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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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7 14:10 수정일 : 2018-02-03 17:26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남원윤씨(南原尹氏) 시조 윤위(尹 威)는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의 8세손으로, 1176년(고려 명종 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 박사(國子博士)를 거쳐 기거랑(起居郞)․이부 낭중(吏部郎中)․예빈 소경(禮賓少卿) 등을 지냈고, 1200년(신종 3) 국자 사업(國子司業)으로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호남(湖南)에 갔을 때 남원(南原)에서 복기남(卜奇男)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수(郡守)가 제압치 못하고 안렴사인 위(威)에게 고(告)하자 단기(單騎)로 적도(賊徒)를 해산시키고 난을 평정(平定)하여 그 공(功)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서 살면서 파평 윤씨(坡平尹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남원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그러나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필명(筆名)이 높았던 이규보(李奎報)가 쓴 <국자사업윤공애사(國子司業尹公哀辭>에 의하면, 윤 위(尹 威)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윤 관(尹 瓘)의 후손으로 덕(德)과 인품(人品)과 문장(文章)을 갖추었으며, 술을 몇 말씩 먹는 호주가(好酒家) 인데도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다가 죽었는데 남원 사람들이 그의 공을 생각하여 장례비를 모아 남원 땅에 묻히게 하여 후손들이 남원에 살면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군으로 고치고 1360(공민왕 9) ()로 승격, 1739(영조 15)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고 다시 부로 복구, 1895(고종 32) 남원군이 되었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맥(人脈)으로는, 아성(牙城)의 전란에 순절한 극민(克敏 : 시조 위의 아들)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함안백(咸安伯)에 봉해진 돈()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시조의 현손으로 평리(評理)를 지낸 수균(守均)의 아들 황()은 고려말에 전서(典書)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開國)에 두문불사(杜門不仕)하여 충절을 지켰다. 현령(縣令) 신을(莘乙)의 현손(玄孫)인 효손(孝孫)은 어릴 때부터 효행(孝行)이 뛰어나 그의 할아버지가 효손(孝孫)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처관(處寬)이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가 되어 이른 새벽에 정승집의 문 앞에 가서 명함(名啣)을 드리니 문지기가 정승이 주무신다는 핑계로 명함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날이 저물도록 기다렸다가 시장하고 피곤하여 할 수 없이 돌아와 아들 효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재주가 없는 탓으로 이런 욕을 당하니 너는 마땅히 학업에 근실하여 네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하였다. 효손이 그 명함 끝에 글을 쓰기를 정승이 해가 높도록 단잠 자는데, 대문 앞 명함 꼭지에는 털이 났구나.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만나 보거든, 그때에 토악(吐握)하던 수고를 물어 보소서하였다. 이튿날 아침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 명함 끝에 글을 쓴 것도 모르고 다시 찾아가 명함을 드렸다.

정승이 그 시를 보고는 즉시 불러 들여 묻기를 이것은 네가 쓴 것이냐하자 처관은 놀라고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글자의 획을 살펴보니 바로 그의 아들이 쓴 것임을 알고 마침내 사실대로 말하니 정승은 효손을 불렀다.

효손을 본 정승은 총명하기가 보통 아이와 다르므로 매우 칭찬하였다. 이때 정승은 사위 감을 고르고 있던 터라 들어가서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좋은 사윗감을 얻었소하며 그 사실을 말하자, 부인은 안됩니다. 우리 딸을 어찌 녹사(錄事)의 아들과 혼인(婚姻)시키겠습니까하였다. 정승은 부인의 반대를 듣지 않고 마침내 효손을 사위로 삼았다. 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박원형(朴元亨 : 영의정)이 효손의 명성을 듣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정승은 바로 박원형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효손은 영의정의 사위로 문과중시(文科重試)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슬하에 7남 1녀를 두었다. 특히 그는 당세에 뛰어난 효자(孝子)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아버지가 죽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시묘(侍墓) 하였고, 묘가 10여 리나 떨어져 있어도 매일 아침마다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는 반드시 걸어서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후에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 그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음식은 반드시 그의 정성을 드린다 하여 관아에 작은 부엌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손수 음식을 만들었다. 그는 몸소 사냥을 해서 손수 음식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리고 명절날이면 술상을 올리면서 스스로 아래와 같은 곡조(曲調)를 지어 불렀다.

