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원주원씨(原州元氏),원주원씨시조,원경(元鏡),운곡공계,원성백계,시중공계,원주원씨조상

작성일 : 2017-04-26 13:34 수정일 : 2018-01-07 19:12

원주원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원씨(元氏)는 중국(中國) 하남(河南)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나라 양왕(襄王:18대 왕, 재위기간 : 기원전651619)때 위대부(衛大夫)에 봉해진 원훤(元咺)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 나라 원씨(元氏)의 시조(始祖)643(고구려 보장왕 2) ()나라 태종(太宗 : 2대 왕, 재위기간 : 627649)이 고구려(高句麗)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사람인 원경(元 鏡)이다.

원주(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원씨(元氏)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운곡공계(耘谷公系 : 원경을 시조로 함)원성백계(原成伯系 : 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시중공계(侍中公系 : 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 등 크게 세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하고 있으며,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원충갑(原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 최근에 그가 원성백계(原城伯系) 극유(克猷)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合譜)가 되었다.


원주(原州)는 강원도(江原道) 원성군(原城郡)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평원군(平原郡)인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 북원소경(北原小京), 940(고려 태조 23)에 원주로 고쳤다. 그후 일신현(一新縣)․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 등을 거쳐 원주목(原州牧)이 되었으나 1310년 성안부(成安府)로 강등, 1353(공민왕 2)에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1895(고종 32) 원주군(原州郡)이 되었으며 1955년 일부가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각 계통별(系統別)로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운곡공계(耘谷公系)에서는 호장(戶長) 극부(克富)7세손 천석(天錫)이 유명했다.

그는 고려(高麗) 말에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득세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고향인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다.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이 당세에 유명하여 방원(芳遠 :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신조(新朝)에 불사(不仕)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여사제강(麗史提綱)」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여러번 요직에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이 그를 만나러 치악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치악산 계곡으로 피신하여 끝내 태종을 만나지 않았다.

태종이 계곡의 석대(石臺)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下賜)하고 돌아와서 천식의 아들 형()을 풍기 감무(豊基監務)로 삼았으며, 태종이 앉았던 바위는 <태종대(太宗臺)>로 불렀다고 한다.

운곡(耘谷) 천석은 치악산에 묻혀 살며 망국(亡國) 고려(高麗)를 회고하는 야사(野史) 6권과 시사(詩史) 2권을 저술하여 운명할 때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그리고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불에 태웠다고 한다.

운곡(耘谷)의 증손 보륜(甫崙)은 세종(世宗) 때 지평(持平)과 교리(校理)를 역임했고, 6세손 황()은 선조(宣祖) 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진해(振海)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필명(筆名)을 떨쳤다.

고려 개국공신(考慮開國功臣)으로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던 극유(克猷)의 후손에서는 좌복야(左僕射) (: 극유의 9세손)의 아들 부()가 고려 원종(元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長事)를 지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는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고금록(古今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한편 첨의평리(沾衣評理) 선지(善之 : 부의 손자)의 아들 송수(松壽)는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피난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신 돈(辛 旽)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그 울분으로 병사했다. 특히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송수의 아들 상()은 고려말에 김 저(金 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 색(李 穡)과 함께 혹형을 당한 끝에 정몽주(鄭夢周)의 구제소(救濟疏)로 광주(光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장단(長湍)의 대덕산(大德山)에 은거(隱居)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났었던 창명(昌命 : 상의 아들)은 세종(世宗) 때 조견례(朝견見禮)르 올리려 궁전에 들었을 때 난간에 중() 옷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임금에게 배알하여 상감께서는 신 돈(辛 旽)이 나라 망친 일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 금중(禁中)에 승니(僧尼)의 자취가 있으니 전철을 밟을까 저어합니다라고 말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인맥(人脈)으로는 별장(別將) ()의 아들 호()가 유명했다. 1423(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王位) 찬탈 음모가 무르익어 가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있다가 병을 핑계하고 벼슬을 버린 후 원주(原州) 남송촌(南松村)에 은거(隱居)하였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내쫓기자 호()는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조석(朝夕)으로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예()를 다했으며, 단종이 사사(賜死)당하자 3년 상을 치르고 원주 옛 집으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이 수년이 지나도록 얼굴 한번 볼 수 없었을 만큼 폐문 불출하였다.

