : 2017-04-28 22:23 수정일 : 2017-11-17 16:1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강화이씨(江華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중랑장(中郞將) ·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역임한 이대평(李大平) 이다. 그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하음(河陰 : 강화의 고호)에 정착(定着)하여 세거(世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화(江華)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강화(江華)는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우리나라 다섯 번째의 섬으로 일찍이 단군신화(檀君神話)에도 등장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아득한 옛날 갑비고차(甲比古次)라 하다가 고구려(高句麗) 때 혈구군(穴口郡), 신라 (新羅) 시대에는 해구군(海口郡)으로 불리웠다. 그 후 940년(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강화(江華)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高麗時代) 몽고의 침입 때와 조선(朝鮮)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임시수도(臨時首都)의 역할을 하였고, 수도의 관문에 위치한 까닭으로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稷: 1886년) · 신미양요(辛未洋優 : 1871년) ·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 1875년)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대평의 아들 개(琦)가 군기(軍器) 소감(少監)을 거쳐 호부(戶部) 시랑(侍郞)을 역임했으며, 손자 백원(白元)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또한 백원의 아들 돈인(敦仁)이 소감(少監)을 지냈으며, 돈인의 손자 당문(唐文)이 첨사(詹事)를 지내 가문을 중흥(中興)시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이씨(江華李氏)는 남한에 58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 대 인 물

이개(李 琦):고려(高麗) 때 시랑(侍郞)을 역임하였다.

이백원(李白元):고려(高麗) 때 어사(御史)를 역임하였다.

이돈인(李敦仁):고려에서 소감(少監)을 지냈다.

이당문(李唐文):고려(高麗) 때 침사(危事)를 지냈다.

이관(李 單):고려조(高麗朝)에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이윤수(李允緩):고려 때 낭중(郞中)을 지냈다.

이규보(李全報) : 1168(의종 22)-1241(고종 28). 초명 은 인저(仁fr),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 居士) · 지헌(止軒) ·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시호는 문순(文順), 호부(戶部) 낭중(郞中) 윤수(允緩)의 아들.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文 科)에 금제, 1199년 전주사록가 되고, 1202 년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를 거쳐 1207년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사재승(司宰丞) · 우정언(右正言) . 지제고(知制話)를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陳)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한 것으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 부사(副使)에 좌천당했다. 1220년 예부(禮部) 낭중(郞中) · 기거주 · 지제고(知制話)에 승진, 국자(國子) 제주(祭酒) · 한림 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의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獨島)에 유배, 1232년 판비서상사 · 보문각(寶文閣) 학사(學士) 경성부(鏡城府) 우첨사(右待事) · 지제고에 올랐다. 이듬해 호부(戶部) 상서(尙書) · 집현전(集賢殿) 대학사 (大學士) ·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고, 1237년 금자광 록대부(金紫光祿大夫) ·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士)했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으로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 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卽興詩)로 유명했고, 몽고군의 침입을 진명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로, 시 · 술 ·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자칭했다.

이한 : 초명(初名)은 관(jl). 1287년(충렬왕] 3) 문과에 급제한 후 지홍주사(知洪)·I·/事)에 이르렀으나 1309년(충선왕 1) 왕의 뜻에 거슬려 담양(潭陽)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사면(敎免)되었으나 그 곳에 계속 정착하여 후손들이 살았다.

이함 : 1348년(충목왕 4) 문과에 금제한 후 판도(版圖) 판서(判書)에 이르렀으며 하음군(河陰君)에 봉해졌다.

이익배(李益培) : 자(字)는 자천(自天). 고려조(高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1288년(충렬왕 14)에는 부지 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이영물(李榮物):고려(高麗)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

이백손(李fB孫):자(字)는 원보(元甫). 고려(高麗) 때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이립(李 立):자(字)는 입지(立之). 1513년(중종 8)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에 합격하였고 기준(奇 違) · 이언적(李彦迪) · 송순(宋 純) 등과 교유하며 그의 학문올 넓혔다.

이순(李 純):조선조(朝鮮朝)에 참봉을 지냈다.

이영수(李英秀):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윤화(李允利):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환검(李煥檢):조선(朝鮮)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이시(李 蓍) : 조선조(朝鮮朝)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양숙(李楊叔):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명복(李命福):자(字)는 겸오(兼五) .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이진(李 珍):자(字)는 적(迪).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이일화(李日華):자(字)는 광재(光哉). 조선(朝鮮) 때의 금부사(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의정(李義精):자(字)는 의중(宜中). 조선 때 현감(縣 監)을 지냈다.

이기형(李起衡):자(字)는 평원(平源). 조선 때 찰방(察 訪)을 지냈다.

이재춘(李載春):자(字)는 화실(華實).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이백호(李白好) : 자(字)는 광백(光白). 조선 때 동지중추 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