북쪽에는 둔산령(屯山嶺)이 있고,

남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있으니,

이 두 산의 수()를 빌려다가

만연토록 어머니를 받들리라.

노래를 부르고는 일어나 춤을 추어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일이라면 아이 같은 행동이라도 서슴지 않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영찬(英贊)8세손 결(: 정랑 시걸의 아들)은 중종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주서(注書)가 되어「유구풍속기(瑜球風俗記)」를 저술했다. 뒤에 부수찬(副修撰)이 되어「시정기(時政記)」필화 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名世)를 위해 변명 하다가 진복창(陳復昌)의 무고로 죽음을 당했다. 특히 그는 시문(詩文)에 능하여 유배지(流配地)에서 뿐만 아니라 죽음에 임해서도 태연히 하고 싶은 말을 시() 속에 담아 읊었다.

임진왜란 때 상주성(尙州城)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섬()은 광국이등공신(光國二等功臣)으로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추봉 되었고, 그의 손자 계()․집()․유()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계()는 인조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리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려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꿇어앉히려는 적 앞에 목이 끊겨도 되놈 앞에서 무릎을 못 꿇겠다고 버티다가 발이 잘리었다.

그는 발이 없는 것과 꿇는 것과는 다르다고 굴복하지 않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의 아우 집()은 병자호란 때 화의를 극력(極力) 반대했다가 척화론자(斥和論者)로 몰려 청()나라에 잡혀가서 갖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심양(瀋陽)의 서문(西門) 밖에서 죽음을 당하여 척화 삼학사(三學士)로 불렸으며, 그의 아우 유()도 두 형의 죽음에 뜻을 세워 청나라 입김이 스며든 조정에 불사(不仕)하고 효도(孝道)와 문행(文行)으로 여생을 마쳐 가장 강력한 척화가문(斥和家門)으로 절의(節義)를 세웠다.

그 밖의 인물로는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숙종 때 사화(士禍)에 절의를 지켜 금세지이련(今世之二連)이라 송시열의 극찬을 받았던 이건(以健 : 유의 아들)과 이성(以性)이 유명했고, ()는 임진왜란 때 도망치는 감사(監司)를 욕하고 성()을 사수하여, 병자호란에 순절한 형지(衡之)와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척화로 절의(節義)를 세운 형준(衡俊)과 함께 남원 윤씨의 절맥(絶脈)을 이었다.

2015년 통계청 결과에 의하면 남원윤씨(南原尹氏)는 남한에 총 42,4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남원윤씨조상인물

윤극민(尹克敏): 시호(諡號)는 문평(文平). 1248(고종 35) 문과에 급제(及第)한 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판호부사(判戶部事)․정당문학(政堂文學)․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 등을 역임하였으며, 아성(牙城)의 전란(戰亂)에서 순절(殉節)하였는데, 그 전투에서 큰공을 세우니 정려(旌閭를 세워 포상(褒賞)토록 하였다.

윤돈(尹 敦): 1260(원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의 정랑(典議正郞)․이부시랑(吏部侍郞) 등을 역임하였으며, 함안(咸安)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왕명(王命)을 받들어 원수(元帥) 겸 자사(刺史)가 되어 이를 평정(平定)하였다.

윤영찬(尹英贊): 고려(高麗) 때 판민부사(判民府事)를 지냈다.

윤신갑(尹莘甲): 고려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윤신을(尹莘乙): 고려에서 현령(縣令)을 지냈다.

윤홍재(尹弘材): 고려 때 문하 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윤흥재(尹興材): 고려조(高麗朝)에 전객 주부(典客主簿)를 지냈다.

윤언재(尹彦材): 고려 때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지냈다.