세조(世祖)의 좌익 공신인 조카 효연(孝然 : 원산군 황의 아들)이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찾아와 문 앞에서 뵙자고 간청했으나 그는 방 안에서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세조가 호조 참의(戶曹參議)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내가 죽거든, 업어다 앉히라고 과격하게 불응했다.

어느날 강원도 관찰사가 도사처럼 평복차림으로 호를 찾아 갔을 때 야인 인줄로만 알고 나가 맞았다가 보니 관찰사라 손을 내두르며 도망쳐 방안에 들어가서 고리를 잠그고 자기 마음에 때가 묻었다고 통곡해 울었다고 하며, 앉은나 누우나 반드시 장릉(莊陵 : 단종 묘)이 있는 동()쪽으로 머리를 향했고, 그가 사는 남송촌도 관부(官府)에 가까워 그 오예(汚穢)의 기운이 젖어 든다는 이유로 보다 골짜기가 진 주천현(酒泉縣) 산골로 들어가 평생을 마치었다.

임진왜란 때 아들 유남(裕男)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호()는 김덕수(金德壽)의 문인(門人)으로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1567(명종 22) 무과(武科)로 진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미포(龜尾浦)․마탄(馬灘)․운무(雲霧) 등지의 작전에서 전공을 올려 적진(敵陣)을 여주에서 완전히 봉쇄했던 지장(知將)이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겸 경기․강원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북로(北路)의 왜군 토벌 임무를 맡고 김화(金化)로 진군 도중 적의 복병을 만나 포위되어 깊은 산 낭떠러지 끝으로 몰리게 되자 투신하여 살신(殺身)하였다. 적군은 호()의 머리를 잘라 김화(金化) 고을 성문(城門)에 매어 달고 <조선 군사와 백성이 모두 귀순했는데 원 호만이 우리에게 항거하였기로 이같이 벌을 준다>라는 글귀를 써붙여 놓았다.

특히 호는 청백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의 고장인 단천(端川)의 군수(郡守)로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은반지 하나를 사 낀 일이 있었다. 이를 본 호는 <은고지(銀庫地) 원으로서 은물건을 우리집에 두다니……>하며 아내와 물건을 사온 종을 매질하고는 은가락지를 빼앗아 버렸다.

호의 아들 유남(裕男)1583(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용력(勇力)으로 이름을 떨쳤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 3등공신(政社三等功臣)으로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유남과 함께 인조반정에 유공하여 정사 2등공신으로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던 두표(斗杓)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어영부사(御營副使)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비했고, 효종(孝宗) 때 좌찬성(左讚成)․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그밖의 인물로는 목사(牧使) 명귀(命龜)의 아들 경하(景夏)가 영조(英祖) 때 이조 및 병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副事)로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문장(文章)과 검소한 생활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계손(繼孫)은 시()․서()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져 학문(學問)과 충절(忠節)을 지켜 온 원주 원씨의 전통을 지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원씨(原州元氏)는 남한(南韓)에 총 126,6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원주원씨조상

운곡공계(耘谷公系)

원경(元 鏡) 643(고구려 보장왕 2) 천문(天文)․정치(政治)․전쟁(戰爭)․도덕론(道德論)을 설유(說諭)하는 원()․홍()․신()․곽()․지()․길()․방()․위() 등 특선된 8학사(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파견되어 와서 우리 나라 원씨(元氏)의 시조(始 祖)가 되었다.

