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무송윤씨(茂松尹氏),윤양비(尹良疪),무송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7 14:22 수정일 : 2018-02-23 15:04

무송윤씨시조

무송윤씨(茂松尹氏)의 선대는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미상(未詳)하다가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윤양비(尹良疪)가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역임하여 무장현 (茂長縣) 호장(戶長)의 택호(宅號)를 받게 되자 양비를 시조(始祖)로 하고 무송(茂松)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계대(繼代)를 이어 오고 있다.


본관의 유래

무송(茂松)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茂長面)에 두었던 통일신라 때의 행정구역 명(名)으로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懸)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무송현으로 개명하였으며, 1417년(태종 17) 장사현(長沙懸)과, 합하여 무장현(茂長懸)이라고 일컫다가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쳐 고창군(高敞郡)에 편입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양비(良疪)의 증손(曾孫)인 문정공(文貞公) 택(澤)이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택(澤)의 손자 소종(紹宗)은 이 색(李 穡)의 문인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장원(壯元)한 뒤 조선(朝鮮)에서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지낼 때「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회군삼등공신(回軍三等功臣)에 올랐고 수문전(修文殿) 학사(學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겸직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과 경사(經史)에 밝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소종(紹宗)의 아들인 회(淮)는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종(世宗) 때 맹사성(孟思誠)․신장(申檣)과 함께「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편찬하였으며 병조(兵曹) 판서(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주호(酒豪)로 이름이 났었다. 회(淮)의 손자(孫子) 자운(子雲)은 병조와 형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을 걸쳐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자운(子雲)의 5세곤 형(泂)은 선조(宣祖)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2등공신(光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이외에도 근대(近代)에 와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선 세복(世福)․세주(世冑)․호(皓) 등이 무송 윤씨(茂松尹氏)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송윤씨(茂松尹氏)는 남한에 14,57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무송윤씨조상인물

윤해(尹 諧): 1231(고종 18)~1307(충렬왕 33). 자(字)는 강재(康渽). 무송(茂松)의 현리(縣吏)로서 문과(文科)에 급제, 상주 사록(尙州司祿)이 되었으며, 후에 내시(內侍)가 되어 충렬왕(忠烈王)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와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侯)로서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가 되어 일본(日本) 정벌에 쓸 전함의 건조를 감독했다. 홍자번(洪子藩)의 천거로 흥위위 장사(興威衛長史)로 기용되고,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1286년(충렬왕 12) 동계(東界)의 초군사(招軍使)가 되어 영월 현감(寧越縣監)을 죽인 도적 강윤명(康允明)을 체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파면(罷免), 후에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에 이르고 면직(免職)되어 고향에 돌아갔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가 되었으며, 이해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하자 정헌대부(正憲大夫)․국학 국학(國學) 대사성(大司成)․문학사학(文學史學)이 되어 치사(致仕)했다. 청렴(淸廉)결백(潔白)하고, 강직(剛直)하여 권세(權勢)에 눌리지 않았다.

윤등(尹 登): 고려(高麗)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윤택(尹 澤): 1289(충렬왕 15)~1370(공민왕1 9). 자(字)는 중덕(仲德), 호(號)는 율정(栗亭),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문한 사학(文翰司學) 해(該)의 손자. 고모부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공부하여 1317년(충숙왕 4) 문과(文科)에 급제, 경산부 사록(京山府司錄)․교감(校勘) 등을 거쳐 1334년 검열(檢閱)이 되었다. 그후 서경 부윤(西京府尹)․우대언(右代言)을 거쳐 충목왕(忠穆王) 초에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전 밀직(密直) 이승로(李承老)와 함께 중서성(中書成)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후계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충정왕(忠定王)이 후계왕으로 즉위하게 되어 1349년(충정왕 1) 광양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1351년(충정왕 3)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이듬해 상소(上疏) 건의한 바가 허락되지 않자 개성 부윤(開城府尹)으로 치사(致仕). 1361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의 벼슬이 더해졌다. 치사한 후에도 충숙 왕의 고명(顧命)을 상기하여 항상 치국(治國)의 길을 왕에게 건의했으며, 1363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윤귀생(尹龜生): 고려 때 판전농시사(判典農示事)를 지냈다.