윤희(尹 希): 조선조(朝鮮朝)에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윤처관(尹處寬):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윤효손(尹孝孫): 1431(세종 13)1503(연산군 9). ()는 유경(有慶), ()는 추계(楸溪),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순창(淳昌) 군수(郡守) 처관(處寬)의 아들. 1450(세종 32) 생원(生員)이 되고, 1453(단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고, 저작(著作)․박사(博士) 등을 거쳐 1457(세조 3) 전농 주부(典農主簿)가 되었다. 이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우헌납(右獻納)에 특임(特任)되었으며, 예조 정랑(禮曹正郞)․사예(司藝)․검상(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한 뒤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나갔다가 1468(세조 14)에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이 되었다. 1470(성종 1)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오례의주(五禮儀註)」를 수찬(修撰)하고, 호조(戶曹) 참의(參議)․예조(禮曹) 참의(參議)를 역임했으며, 1475년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크게 치적을 올려 금단의(錦段衣) 한 벌을 하사(下賜)받고, 공조(工曹)․형조(刑曹)․이조(吏曹) 참판(參判),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다. 1489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는 길에「활민대략(活民大略)」․「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등의 책을 구입하여 왕에게 진상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다시 기용되어 나주(羅州) 목사(牧使)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임, 1491년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1493년 경상도(慶尙道) 양전순찰사(慶尙道量田巡察使), 이어 한성부(漢城府)의 좌․우윤(左右尹), 형조(刑曹) 판서(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으로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겸직,「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한때 파직 당했다가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503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러 죽었다. 남원(南原)의 방산 서원(方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윤말손(尹末孫): ()는 희경(喜慶). 조선(朝鮮) 때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윤언함(尹彦咸):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윤계형(尹繼衡):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윤승형(尹承衡):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윤지형(尹止衡): ()는 평원(平元), ()는 계봉(溪峰).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윤시걸(尹時傑):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윤시영(尹時英): 조선(朝鮮) 때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윤우(尹 雨): ()는 군택(君澤). 조선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윤정(尹 霆): ()는 자허(子虛). 조선(朝鮮)에서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윤준(尹 浚): ()는 담결(淡潔).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윤형(尹 衡): ()는 신수(莘叟).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윤관(尹 寬): 1490(성종 21)1550(명종 5). ()는 율옹(栗翁), ()는 삼휴자(三休子), 단련사(團練使) ()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기 준(奇 遵)․신 잠(申 潛) 안 정(安 珽) 등 신진사류(新進士類)와 교우(交友),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때는 친상(親喪)으로 화를 면했으나 그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22년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이 되고, 위에 충익부(忠翊府) 도사(都事)․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을 지냈다.

윤강원(尹剛元): ?1572(선조 5). ()는 경인(景仁), ()는 기재(寄齋), ()의 아들. 1539(중종 34) 별시 문과(別時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판교(判校)․예조 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하고, 1547(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 파직당했다. 1549년 강진(康津)에 귀양갔다가 1565(명종 20) 파주(坡州)에 양이(量移) 되었으며, 1567(명종 22)에 풀려 나와, 다시 판교(判校)를 지냈다.

윤결(尹 潔): 1517(중종 12)1548(명종 3). ()는 장원(長源), ()는 취부(聚夫)․성부(醒夫), 정랑(正郞) 시걸(時傑)의 아들. 1537(중종 32) 진사(進士)가 되고,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사가 독서(賜暇讀書)했으며, 주서(注書)가 되어 유구(瑜球)에 표류했던 박 손(朴 孫)의 경험담을 토대로 1546(명종 1)「유구풍속기(瑜球風俗記)」를 저술했다. 1548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나 이해「시정기(時政記)」필화 사건(筆禍事件)으로 참형(斬刑)된 안명세(安名世)를 위해 변명하다가 사형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1567(선조 즉위) 복관(復官)되었다.

