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배천유씨시조(白川劉氏),유상희(劉相晞),배천유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7 13:12 수정일 : 2018-03-02 22:23

배천유씨의 연원(白川劉氏의 淵源)

배천유씨의 원류를 살펴보면 아득한 원대는 알 길이 없고, 신라 말기(810년대)에 와서 백주(白州)의 호족인 정조(正朝) 유상희(劉相晞)라는 분이 있어, 예성강(禮成江)하구를 거점으로 하여 한강(漢江) 하류 지역에서 해상 무역을 하면서, 여러 군현(郡縣)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특히 고려왕씨가문(高麗王氏家門)과는 유대 관계가 깊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을 위하여, 개주(開州), 정주(貞州), 염주(塩州), 백주(白州)의 4주와 강화(江華) 교동(喬洞), 하음(河陰)의 인력을 동원하여, 개성(開城) 입구 예성강(禮成江)변의 창능(昌陵)에 영안성(永安城)을 쌓고 궁실을 지어 주었다. (고려사를 비롯하여, 왕씨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음)

그런 까닭에 학자들을 비롯하여 우리는 유상희(劉相晞)를 시조로 확신을 하고 모시는 바이다. 물론 그 상대에 대한 기록은 현재로서는 전무한 것이다.

려사(麗史)에 의하면, 개국 초기에 서경(西京)을 진수하면서 패서(浿西.지금의 황해도) 지방의 호족 세력을 이주 시킬 때 우리 배천 유씨도 일부가 서경 및 함경도 지방으로 이사를 하여 진성(鎭姓)으로 정주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지금의 황해도 및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는 유씨는 거의가 이분의 자손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여겨지는 바이다.

유씨의 족보(族譜)는 유홍도(劉弘道, 主簿公)의 6대손인 설(設)께서 이조(李朝) 宣組 37년(1604년)에 이르러 편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세록(世錄)이 유실되어 상고 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바다.

2차 수보는 肅宗 15년(1689년)에 간행했다. 보책을 보면 홍도의 고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신 시준(時俊)을 1세로 하여 편찬하였으나, 배천을 본관으로 할 만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선대에서 백방으로 고문헌을 찾아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1788년에 극량(克良. 武毅公)의 5대손인 찬좌(贊佐)께서 거창(居昌)파 수보소에서 거창세계를 열람하였다. 그 을묘(乙卯, 1795년)보를 편수 할 때 상계에 전(筌)을 1세로 하여 10세인 현(賢)까지를 검교대장군공의 윗대로 하였다. 이때 국추(國樞)는 배천군으로 평(評)은 은천군(銀川君)으로 시준(時俊)는 검교대장군인데 윤사대부(倫史大夫) 수문관(修文館) 학사(學士) 추봉태사(追封太師)예부상서(禮部尙書) 부흥군(復興君)으로 하여 배천 본관의 근거를 만들었다. 전(筌)이하 현(賢)까지는 우리 보첩 외에는 고려사를 비롯하여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우리 배천유씨 세계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문헌이 발견되었으니, 일본통치 초기에 개성(開城)에서 출토된 조의대부검교상서우산기상시보문각학사(朝議大夫檢校尙書右散騎常侍寶文閣學士) 백주(白州) 유석(劉碩)의 묘지석이 나타난 것이다.

출토 이후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 배천유씨의 조상임이 입증 된 것이다. 묘지석문에는 공의 부는 0 0이요(글자가 마손되어 판독 불능), 조부는 한영(漢英)이요, 증조부는 조(祚)요, 자는 광주(光冑)요, 배는 이씨(李氏)라고 되어 있어, 5대의 세계가 정연하니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우리 배천유문의 선조들이시다.

또 채인규(蔡仁揆)의 묘지 문 및 평강(平康)채씨(蔡氏) 족보에 채인규(蔡仁揆)의 모친은 배천유씨니 그의 부친은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창서(昌緖)요, 조부는 상장군(上將軍)방저(邦底)요, 증조부는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승(升)이라 되어 있으니 우리 배천유씨의 상대 세계가 소연하게 밝혀졌다.

위 사실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1975년도에 간행한 유씨 대동보에 상서공(尙書公) 전(筌)의자(子)는 삼 형제이나, 묘지(墓誌)에는 거타군(居陀君) 한 분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분의 고려 귀하 연대가 유씨 족보마다 큰 차이로 기록되어 있고 사료에 전혀 기록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겨 왔던 것이다. 또 10여 년 전 충남 서산 민가에서 출토된 배천유씨 기사 보(己巳 譜 1685년) 상권과, 을묘 보(乙卯 譜 1796년) 1, 2권을 입수하면서부터 의문이 생겨, 여러 해 동안 도서관, 규장각, 박물관등과 타 문중 족보등을 통하여 면밀히 연구 검토한바, 틀림이 없음을 확신하고 2002년 5월에 대종회의 의결을 거쳐 잘못된 상계를 바로잡고, 거창(居昌) 강능(江陵)파와 대동이 안 됨을 통고하고, 상기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동중리 산 23-12 임야를 구입하여, 시조 상희(相晞)를 위시하여 각 파의 중시조등 선조 17위에 대한 설단을 하여 후손들이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대 묘소가 대부분 황해도 개풍군 일대에 산재하여 있는 까닭에 통일이 되는 날 까지는 이곳에 영혼이 안주하여 후손의 안위를 보호 할 것으로 믿고, 늦게나마, 세계를 바로 잡고 구천에 계시는 조상님들에게 불효를 면하게 된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기는 바다.


