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가평이씨시조(加平李氏),이인보(李仁輔),가평이씨조상인물,이형손(李亨孫)

작성일 : 2017-04-28 21:47 수정일 : 2018-02-26 21:44

가평이씨시조

가평이씨(加平李氏)는 신라(新羅)때 완산 호장(完山戶長)을 지낸 이인보(李仁輔)를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8 세손 기문(起文)이 조종(朝宗 : 가평의 옛 지명)에 이거 (移居)하여 본관을 조종(朝宗)으로 삼았다.

그 후 29세손 인 춘계(椿桂)가 고려에서 판도(版圖)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그의 증손 형손(亨孫)이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 평한 공(功)으로 가평군(嘉平郡)에 봉해 졌으며 지명의 변천으로 조종(朝宗)이 가평(加平)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 관(本貫)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형손(亨孫)의 8대조(八代祖)로 호장(戶長)을 지낸 진수(珍守)를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본관의 유래

가평(加平)은 경기도(京畿道) 중동부(中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시대에는 근평군(斤平郡) 또는 병평군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가평군(嘉平郡) 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강원도 춘성군(春城郡)에 속하였다. 1396년(태조 5)에 조종현(朝宗縣)을 폐합하고 1413년(태종 13) 개례(改例)에 따라 강원도(江原道)에서 경기도(京畿道)로 편입하였으며, 1525년 (중종 20)에 종래의 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

1697년(숙종 23)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07년에 다시 군으로 승격되고, 그 후 1888년(고종 25)에 춘성부(春城府)에 속하였다가 1894년 경기도로 환속되면서 포천군(抱川郡)에 속하게 되었다. 1896년 관제개혁으로 전국을 13도로 분할하면서 가평군(加平郡)으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춘계(椿桂)의 손자 다림(多林)과 증손인 윤손(允孫) · 형손(亨孫) 형제가 유명했다. 다림(多林)은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동지중추 원사(同知中樞院事) · 부총관(副總管)에 이르렀으며 , 윤 손(允孫)은 정종(定宗) 때 등과하여 문종조(文宗朝)에 병조(兵曹)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 이형손(李亨孫)은 1447년(세종 2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전라도(全羅道) 부절제사(副節!!fl]使) 겸 전주(全州) 부윤(府尹)이 되고 1492 년(성종 23) 우림위장(羽林衛將)에 이어 부총관(副抱管)을 겸임했다.

그 외 병조(兵曹) 참판(參判) 장생(長生)과 현감(縣監)을 지낸 장경(長卿), 임진왜란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명백(命百)과 경종(景宗)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제태(齊台) 등이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가평이씨(加平李氏)는 전국에 11,93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가평이씨조상인물

이침(李 沉) : 고려(考慮) 때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를 지냈다.

이다림(李多林):조선(造船)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부총관(副擔管)에 이르렀다.

이윤손(李允孫):시호(盆號)는 장간(章簡) · 조선 정종 (定宗) 때 무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 兵馬節度使) · 도총관(都摠管) 등을 거쳐 병조(兵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이형손(李亨孫) : 1418(태종 18) - 1496(연산군 2) . 자 (字)는 창백 (昌伯), 시호(盆號)는 평호(平胡), 다림(多林)의 아들. 내금위(內禁衛)에 등용되고, 1447년(세종 29) 무과(武科)에 급제, 길주(吉州) 판관(判官) ·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 등을 거쳐 남포진(藍浦鎭) · 옥구진(沃溝鎭)의 병마사(兵馬使), 이어 함길도(咸吉道) 도진무사(都鎭撫使) · 의주(義州)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愼功臣) 2등으로 가평군(嘉平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전라도 부절제사(副節制使) 겸 전주(全州) 부윤(府尹)이 되고, 공주(公州) . 청주(淸州)의 목사(牧師)를 거쳐 1492년(성종 23) 우림위장(羽林衛將), 이어 부총관(副總管)을 겸임했다.

이철암(李鐵巖) : 조선조에 어모장군(禦梅將軍)에 이르렀다.

이철근(李鐵根):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포천(抱川). 충주(忠州) . 진산(珍山) · 봉산(鳳山)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철영(李鐵榮):조선 때 생원 진사시(生員 . 進士試)에 합격하였고 효행과 청렴으로 천거되어 익산(益山)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이장생(李長生):조선 성종(成宗)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당상관(堂上官)에 올랐으며, 1513(중종 8) 사은사(謝 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병조(兵曹) 참판(參判)에 재임되었다.

이장경(李長卿):조선 성종(成宗) 때 진사(進士)가 되어 그 후 안음(安陰) 현감(縣監)올 지냈다.

이민진(李敏進):호(號)는 백봉(白峯).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피난을 가자 의병을 일으켜 광산(廣山)에서 격전 끝에 전사(戰死)하였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고 정려(桂間)가 세워졌다.

이명백(李命百):호(護)는 한포재(寒뻐齊).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보은(報恩)에서 왜적(倭賊)을 방어(防禦)하다 전사(戰死)했다. 이조(吏曹)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제태(李齊台):호(號)는 명계(鳴溪). 조선 경종(景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쓴 학자(學者)였다.

이제항(李齊恒):호(號)는 삼매당(三梅堂). 1735년(영조 11) 문과에 급제 한 후 이조(吏曹) 좌랑(佐郞) · 승지 (承旨) 등을 역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