윤감(尹 堪): ()는 자심(子諶). 1540(중종 35) 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典籍)․좌랑(佐郞)․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1583(선조 16) 번호적(番胡賊)이 종성(鍾城)을 침범할 때 부사(副使)로 명()을 받아 적()을 토벌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윤극신(尹克新):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윤우신(尹又新): ()는 선수(善修), 시호(諡號)는 정헌(貞憲).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윤자신(尹自新): 1529(중종24)1601(선조34). ()는 경수(敬修), 봉사(奉事) ()의 아들, 광해군의 장인. 명종(明宗) 초에 진사(進士)가 되고, 1562(명종 17)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585(선조 18)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숙소(宿所)에서 실화(失火)하여 문죄(問罪)당했다. 이어 우승지(右承旨)로서 1592(선조 25) 임진왜란에 왕을 호종, 피난을 갈 때 보산연에 이르러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가 되어 종묘의 신주(神主)를 송도(松都)에 임시로 매혼(埋魂)했다. 이해 형조 참판. 1594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이듬해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1597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공조 판서(工曹判書)를 거쳐 다음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호조(戶曹) 판서(判書)를 지냈다. 1600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과 인산도감(因山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으며, 1604(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윤엽(尹 曄):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윤기(尹 祈): 1535(중종30)1607(선조40). 초명은 기(), ()는 백열(伯說), ()는 간보(艮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강원(剛元)의 아들. 1545(인종 1) 아버지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전라도에 유배되자 함께 따라가 시중들었고, 뒤에 풀려 나와 1568(선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의 소두(疏頭)가 되어 을사사화 때 책록(策錄)된 공신호(功臣號)의 삭훈(削勳)을 상소했다. 1576(선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공조 좌랑(工曹佐郞)․감찰(監察)을 거쳐 여러 군현(郡縣)을 다스리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원 부사(水原府使)로서 성천(成川)에 가서 세자를 시종했으며, 1602년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가례(嘉禮) 때 성용도감 제조(成用都監提調)로서 공이 있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승진했다.

윤진(尹 軫): 1548(명종 3)1597(선조30). ()는 계방(季邦), ()는 율정(栗亭), 사간(司諫) 강원(剛元)의 아들. 선공감(繕工監) 봉사(奉事)에 천거(薦擧)되었으나 사퇴하고 장성(長城)에 은거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입암산성(笠巖山城) 수장(守將)이 되어 4()의 수령(守令)과 함께 방어 임무를 띠고 성에 들어갔으나 이미 다른 수령들은 도망했기 때문에 혼자 성을 지키다가 전사, 처 권씨(權氏)도 따라 순절했다. 장성(長城)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윤돈(尹 暾): 1551(명종 6)1612(광해군 4). ()는 여승(汝昇), ()는 죽창(竹窓), 시호()는 효정(孝貞), 극신(克新)의 아들. 기대승(奇大升)․우성전(禹性傳)․조 목(趙 穆) 등에게 배우고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79(선조 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85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교리(校理)․헌납(獻納)을 지내고, 1591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유배당한 정 철(鄭 澈)의 당인 백유함(白惟咸)․류공진(柳拱辰) 등을 학관(學官)에 천거하다 삭직(削職)당했다. 이듬해 복관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1594년 직제학(直提學)에 오르고, 1598(선조 31) 명나라 도독(都督) 유 정(劉 珽)의 접반(接伴) 종사관(從事官)으로 군량 보급에 노력했다. 이어 대사간(大司諫)․이조 참의(吏曹參義)․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병조(兵曹) 참판(參判)․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 1603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이듬해 공조 판서에 올랐으며, 1608(선조 41)에 선조(宣祖)가 붕서(崩逝)하자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를 지내고 예조 판서가 되었으나 장마로 산릉(山陵)이 무너짐으로써 파직(罷職) 당했다.

윤기헌(尹耆獻): ()는 원옹(元翁), ()는 장빈자(長貧子), 호조(戶曹) 판서(判書) 자신(自新)의 아들. 이 이(李 珥)의 문인.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00(선조 33) 죽산 현감(竹山現監), 뒤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윤구(尹 昫): 조선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윤철(尹 瞮): 조선에서 지평(持平)을 지냈다.

윤탁(尹 晫): 조선 때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윤섬(尹 暹): 1561(명종16)1592(선조25). ()는 여진(汝進), ()는 과재(果齋), 시호(諡號)는 문렬(文烈), 지사(知事) 우신(又新)의 아들. 1583(선조 16)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주서(注書)․정자(正字)․교리(校理)․정언(正言)․지평(持平)을 거쳐, 1587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측 기록에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상이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기사를 바로잡았다. 그 공으로 1590년 광국 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고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92년 임잰 왜란 때 교리(校理)로서 순변사(巡邊使) 이 일(李 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상주성(尙州城)에서 적을 맞아 분전하다가 성의 함락과 함께 전사했다.