그는 고구려에 들어와서 국내를 순방(巡訪)하며 만인에게 예악(禮樂)을 지도하고 여당간의 국교(國交)를 회복시켰으며, 국왕(國王)을 승인하도록 만반(萬般)의 정세와 일절(一切) 사정을 당태종(唐太宗)에게 녹주(錄奏)하니, 태종이 사자(使者)를 보내 보장(寶藏)을 고구려 의 왕()으로 예를 갖추어 봉()하였다.

보장왕(寶藏王)은 그에게 고구려의 좌명공신(佐命功臣)․대당금자광록대부(大唐金紫光祿大夫)․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보장왕은한때 선정(善政)을 베풀더니 차츰 이웃나라를 침해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여당간의 국교(國交)까지 깨지게 되어, 그는 645(신라 선덕왕 14) 칙지(勅旨)에 따라 고구려(高句麗)를 버리고 신라로 가니 선덕여왕이 그를 상빈(上賓)으로서 예우(禮遇)하였다.

원천석(元天錫) ()는 자정(子正), ()는 운곡(耘谷). 고려 말의 정계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는 한편, 이 색(李 穡) 등과 교제하면서 시사(時事)를 개탄했다. 일찍이 방원(芳遠:태종)을 가르친바 있어 조선 건국 후인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자주 기용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작품으로 망국 고려를 회고한 시조 1수가 전하며, 야사(野史) 6권을 저술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랐다고 한다. 원주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원보륜(元甫崙) ()는 수옹(壽翁). 조선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원진해(元振海) 1594(선조 27)1651(효종2)

()는 윤보(潤甫), ()는 장륙당(藏六堂), ()의 아들. 1616(광해군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효종 즉위 전에 그의 사부(師傅)를 지내고 만년에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에 이르렀다. 56세부터 이미 글씨로 이름났으며 경전(經傳) 공부에 전심, 일가를 이루었다.

원소(元 素) 조선(朝鮮) 때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지냈다.

원내인(元乃仁) 조선조(朝鮮朝)에 헌납(獻納)을 지냈다.

원자돈(元自敦) 조선 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원성백계(原城伯系)

원극유(元克猷) 918(고려 태조 1)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亂暴)해진 궁예(弓裔)가 민심(民心)을 잃자 왕건(王建)이 고려를 개국(開國)할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병부령(兵部令)을 지냈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

원부(元 傅) ?1287(충렬왕 13)

시호(諡號)는 문순(文純), 삼한공신(三韓功臣) 극유(克猷)9대손. 문과(文科)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이 되고, 1269(원종 10)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충렬왕 초에 찬성사(贊成事)․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등을 지내고, 1277(충렬왕 3)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류 경(柳 璥)․김 구(金坵) 등과 함께 「고종실록(高宗實錄)」 찬수(撰修)의 명()을 받았으나 사고(史藁)를 완성하지못했으며, 1284년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고금록(古今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죽었다.

원경(元 卿) ?1302(충렬왕 28)

중찬(中贊) ()의 아들. 성품이 호쾌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어려서부터 몽고어를 배워 여러 번 충렬왕 및 공주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원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았다. 충렬왕 때 중랑장(中郞將)을 거쳐 삼도 인물 추쇄별감(三道人物推刷別監)을 지냈고, 충렬왕이 응방도감(鷹坊都監)을 설치하자 그 부사(副使)가 되어 여러 차례 매()를 바치러 원나라에 다녀왔다.

1295(충렬왕 21) 좌부승지(左副承旨), 이듬해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거쳐 1297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공주의 상()을 알렸고, 다음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삼사사(三司使)․중경 유수(中京留守)를 거쳐 다시 동지밀직 사사로 죽었다. 일찍이 원나라의 무략장군(武略將軍)․정동행중서성도진무(征東行中書省都鎭撫)가 되어 금부(金符)를 받았다.

원충갑(元沖甲) 1250(고종37)1321(충숙왕8)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의 별초(別抄)에 들어가 있다가 1291(충렬와 17) 합단(哈丹)이 침입하여 원주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무찔러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성을 고수했다.