윤충보(尹忠輔): 1390년(공양왕 1) 진사(進士)가 된 후 안성군사(安城郡史)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朝鮮開國) 후 여주(驪州)에 둔거(遁居)하였다. 그후 태조(太祖)가 수 차례 벼슬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니 여거사(女居士)라는 호(號)를 내려 주었다.

윤소종(尹紹宗): 1345(충목왕 1)~1393(태조 2). 자(字)는 헌숙(憲叔), 호(號)는 동정(桐亭), 찬성사(贊成事) 택(澤)의 손자. 이 색(李 穡)의 문인. 1365년(공민왕 14) 문과(文科)에 장원, 춘추관 수찬(春秋館修撰)을 거쳐 정언(正言) 때에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우왕(禑王) 초에 전교시(典校示)의 승(丞)․부령(副令) 등을 지내고. 1381년(우왕 7) 모친상으로 금주(金州 : 금산)에서 복상을 마치는 동안 많은 지방 학자들을 가르쳤고, 1386년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기용되었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때 동문(東門) 밖에 나가 영접하고 군전(軍前)에서「곽광전(霍光傳)」을 바쳤는데 그 까닭은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王)씨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창왕(昌王) 때 전교령(典校令)․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공양왕(恭讓王) 즉위 초에 대사헌 조 준(趙 浚)의 천거로 좌상시(左常侍)․경연강독관(經莚講讀官)이 되었고, 이숭인(李崇仁)의 뛰어난 재주를 질투하여 그를 무고해서 중지시켰다. 그후 남을 헐뜯는 것으로 왕의 미움을 받아 금주(金州)에 유배되었으나 용서받고, 다시 정몽주(鄭夢周) 일파인 간관(諫官)에게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으나 1392년(태조 1) 정몽주가 살해되자 귀양에서 풀렸다. 1392(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병조 전서(兵曹典書)로서 고려사(高麗史)의 수찬(修撰)에 참여, 이듬해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올랐으며, 수문전(修文殿) 학사(學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겸직했다. 성리학(性理學)과 경사(經史)에 밝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윤회종(尹會宗):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소종(紹宗)의 아우. 우왕(禑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사재부령(司宰副令)이 되어 1390년(공양왕 1) 세자시학(世子侍學)을 겸직, 앞서 우왕(禑王)․창왕(昌王)의 주살(誅殺)을 요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형조(刑曹) 총랑(摠郞)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을 도왔으나 1395(태조 4) 의랑(議郞)으로서 급전(給田)을 잘못하여 외지(外地)로 유배되었다. 1407년(태종 7) 사예(司藝)로서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이 되고, 1414년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도감사(都監使)를 지냈다.

윤자견(尹自堅):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윤자영(尹自濚): 조선 때 사관(史官)에 이르렀다.

윤침(尹 沈): 조선조(朝鮮朝)에 봉례(奉禮)를 지냈다.

윤회(尹 淮): 1380(고려 우왕 6)~1436(세종 18). 자(字)는 청경(淸卿), 호(號)는 청향당(淸香堂)․학천(鶴川), 시호(諡號)는 문도(文度), 소종(紹宗)의 아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이름을 떨치다가 1393년(태조 2) 진사(進士)가 되고, 1401년(태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사재직장(司宰直長)에 보직, 좌언정(左言正)․이조(吏曹) 좌랑(佐郞)․예조(禮曹) 정랑(正郞)을 역임, 1409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1414년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로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이 설치되자 제십방(第十房)의 담당자로서 신속 공정히 판결했고, 1419년 우부대언(右副代言), 1422년(세종 4) 병조 참의(兵曹參議), 이어 동지우군총제(同知右軍摠制)․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1424년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으로서 류 관(柳 觀) 등과 함께 정도전(鄭道傳)의 고려사(高麗史)를 수교(修交), 1427년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으로 척불(斥佛)을 건의했으며, 1432년 세종의 명을 받고 신 장(申 檣)과 함께 팔도 지리지(八道地理誌)를 편찬했다. 1433년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 겸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대제학(大提學) 정 초(庭 招)와 함께 사대문서(事大文書)를 감장(監掌)했고, 1434년 집현전(集賢殿)에서 왕명으로「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찬집(纂輯)을 맡았으며, 병조(兵曹) 판서(判書)․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윤자운(尹子雲): 1416(태종 16)~1478(성종 9). 자(字)는 망지(望之), 호(號)는 낙한재(樂閒齋),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판서 회(淮)의 손자, 1438년(세종 20) 진사(進士)가 되고, 144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450년(세종 32)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으로 수사관(搜査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 이조(吏曹) 좌랑(佐郞)을 거쳐 1456(세조 2) 대호군(大護軍)․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고,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올랐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460년 도승지(都承旨)에 승진,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야인(野人)의 토벌에 출전했고, 다음해 이조(吏曹) 참판(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인수부윤(仁壽府尹), 경기․충청․전라․경상도의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냈다. 병조와 형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1467년 좌참찬(左參贊)으로 평안도(平安道) 제언목장급전사(堤堰牧場給田使)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했고, 다시 경상좌도 군용체찰사(慶尙左道軍容體察使)로 나갔다. 같은 해 우찬성(右贊成)으로 함길도(咸吉道) 도체찰사(都體察使)․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 이듬해 무송군(茂松君)에 봉해지고 팔도군적사(八道軍籍使)가 되었다. 1469(예종 1)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1470년(성종 1) 영의정(領議政)에 승진, 이듬해 좌리 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어 무송 부원군(茂松府院君)에 진봉(進封)된 뒤 사직, 이듬해 다시 우의정(右議政)으로 예조(禮曹) 판서(判書)를 겸직했다.