윤형언(尹衡彦): 조선조(朝鮮朝)에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윤효선(尹孝先):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윤효전(尹孝全): ?1619(광해군 110. ()는 영초(永初), ()는 기천(沂川), ()의 아버지. 1605(선조 38)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왕자 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도총관(都摠管)을 역임 했다. 1613(광해군 5)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책록,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15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1617년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윤형갑(尹衡甲): 조선 때 현감(縣監)으로 지냈다.

윤계(尹 棨): 1583(선조16)~1636(인조14). 자(字)는 신백(信伯), 호(號)는 신곡(薪谷)․임호(林湖),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현감(縣監) 형갑(衡甲)의 아들, 집(集)의 형.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고, 이해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전적(典籍)․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1629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고, 1636년(인조 14)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이해 겨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려다 포로가 되어 참살(斬殺) 당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남양(南陽)의 용백사(龍栢祠),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윤형각(尹衡覺): 1601(선조34)16649(현종5). ()는 경선(景先). 1623(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6()의 벼슬에 올랐으며 감찰(監察)을 거쳐 인제 현감(隣提縣監)을 지냈고,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하였다. 또한 사평(司評)으로 어영대장(御營大將) 원두표(元斗杓)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 후에 김제 군수(金提郡守)를 거쳐 류 탁(柳 濯)의 반란 음모를 적발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파주(坡州)․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이르렀다.

윤형지(尹衡志): 1604(선조 37)1634(인조 12). ()는 경가(景可), 관찰사(觀察使) 세림(世臨)의 후손. 김 유의 문인. 1624(인조 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을 강화(江華)에 호종(扈從), 척화(斥和)의 소()을 올렸고, 1629(인조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고, 이어 박사(博士)에 올라 봉상시 직장(奉常市直長)을 겸임, 1630년 사관(士官)으로 천거되었으나 반대파의 무고로 몰려났다.

윤집(尹 集): 1606(선조 39)1637(인조 15). ()는 성백(成伯), ()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현감(縣監) 형갑(衡甲)의 아들. 22세에 생원(生員)이 되고, 1631(인조 9)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설서(設書)가 되었으며, 1636(인조 14) 이조 정랑(吏曹正郞)․부교리(副校理)에 이어 교리(校理)로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화의를 극력 반대했다. 난 후에 척화론자(斥和論者)로 몰려 청나라에 잡혀가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다가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심양(瀋陽)의 서문(西門)밖에서 사형되었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 평택(平澤)의 포의사(褒義祠),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榮州)의 장암 서원(壯巖書院)에 제향(祭享),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윤형성(尹衡聖): 1608(선조 41)1676(숙종 2). ()는 경임(更任), ()는 기기재(棄棄齋), 관찰세 세림(世臨)의 후손.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64년에 정언(正言)이 되고, 전적(典籍)․공조(工曹) 좌랑(佐郞)․병조(兵曹) 정랑(正郞)․장령(掌令)․헌납(獻納)등을 거쳐 1672(현종 1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이 되고, 뒤에 필선(弼善)․보덕(報德)․사예(司藝)․종부시(宗簿寺) ()․예빈시(禮賓寺) ()․함평(咸平) 현감(縣監)․삼척(三陟) 부사(府使)를 역임, 옥천(沃川) 군수(郡守)에 이르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1674년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사간(司諫)․집의(執義) 등을 거쳐 진주(晉州) 목사(牧使)를 지냈다.

윤형계(尹衡啓): 조선(朝鮮) 때 사예(司藝)를 지냈다.

