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인동유씨시조(仁同兪氏),유승단(兪升旦),인동유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7 09:10 수정일 : 2018-04-11 15:4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인동유씨(仁同兪氏)의 시조(始祖) 유승단(兪升旦 시호 文安公)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신(文臣)이며 대학자(大學者), 초명은 원순(元淳)이며 본관(本貫)은 인동(仁同)이다.

고려(高麗) 의종 22년(1168) 경북인동(현재 구미시)에서 출생(出生), 명종(明宗)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시학(侍學)을 지내고 희종(熙宗)때에 남경(南京)(지금의 서울)의 사록 참군사(司祿 參軍事), 고종(高宗)때 수궁서승(守宮暑承)이 되고 이어 사부(師傅)가 되다.

1223년 (고종10년) 예부시랑(禮部侍郞),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거쳐 1227년 수찬관(修撰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다음해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고 1232년(고종19년),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에 올랐다.

이때 몽고가 침입하자 권신최우(權臣崔瑀:본관 우봉(牛蜂))의 강화천도(江華遷都)주장을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최우일파에게 밀려 1232년(고종19년)8월 가을에 타계했으며 고종(高宗)은 시호(諡號)를 문안공(文安公)이라 추서하였다.

인동(仁同)은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초에는 사동화현(斯同火縣)․수동현(壽同縣)이라 하다가 삼국통일 후에 인동현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경산부(京山府)․약목현(若木縣) 등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선조 때 인동부(仁同府)로 승격되고 1895년 인동군이 되었으며, 1914년 군이 폐지되고 그 일부 지역은 인동면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승석(承碩)의 아들 수기(守基)가 별장(別將)을 지냈고, 손자 서(瑞)가 승봉랑(承奉郞)과 중문지후(中門祗侯)를, 증손 요(堯)가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서운관 부정(書雲觀 副正)을 역임했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요(堯)의 아들 사철(師哲)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했고, 손자 헌(獻)이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참판(禮曹 參判)을, 그리고 헌(獻)의 4대손 진(鎭)이 세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兵曹 正郞)ㆍ직제학(直提學)을 지냈고,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정3품)과 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을 거쳐 춘추관 수찬관(春秋官 修撰官)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동유씨는 전국에 1,4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인동유씨조상인물

유승석(兪承碩) 고려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역임

유성렬(兪成烈) 고려 때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

유수기(兪守基) 유승석(兪承碩)의 자(子)로써 시조(始祖) 문안공(文安公)의 계자(系子)로 인동유씨(仁同兪 氏)의 이세(二世)이며 사순위 별장(司巡衛別將)을 역임

유사철(兪師哲) 시조(始祖) 문안공(文安公)의 5세손(五世孫)으로서 경상도 관찰사(현 도지사)를 역임, 관찰사에 부임한 후 선정을 베풀고 슬기롭고 엄력하게 처신하여 청백리로 존경을 받았다.

왕의 명에 의거 세봉사(世奉使:외교사절)로 중국을 다녀오다가 황해도 황주에서 별세하여 황주극성(黃酒克(城)에 안장되었다.

유헌(兪 獻) 조선조(朝鮮朝) 세종(世宗)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유진(兪 鎭) 시조(始祖) 문안공(文安公)의 9세손(九世孫) 자(字)는 사우(士虞), 호(號)는 학촌(學村). 1462년(세조 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1476년(성종 7) 중시(重試)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 秋館修撰官)을 역임. 연산군이 집권하자 임사홍 일파가 감자사화를 일으키자 뛰어난 문장 으로 상소문을 올려 임사홍 일파를 척결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유전(兪 琠) 시조(始祖) 문안공(文安公)의 13세손(13世孫)으로 자는 경미(景美), 1555년2월 29일생으로 조산 중기의 무관, 적순부위 충무위 부사정(忠武偉副司正)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정암(李廷馣)등과 함께 왜병을 무찌르기로 결의하 고 500여명의 의병을 모아 황해도 연안성(延安城)을 지키면서 왜병 3000여명을 섬멸하고 주민들을 구제하였다.

이 승리를 연성대첩(延安大捷)이라 하고 승리의 공으로 부사정(副詞正)으로 특진되었으며 별세 후 연안현충사에 안장되었다.

유태장(兪泰章) 예조정랑(禮曹正郞)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역임

유치경(兪致慶) 1848-1910  호(號), 도진(桃津) 조선말기의 학자. 의병참좌 및 후군장으로 일제침략에 항거하여 의병활동을 류인석 등과 함께 주도 하였다. 시조(始祖) 문안공(文安公)의 24세손(24世孫)으로 황해도 연백에서 출성, 해서지방 성리학(性理學)의 선각자이자 석학으로 유학을 강론하면서 민중을 계도하고 국난을 당하자 의병의 기수가 되어 평산, 제천 등지와 만주 일원에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10년 타계하였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유가족의 종손 하근(河根)에게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