윤자영(尹子濚): 자(字)는 담수(痰祟), 호(號)는 방촌(방村). 1451년(문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1466(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한 후 한림(翰林)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예조(禮曹)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준(尹 浚): 호(號)는 인암(仁菴). 조선 때 별좌(別坐)를 지냈다.

윤징(尹 徵): 자(字)는 청수(淸叟). 1475년(성종 6)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가 되고 뒤에 공주(公州) 판관(判官)을 거쳐 군수(郡守)․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윤백연(尹伯涓):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윤변(尹 汴): 조선 때 부윤(府尹)을 지냈다.

윤자렴(尹子濂): 조선에서 생원(生員)을 지냈다.

윤광일(尹光溢): 조서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윤사익(尹思翼): 자(字)는 언례(彦禮). 1514년(중종 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예조(禮曹)․호조(戶曹) 좌랑(佐郞) 겸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 등을 거쳐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겸 도총관(都摠管)을 지냈으며, 1546년(명종 1)에는 공조(工曹) 판서(判書)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윤옥(尹 玉): 1511(중종 6)~1584(선조 17). 자(字)는 자온(子溫), 호(號)는 동리(東里), 판서 사익(私益)의 아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동부승지(同副承旨)․양주(楊州) 목사(牧使) 등을 지내고 1561년(명종 16) 딸이 순회세자(巡廻世子)의 빈(嬪)이 되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가 되었다. 이어 공조(工曹) 참판(參判)에 승진하고, 1566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윤진(尹 璡): 호(號)는 희암(希菴). 조선 선조(宣祖) 때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단성(丹城) 현감(縣監)을 지낼 때 선정(善政)을 베푸니 백성들이「삼진도(三盡圖)」를 만들어 그의 공적(功績)을 칭송하였다.

윤지형(尹之亨):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윤천민(尹天民):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윤형(尹 泂): 1594(선조 27)~1614(광해군 6). 자(字)는 이원(而遠), 호(號)는 퇴촌(退村), 시호(諡號)는 충정, 언청(彦淸)의 아들. 김치원(金致遠)의 문인. 1576년(선조 9) 진사(進士)가 되고, 1586년(선조 19)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9년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고 돌아와 사섬시(司贍寺) 첨정(僉正)에 올랐다. 이어 지평(持平)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叛) 사건 후에 논공 행상의 불공평을 논하다가 파직, 이듬해 종계 변무의 공으로 광국 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무릉 부원군(茂陵府院君)에 책록,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에 발탁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세자(世子)를 성천(成川)으로 시종, 이듬해 사성(司成으로 왕을 호종(扈從), 군기시 정(軍器寺正)이 되었다. 1596년 헌납(獻納)․장령(掌令)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1600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으로 명나라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의 접반부사(接伴副使)가 되었으며, 도총관(都摠管)․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1603년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고, 1605년 호조(戶曹) 판서(判書)․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했다.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앞서 임진왜란 때의 호종의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무성부원군(茂盛府院君)에 피봉(皮封)되었다.