이 공으로 추성분용광국공신(推誠奮勇匡國功臣)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삼사 우윤(三司右尹)에 올랐으며, 1303(충렬왕 29) 간신 오기(吳祁)를 홍자번(洪子藩)과 함께 잡아 원나라에 압송했고, 충선왕때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에 올랐다.

원관(元 瓘) 중찬(中贊) ()의 아들. 1298(충렬왕 24)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1309(충선왕 1) 밀직사(密直使)가 되었다. 1313(충숙왕 즉위) 상황(上王 : 충선왕)의 명을 받고 원나라 항주(杭州)에 가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있었던 혜인사(慧因仁寺)의 수리를 위해 전토(田土)를 희사했다.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원충(元 忠) 1290(충렬왕16)1337(충숙왕복위6)

()는 정보(正甫), 찬성사(贊成事) ()의 아들. 8세 때 동면도감 판관(東面都監判官)이 되고, 18세 때에 충선왕의 연저(燕邸)에 불려 가서 총애를 받았으며 예빈 내급사(禮賓內給事)가 되어 왕주(王鑄)의 성명(姓名)을 하사 받았다. 우사윤(右司尹)을 거쳐 대언(代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어림을 이유로 굳이 사양하다가 왕의 노여 움을 사서 하사 받은 성명을 추삭(追削)당하고, 지철주사(知鐵州事)로 좌천되었다.

뒤에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압록강(鴨綠江)까지 가서 영접, 옛 총애를 다시 얻어 대언에 임명되었다. 밀직사사(密直司使)․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 1321(충숙왕 8) 충숙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다녀와서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 臣)이 되었다.

그후 퇴임했다가 1330(충혜왕 즉위) 다시 찬성사가 되어 원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들어갔다.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자 파면, 그대로 원나라에 머물다가 원나라에서 무덕장군 겸 제조정동도진무사사(武德將軍兼提調征東都鎭撫司事)가 되고 1336(충숙왕복위 5) 귀국했다.

원송수(元松壽) 1323(충숙왕10)1366(공민왕15)

시호(諡號)는 문정(文定), 첨의평리(僉議評理) 선지(善之)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춘추관 수찬(春秋館修撰)에 보직되어 안 진(安震)․이제현(李齊賢) 등의 추천으로 그들이 공무로 시강(侍講)에 나가지 못할 때마다 충혜왕에게 시강했으며, 충목왕 때 헌납(獻納), 충정왕 때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 위하자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겸임하여 국가 기밀의 사무를 맡아보면서 더욱 왕의 신임을 받게 되고, 지주사(知奏事)에 전임되어 관리의 전형(銓衡)에 참여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이 있자 왕을 모시고 피난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랐으며, 8년 동안 기무(機務)를 관장했으나 수차 사퇴를 주청하여 결국 이 강(李 岡)과 교대한 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어 충근찬화공신(忠勤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1365(공민왕 14)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나 얼마 뒤 신 돈(辛 旽)의 미움을 받아 파직, 이듬해 병사했다. 특히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고, 예학(禮學)에 밝았다.

원호(元 顥) ?1357(공민왕 6)

찬성사(贊成事) ()의 아들. 18세 때 음보(蔭補)로 호군(護軍)에 임용되어 삼사좌사(三司左使)․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54(공민왕 3)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원나라에서 장사성(張士誠) 토벌을 위한 원병(援兵)을 요청하자 이를 피하려고 양광도 도순문사(楊廣 道都巡問使)로 임명되기를 청했으나 왕의 허락을 못 얻고 성안부원군(成安府院君)에 봉해져 원정군에 끼여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원상(元 庠) 시호는 희정(僖靖), 송수(松壽)의 아들. 군기시 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내다가 1389(공민왕 1) 김 저(金 佇)의 옥사(獄事)에 관련되어 광주(光州)에 유배(流配). 1391년 국대비(國大妃)의 생일(生日)을 맞아 특사(特赦)로 풀려 나온 뒤 장단(長湍)의 대덕산(大德山) 에 은거했다. 조선 개국 후 덕망으로 누차 등용되었으나 응하지 않다가 1413(태종 13)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거쳐, 1435(세종 17)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원훈(元 訓) ()는 문숙(文叔), ()는 휴헌(休軒). 공민왕(恭愍王) 때 방원(芳遠 : 태종)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공민왕으로부터 <()>으로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상호군(上護軍)․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우문관 태학사(右文 館太學士)․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조선개국(朝鮮開國) 후에 태종(太宗)이 고교(故交)의 의()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고려에의 충절(忠節)을 지켰다.