윤휴(尹 鑴): 1617(광해군 9)1680(숙종 6). 초명은 정(), ()는 희중(希仲), ()는 백호(白湖)․하헌(夏軒), 대사헌(大司憲) 효전(孝全)의 아들. 재학(才學)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1656(효종 7)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자의(諮議)․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공조 좌랑(工曹佐郞), 1658년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 이듬해 지평(持平), 1674(현종 15)에 예빈시(禮賓寺) ()․장령(掌令) ()에 여러 번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專念)했다. 앞서 1660(현종 1)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南人)으로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設 : 1)에 대하여 3년설(2)을 주장, 송시열(宋時烈)과 논쟁을 벌였으나 패하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禮訟)으로 서인이 몰려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자 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에 기용, 동부승지(同副承旨)․이조(吏曹) 참의(參義)․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 등을 거쳐 대사헌으로 제주(祭酒)를 겸임, 우참찬(右參贊)․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지내고, 1676(숙종 2) 도총관(都摠管)․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 이듬해 특진관(特進官)으로 우참찬을 겸했다. 이어 공조 판서가 되고 1679년 우찬성(右贊成)에 승진, 다시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남인이 강온(强穩) 양파로 분열되자 청남(淸南)으로 송시열의 엄벌을 주장했다가 뒤에 탁남(濁南)에 속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갑산(甲山)에 유배, 이어 허 견(許 堅)의 옥사(獄事)에 관련된 혐의로 사사(賜事)되었다. 그의 학문의 태도는 종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신봉된 주자(朱子)의 해석 방법을 배격하고,「중용(中庸)」․「대학(大學)」․「효경(孝經)」등 경전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여 장구(章句)와 주()를 수정함으로써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 황(李 滉)․이 이(李 珥)의 이기설(理氣設)에도 비판을 가하고 두 학설을 절충하여「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정설(定說)이 없었던 심성설(心性說)에 대한 해석을 꾀했다. 정계에 등장한 이후 1584년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지패법(紙牌法) 등을 실시케 하여 세법(稅法)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시행이 중지되고, 문란한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상평창(常平倉)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도록 했으며,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고 북벌(北伐)에 대비토록 했으나 결과가 나빠 모두 폐지되었다. 1689(숙종 15) 아들 하제(夏濟)의 상소로 신원(伸寃)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이도(尹以道): 1628(인조 6)1712(숙종 38). ()는 자유(子由), ()는 용호(龍虎)․오촌(悟村), ()의 아들, 선도(善導)의 동생. 음보(蔭補)로 목사(牧使)에 이르렀고, 1679(숙종 5)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영암 군수(靈巖郡守)․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1682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1685년 우승지(右承旨), 1688년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 1692년 좌승지(左承旨), 1695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700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으며, 1707(숙종 33)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오르고, 1710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윤이명(尹以明): 1629(인조 7)1682(숙종 8). ()는 문숙(文叔), ()는 취선(醉仙), 부사(府使) ()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아버지와 형을 모두 잃어 고아가 되었다. 효종(孝宗) 때 왕의 특지로 참봉(參奉)에 등용, 1660(현종 1)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다. 문장에 능했고 전서(篆書)․예서(隸書)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義)에 추증(追增)되었다.

윤빈(尹 彬): 1630(인조 8)?. ()는 자문(子文), 형각(形殼)의 아들. 인조(仁祖) 때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1650(효종 1)에「고감록(古鑑錄)」을 저술하여 왕에게 바쳤다. 1682(숙종 8) 군수(郡守)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고, 헌납(獻納)․사간(司諫)을 거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며,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송시열(宋時烈)을 두둔하다 국문(鞠問)당했다.

윤성준(尹星駿): 조선 때 이조 참의(吏曹參義)를 역임하였다.

윤적(尹 摘): ()는 자화(子華).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윤시명(尹時鳴): ()는 원숙(遠叔).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윤의제(尹義濟): 1640(인조 18)?. ()는 정백(正伯), 우찬성(右贊成) ()의 아들. 1675(숙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으로 기용되고, 정언(正言)․지평(持平)․교리(校理)․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680년 헌납(獻納)․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이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아버지가 사사(賜死)될 때 극변(極邊)에 유배되어 병사했다. 1691(숙종 17) 신원(伸寃)되었다.

윤이건(尹以健): 1640(인조 18)1694(숙종 20). ()는 체원(體元), ()는 일소제(一笑齋), 진사(進士) ()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73(현종 1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에 보직되고, 1674(현종 15) 2차 예송(禮訟)으로 송시열 등 서인이 실각하자 삭출(削黜) 당했다가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南人)이 추방당한 뒤 주부(主簿)가 되었다. 이어 금성 현령(金城縣令)․공조 좌랑(工曹佐郞)․진산 군수(珍山郡守) 등을 역임, 1688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추방되자 파직, 김해(金海)에 유배되었다가 1694(숙종 20) 갑술 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실각 당하자 풀려 나와 고향에 돌아가던 중 청주성(淸州城) 밖에서 객사했다.