윤관(尹 瓘): 자(字)는 공헌(公憲), 호(號)는 가곡(嘉谷). 조선 때 효행(孝行)으로 벼슬에 천거되어 부사직(副司直)․선공감역(繕工監役)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윤영(尹 暎): 자(字)는 명원(明元). 조선 때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는데, 하루는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려 뜰 가운데 큰 연못이 패어 그곳에 고기를 길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하며, 부친(父親)의 병환을 치료하고자 산에 채약(採藥)하러 올라가니 호랑이가 와서 약(藥)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한다. 이로 인해 그 마을을 양어촌(養魚村), 그 산을 효심산(孝心山)이라 불렀다.

윤백상(尹百祥): ?~1621(광해군 13). 자(字)는 상지(祥之), 공조 참판(工曹參判) 옥(玉)의 서자(庶子). 18세 때 누이동생이 덕빈(德嬪:순회세자의 빈)이 되자 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에 발탁(拔擢)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옹주(翁主)를 황해우도(黃海右道)에 무사히 피난시킨 공으로 이듬해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이 되었다. 1595년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에 올랐다가 서자 출신이라는 탄핵으로 파직되고 투옥 중인 그의 서자 기(錡)와 함께 역모(逆謀)의 무고를 받았으나 좌의정(左議政) 심희수(沈喜壽)의 도움으로 죽음을 모면, 구성(龜城)에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윤장(尹 璋)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충장공(忠將公) 신립(申砬)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순절(殉節)하였다.

윤지서(尹之瑞):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윤흥무(尹興茂):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윤세복(尹世復): 1884(고종 21)~1960. 자(字)는 상원(庠元), 호(號)는 단애(檀崖). 경남 밀양(密陽) 출신. 일찍이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밀양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 교사․대구 협성중학교(協成中學校) 교사를 역임하고, 1909(융희 3) 안희제(安熙濟)․서상일(徐相日)․신성모(申性模) 등과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했다. 그 뒤 만주로 망명,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茂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밀산당벽진(密山堂壁鎭)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寧安)에 대종학원(大宗學院) 등을 설립하여 교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했고, 장백(長白) 등지에서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고 홍범도(洪範圖)․조맹선(趙孟善) 등과 연합전선을 펴 일본군에 항전했다. 1923년 제2세 교주 김 헌(金 獻)의 유언으로 대종교 제3세 교주가 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單葬)이 수여되었다.

윤세주(尹世冑) 호(號)는 석정(石鼎). 1919년 3․1운동(運動) 때 만세(萬歲) 시위운동(示威運動)에 힘썼다. 궐석재판(闕席裁判)에 의해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김원봉(金元鳳)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1920년 총독부(總督府) 및 중요 관공서(官公署)를 폭파하기 위해 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국내(國內)로 폭탄을 들여오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옥고(獄苦) 후 다시 중국(中國)으로 망명하여 1937년 조선 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중앙위원(中央委員) 겸 선전부장(宣傳部長)을 지내면서 조선 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하여 화북(華北) 태행산(太行山)을 중심으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윤세두(尹世斗): 자(字)는 상문(庠文), 호(號)는 순가(舜可). 한말(韓末)에 대한민국(大韓民國) 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 참의장(參議長)을 역임하면서 만주 전역에서 광복 동지(光復同志)를 규합하던 중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 전사(戰死)하였다.

윤호(尹 晧): ?~1953. 호(號)는 송재(松齎), 병현(秉懸)의 아들. 충청도 보령(保寧) 출신. 1903년(광무 7) 인창학교(仁昌學校) 졸업, 1907년(융희 1)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반대하여 각지방에서 순회 강연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대한 의학교(大韓醫學校)를 중퇴하고 만주로 망명했으며, 1919년 국내로 잠입, 군자금을 모집했고, 1921년 김좌진(金佐鎭) 휘하에서도 군자금을 모집했다. 세계 혁명자대회(世界革命者大會)에 참석 후 만주에서 「조선역사도설(朝鮮歷史圖說)」을 저술, 민족 사상을 앙양시켰다. 그후 독립단체(獨立團體) 신민부(新民府)․정의부(定義府)․참의부(參議府)의 통합 운동을 전개하고, 군민 의회(軍民議會)에 참석한 후 귀국, 중외 일보(中外日報) 편집위원(編輯委員)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조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