원숙(元 肅) ?1425(세종 7)

()의 아들. 1401(태종 1) 문과(文科)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1418(세종 즉위) 좌대언(左大言)이 되었다.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뒤 1421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태상왕 봉숭도감 제조(太上王封崇都監提調)를 겸했고, 이듬해 태상왕인 태종이 죽자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를 겸직했다. 이어 대사헌(大司憲)․지신사(知申事)를 역임, 1425년 인수 부윤(仁壽府尹)에 이르렀다.

원창명(元昌命) 시호(諡號)는 양간(良簡). 조선 세종(世宗) 때 시사(始仕)하여 세조(世祖) 때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원자직(元自直) 조선조(朝鮮朝)에 장령(掌令)을 지냈다.

원민생(元閔生) ?1435(세종 17)

시호(諡號)는 양도(襄悼), 검교중추원부사(檢校中樞院副使) ()의 아들. 판사(判事) 민 부(閔 富)에게 양육되어 민씨 성을 쓰다가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사역원 부사(司譯院副使)에 이르러 원씨로 환원했다. 중국어에 능하여 1403(태종 3) 계품사(計稟使)의 통사(通 事)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을 위시해서 누차 명나라에 왕래했고, 한 확(韓 確)의 누이동생이 명나라에 좌군첨총제(左軍僉摠制)로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동행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19(세종 1) 백지 화자진헌사(白紙火者進獻使), 1424년 우군총제(右軍摠制)로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각각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평양(平壤)․안주(安州)의 선위사(宣慰使)로 누차 명나라의 사신을 접대했고, 1428년 명나라 황후의 책립(冊立)을 축하하러 진하사(進賀使), 이듬해 계품부사(計稟副使) 등 전후 21회에 걸쳐 명나라를 왕래하여 대명외교(對明外交)에 공헌 했다. 143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듬해 인순 부윤(仁順府尹)이 되었다.

원수장(元壽長) 조선(朝鮮) 때 판교(判校)를 역임하였다.

원혼(元 混) 1505(연산군11)1588(선조21)

()는 태초(太初), 유륜(有倫)의 아들. 1525(중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 주서(注書)․지평(持平)을 거쳐 1534년 헌납(獻納)이 되고 1539년 장령(掌令)에 올랐다. 1543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병조 참의(兵曹參 議)․우부승지(右副承旨)․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이해 다시 천추사(天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5(명종 즉위) 예조 참의․충청도 관찰사 이어 공조․병조의 참의(參議)를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대사간․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우참찬(右參贊)을 거쳐 형조․호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1573(선조 6) 좌참찬(左參贊), 1580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뒤 치사(致仕)했다.

원균(元 均) ?1597(선조 30)

()는 평중(平仲). 무과(武科)에 급제, 조산 만호(造山萬戶)․부령 부사(富寧府使)를 거쳐, 1592(선조 25) 임진왜란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가 되어 왜적을 맞아 싸웠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과 합세,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왜선 30 여 척을 전멸시켰고, 적군이 당포(唐浦)에 이르자 곤양(昆陽)에서 격파, 사천(泗川) 앞바다로 쫓아가서 연전연승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거제도(巨濟島)에서 순사(殉死)했다. 1603(선조 36)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추록(追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원릉군(原陵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시중공계(侍中公系)

원황(元 滉) 조선조(朝鮮朝)에 정랑(正郞)을 지냈다.

