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양주윤씨시조(陽州尹氏),윤숭(尹崇),양주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7 14:26 수정일 : 2018-04-17 11:2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양주윤씨(陽州尹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에서 도첨의(都僉議) 정승(政丞))을 역임한 윤숭(尹 崇)이다. 그의 선계(先系)이 실전(失傳)되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양주(楊州)에 정착(定着)한 후손(後孫)들은 사족(士族)으로 관향(貫鄕)을 양주로 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양주(陽州)는 경기도(京畿道) 중앙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매성군(買城郡) 혹은 창화군(昌化郡)이라 하였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소(來蘇)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견주(見州)로 승격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는 다시 양주(楊州)로 개칭한 뒤 1895년(고종 32) 목(牧)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 윤 숭(尹 崇)외 6세손 장(璋)이 성종(成宗)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으며, 10세손 안국(安國)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부승지(副承旨)․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홍국(弘國)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00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주 윤씨(楊州尹氏)는 전국에 총253가구, 83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 - 양주윤씨조상인물

윤덕방(尹德方): 고려조에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역임하였다.

윤수(尹 壽):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윤기(尹 期): 조선조에서 판관(判官)을 지냈다.

윤지하(尹志夏):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윤장(尹 璋): 1483년(성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497년(연산군 3) 중시문과(重試文科)에 장원한 후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윤당(尹 瑭): 조선조에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윤종(尹 琮):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봉산 군수(鳳山郡守)를 지내고 중종(中宗) 때 거의(擧議)에 동참(同參) 하여 공훈(功勳)이 있어 양산군(楊山君)에 봉(封 )하여졌다.

윤계훈(尹繼勳): 조선조(朝鮮朝)에 좌통례(左通禮)에 추증(追贈)되었다.

윤계종(尹繼宗): 조선조에 경학(經學)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參奉)을 거쳐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윤계사(尹繼祀): 조선조(朝鮮朝)에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냈다.

윤시우(尹時雨): 자(字)는 패년(沛然). 조선 때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시백(尹時伯): 조선(朝鮮朝)에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윤응령(尹應齡): 조선(朝鮮) 때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응상(尹應商): 자(字)는 군빙(君聘), 호(號)는 영사당(永思堂). 조선조에 경기도 수운 판관(水運判官)을 역임하였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중립(尹仲立): 조선조(朝鮮朝)에 수운 판관(水運判官)을 지냈다.

윤응상(尹應商): 조선조(朝鮮朝)에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윤안국(尹安國): 1569(선조 2)~1630(인조 8). 자(字)는 정경(定卿), 호(號)는 설초(雪樵), 판관(判官) 응상(應商)의 아들. 1591년 (선조 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했으나 동인(東人)들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하다가 1598년 동인들이 실각하자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고, 이어 전적(典籍)․부승지(副承旨)․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1629년(인조 7)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도중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윤홍국(尹弘國): 1576(선조 9)~1616(광해군 8). 자(字)는 장경(長卿), 수운 판관(水運判官) 응상(應商)의 아들. 정철(鄭 澈)․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생원(生員)으로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주서(注書)를 거쳐 1604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왕조실록(王朝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했다. 이듬해에 울산 판관(蔚山判官), 이어 북평사(北評事)․직강(直講)․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 1615년(광해군 7) 서장관(書壯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세상의 질서를 받던 정 철(鄭 澈)의 문인인데다가 간신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아 하급 관리로 생애를 마쳤다.

윤광국(尹匡國): 자(字)는 정경(正卿). 조선 때 조산산대부(朝散大夫)로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윤영국(尹榮國): 자(字)는 이경(而慶). 조선조(朝鮮朝)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윤필선(尹弼善): 조선조에 이천(利川) 부사(府使)를 지냈다.

윤기(尹 蘷): 자(字)는 성보(聖輔). 조선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윤세초(尹世礎): 자(字)는 중보(重甫), 호(號)는 야정(野亭). 조선 숙종조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윤미(尹 敉): 조선조에 영남 어사(嶺南禦史)를 역임하였다,

윤희량(尹熙亮):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윤희경(尹熙敬): 조선에서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윤성원(尹聖元): 조선조에 진사(進士)였다.

윤방헌(尹邦憲):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