윤홍(尹 弘): 1655(효종 6)1731(영조 7). ()는 정원(靜源), ()는 정재(淨齋), ()의 손자, 판관(判官) 이선(以宣)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5(숙종 11) 음보(蔭補)로 광릉 참봉(光陵參奉)이 되고, 1721(경종 1) 능주 목사(綾州牧使)로서 은퇴, 낙향했다. 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금산(金山)에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풀려 나와 이듬해 장악원정(掌樂院)․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군자감(軍資監) ()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오위장(五衛將)을 지내고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에 이르렀다.

윤덕준(尹德駿): 1658(효종 9)1717(숙종 43). ()는 방서(邦瑞), ()는 일암(逸庵), 시호(諡號)는 효정(孝靖), 관찰사 반()의 아들. 1679(숙종 5)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 등을 거쳐 1694년 교리(郊理)가 되고, 1701년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상소하여 장희재(張希載)의 죄를 다스리게 했다. 그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승진,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우참찬(右參贊)․예조(禮曹) 판서(判書)․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1712년 이조(吏曹) 판서(判書)가 되었다. 이어 공조 판서 겸 종부시(宗簿寺) 제조(提調)를 지내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가 1716년 사건의 처리에 공평하지 않았다는 탄핵을 받고 한때 파직, 후에 좌참찬(左參贊)이 되어 다시 판의금 부사를 겸했으나 과옥(科獄)을 잘못 다스려 삭직(削職)되었다. 사후(死後)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의 청으로 복관(復官)되었다. 경사(經史)와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해서(楷書)․초서(草書)․전서(篆書)․예서(隸書)를 모두 잘 썼다.

윤취은(尹就殷): 조선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윤천경(尹天경): ()는 일주(一柱). 조선 때 성권(成權)을 지냈다.

윤일(尹 鎰): 조선 때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윤행임(尹行恁): 1762(영조 38)1801(순조 1). ()는 성보(聖甫), ()는 방시한재(方是閑齋)․석재(碩齋),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용안군(龍安君) 종주(宗柱)의 손자, 익찬(翊贊) ()의 아들. 1782(정조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홍문관(弘文館) 벼슬에 등용되고, 검열(檢閱)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다. 이어서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주서(注書)를 역임, 1792년 이조(吏曹) 참의(參義)․대사간(大司諫), 다음해 비변사(備邊司) 제조(提調)를 역임하는 동안 시파(時派)로서 특히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1794년 정리사(整理使)가 되고, 1800년 정조(正祖)가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왕의 시장(諡狀)을 썼다. 이해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도승지(都承旨)로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를 겸직,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승진, 이듬해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헌종(憲宗) 초에 신원(伸寃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정현(尹定鉉) 1793(정조17)1874(고종11). ()는 정수(정叟), ()는 침계(梣溪), 시호(諡號)는 효문(孝文), 행임(行恁)의 아들. 1843(헌종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규장각(奎章閣) 직각(直覺)을 거쳐 교리(校理)가 되고,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조(吏曹) 참의(參義)를 역임했다. 1848년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이듬해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고, 1850(철종 1) 지실록사(知實錄事)로 찬수 당상(纂修堂上)․교정 당상(校正堂上)을 겸직, 「헌종실록(憲宗實錄)」의 편찬과 교정에 참여했다. 그 뒤 예조(禮曹) 판서(判書)․함경도(咸鏡道) 관찰사(觀察使)․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지내고 1856년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으로 주자소주관(鑄字所主館) 당상(堂上)이 되어 규장각의 활자를 주자(鑄字),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이어 판의금부사에 재임했다가 185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특히 비지(碑誌)에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윤병정(尹秉鼎): 1822(순조22)?. ()는 사홍(士弘), ()는 파강(巴江), 시호(諡號)는 효문(孝文), 태주(泰周)의 아들. 유신환(兪莘煥)의 문인. 1851(철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여러 청환(淸宦職)을 거쳐 1857년 부사로 재직 중 암행어사(暗行御史) 이정현(李正鉉)의 탄핵으로 파직(罷職) 당했다. 뒤에 다시 등용(登用)되어 1861(철종 12) 대사성(大司成), 1873(고종 10)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 1885년 이조(吏曹) 판서(判書)․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뒤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윤행진(尹行晋): 조선 때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윤창기(尹昌棋): ()는 자응(子膺).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