원재명(元在明) ()는 유간(孺艮).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원유붕(元有朋) ()는 낙여(樂汝). 조선조(朝鮮朝)에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원효렴(元孝廉)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원호(元 昊) ()는 자허(子虛), ()는 무항(霧巷)․관란(觀瀾),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별장(別將) ()의 아들. 1423(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 단종 초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위세가 날로 떨치자 고향 원주에 은거(隱居)하다가 1457(세조 3) 단종이 죽자 영월(寧越)에 가서 3년상을 마쳤다.

그뒤 고향에 은거 중 세조의 특별 배려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불응하며 여생을 마쳤다. 1703(숙종 29)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원천석(元天錫)의 사당(祠堂)에 배향(配享)되었다. 1782(정조 6)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원주(原州)의 칠봉서원(七峯書院),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원효연(元孝然) ?1466(세조 12)

()는 자순(子順),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의 아들. 1432(세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장령(掌令)․검상(檢詳)․사인(舍人)․좌사간(左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 사신의 내왕이 잦았던 1454(단종 2)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쓰시마주 경차관 (對馬州敬差官)이 되어 도주(島主)에게 삼저도서특송인(三著圖書特送人)과 호군수직자(護軍受職者)의 내선(內船)을 약정된 한도 내에서 할 것을 요구했다.

예조 참의(禮曹參議)․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를 역임,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으로 성안군(成安君)에 봉해지고, 1457(세조 3) 덕령부윤(德寧府尹)으로 등극부사(登極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평안도 관찰사를 역임, 원성군(原城君)으로 개봉(改封)되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전라도 도관 찰사(全羅道道觀察使)를 거쳐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원숙강(元叔康) ?1469 (예종 1)

()는 화중(和仲), 감찰(監察) 효렴(孝廉)의 아들. 1460(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 등을 지내고 정언(正言)으로서 실록청 기사관(實錄廳記事官)이 되었다. 1469년「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하기 위해 사초(史草)를 걷어 들일때 사초에 작성자의 성명을 쓰게 되자 대신들의 과오를 쓴 것이 두려워 사초를 몰래 들어 내어 수정한 사실이 발각, 주살(誅殺)되었다.

원계관(元繼寬) ()는 직보(直輔), ()는 녹야당(綠野堂). 천자(天資)가 영특(英特)하고 학식이 탁월(卓越)하여 천거로 등용, 여러 관직을 거쳐 장령(掌令)․참판(參判)을 역임한 후에 3()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원계검(元繼儉) ()는 사례(士禮). 1525(중종 2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33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副事)에 이르렀다.

원계채(元繼蔡) 1492(성종23)1539(중종34)

()는 수보(壽甫), 순조(順祖)의 아들. 1519(중종 14) 진사(進士)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534년 동지부사(冬至副使), 이해 다시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고, 1538년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진하부사(進賀副使)가 되어 명나라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러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이듬해 통주(通州)에서 죽었다.

원집(元 集) ()는 호연(浩然). 1531(중종 2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원호섭(元虎燮) ()는 병숙(炳叔). 조선(朝鮮) 때 참지통정(參知通政)을 지냈다.

원팽수(元彭壽)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원사용(元士容)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원사안(元士安) 조선조(朝鮮朝)에서 사성(司成)을 역임하였다.