역대 인물-배천유씨조상인물

신라시대 인물

유상희(劉相晞). 신라 말기(810년대) 호족인 정조(正朝)로,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을 위하여, 현재의 개풍군 예성강 근처 창능(昌陵)에 영안성(永安城)을 축조하여 주어, 후에 고려 건국의 기점을 이룩한 바 있어,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있음.

고려시대 인물

유한영(劉漢英).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유석(劉 碩). 조의대부검교상서 좌복야 우산기상시보문각학사.

유승(劉 升). 수사공 좌복야 문하시중. 은천군(銀川君).

유원도(劉元度). 태사감(太史監)으로, 배천 토산(免山)에 별궁인 중흥궐(重興闕)을 창건케 함.

유방저(劉邦底). 상장군.

유창서(劉昌緖). 감문위상장군.

유시준(劉時俊). 검교대장군.

유성준(劉聖俊). 윤사대부 수문관학사.

유춘(劉 椿). 친어군 중랑장.

유환(劉 環). 봉순대부 판내부시사 겸 진현관대제학

유춘봉(椿鳳). 검교장군.

조선시대 인물

유강(劉 强). 봉열대부 중화군사.

유한성(劉漢成). 예빈시정.

유도인(劉禱仁). 학행고명 불이 경학전념.

유호인(劉好仁). 장흥현감, 전무경학, 호 천방옹.

유맹건(劉孟乾). 통훈대부연변판관.

유필(劉 珌). 통훈대부이성현감.

유서정(劉瑞井). 등 문과. 병조좌랑개성교수.

유한충(劉漢忠). 등 문과. 충주목사.

유한신(劉漢信). 등 무과. 풍천부사.

유한량(劉漢良). 등 무과. 무장현감, 보성군수, 임진란시 연안성 대첩공신. 내자시정.

유극량(劉克良). 등 무과. 옥구현감, 고령진병마첨절제사, 곽산군수, 장연부사, 회성부사, 홍주목사, 길주목사, 승정원좌승지, 충청수군절도사, 임진난시 부원수로 임진강에서 순절. 시호 무의공(武毅公).

근대 인물

유순하(劉舜夏): 김종석 등 여러 동지들과 같이 자택을 지하운동 본부로 하고 항일운동을 함

유택선(劉澤瑄): 송응국 외 여러 동지들과 배천 일대에서 1919년 3월 30일 배천 장날에 만세 시위를 하다 체포되어 투옥됨

유재현(劉在賢): 택선과 같이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됨.

유재면(劉在冕):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 민족의 정신적 양식을 보급하는 항일운동을 하였음.

유재원(劉在元). 재흥(在興). 주현(周玄). 재호(在鎬) : 1926년 배천 청년회를 창립하여 조직을 통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음

유연희(劉演羲): 동학혁명 시 왜군과 전투 중 그들에게 체포되어 1895년 5우러 14일에 순국하였음

유종현 : 1919년 3․1 운동시 황해도 백주지역에서 의거시위를 하다가 동년 3월 24일 일경에 체포되어 8개월의 형을 받음.

유재성 : 한국 최초의 독일 베를린 공대 공학박사 학위 취득 초대 인천제철 사장 동아대학장 역임

 

배천유씨(白川劉氏) 대종회 연혁

민족상쟁의 6․25 동란으로 인하여 황해도 이북에 주로 정주하고 있던 배천유씨들은 이남으로 피난을 하여 고달픈 생을 영위하느라, 대종회를 만들지 못하고 각지 사방으로 헤어져, 삶을 이어나가는데 급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찾게 되면서 대종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68년 제1회 총회를 갖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간 두 번에 거친 족보 간행과, 몇 몇 중시조의 추모비를 설단 하여, 매년 음력 10월에 시향을 들어왔으며, 이번 시조 상희(相晞)를 찾기 전까지는, 강능(江陵)유씨, 거창(居昌)유씨와 더불어 전(筌)의 삼형제손으로 여기고, 유씨 대동보 간행에 참여 하기도 하고, 영천(永川)의 전(荃)의 시향에 참여하여왔던 것이다. 그러나 2002년에 이르러 우리의 정확한 상계를 찾음으로서, 2003년에 경기도 연천군 왕진면 동중리 산23-12에, 시조를 비롯한 17위의 선조들의 설단을 마치고, 제례를 갖추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기에 이른 것이다. 그간 종회를 운영하여 온 회장들(周植, 鳳植, 榮奎, 在相, 德澤, 淳求, 炳燦, 命植, 榮善)과 殷善 현 회장의 노고에 의하여 대종회가 발전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