원사종(元士宗) 조선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원호(元 豪) 1533(중종28)1592(선조25)

()는 중영(仲英), 시호(諡號)는 충장(充壯), 김덕수(金德秀)의 문인.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며, 1567(명종 22)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에 이어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있을 때에는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했다. 1587(선조 20)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좌도(左道)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막지 못하여 인책(引責) 유배, 얼마 뒤에 풀려 나와 몇몇 관직을 역임하고 고향에 은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으로서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 여주(驪州)의 신륵사(神勒寺)에서 적병을 크게 무찔렀으며, 패주하는 적병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했다. 그 공으로 여주 목사(驪州牧使) 겸 경기․강원도 방어사(防禦使)가 되고, 김화 (金化)에서 적의 복병(伏兵)을 맞아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 김화의 충장사(忠壯祠)․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원욱(元 彧) ()는 이회(而晦). 조선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원호지(元虎智) 조선조(朝鮮朝)에 장령(掌令)을 지냈다.

원섭(元 涉) 조선조에 승권(承權)을 지냈다.

원희(元 熹) ()는 박이(博而). 1576(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 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592(선조 25) 부령 부사(富寧府使)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길주(吉州)․임명(臨溟)에서 분전하였으나 순절하였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원유남(元裕男) 1561(명종16)1631(인조9)

()는 관보(寬甫),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증 좌의정(贈左議政) ()의 아들. 일찍부터 용력(勇力)으로 이름을 날리고, 1583(선조 16) 무과(武科), 158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각각 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 율(權 慄)의 휘하에 있다가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되자 전공을 세울 것을 자청, 이어 적진에 뛰어들어 왜적 여러 명을 베고 돌아와 용서받았다.

1596년 강원․충청 강로조방장(江原忠淸江路助防將)을 지내고,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분의복수군(奮義復讎軍)의 장령(掌令)으로 활약, 1605년 창성 부사(昌城府使)를 거쳐, 뒤에 지충주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이 되고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원성모(元成模) ()는 경범(景範), ()는 송운(松耘).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636(인조 14) 용호(龍胡)의 난()을 당하여 장남 승길(升吉), 넷째 아들 이길(頣吉)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안산(安山)을 고수하였다.

이어 덕물도(德物島)에서 분전(奮戰)하다가 3부자(父子)가 동시에 순절(殉節)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원상(元 相) ()는 거경(巨卿).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 하여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경상우도 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원종(元 悰) 1578(선조 11)1623(인조 1)

()는 성보(誠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의 아들. 1606(선조 39)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광해군 때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 등을 거쳐 정랑(正郞)에 이르렀으나, 1623년 허 균(許 筠) 일파로 몰려 유세증(兪世 曾)과 함께 사형 당했다.

원해익(元海益)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원해일(元海一)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원궤(原 簋)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원식(元 植)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원진명(元振溟) 조선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원즙(元 檝)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원만석(元萬石) ()는 군왕(君王), ()는 고산헌(孤山軒).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원격(元 格)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원적(元 樀)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원진탁(元振鐸) 조선조(朝鮮朝)에 참의(參議)를 지냈다.

원두표(元斗杓) 1593(선조 26)1664(현종 5)

()는 자건(子建), ()는 탄수(灘叟)․탄옹(灘翁), 시호(諡號)는 충익(忠翼), 원계군(原溪君) 유남(裕男)의 아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624년 이 괄(李 适)의 난 후에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나주 목사(羅州牧使)․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에 어영 부사(御營副使)로서 남한산성을 지키고, 1642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승진, 뒤에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경상도 관찰사를 역임, 이동안 서인(西人)의 공서(功西)에 속하여 청서(淸西)를 탄압하다가 같은 파인 김자점(金自點)과 정권 다툼으로 분당(分黨)하여 원당(原黨)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1649(효종 즉위) 호조 판서로 한때 파직 당했고, 1651년 좌찬성(左贊成)․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1654년 병조 판서가 되어 김 육(金 堉)이 실시하려는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했다. 1656(효종 7) 우의정, 1662(현종 3)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內醫院)과 군기시(軍器 寺)의 도제조(都提調)를 겸직했다.

원두추(元斗樞) 1604(선조 37)1663(현종 4)

()는 자중(子中), ()는 거업와(居業窩)․장산(長山), 원계군(原溪君) 유남(裕男)의 아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 1623년 부형(父兄)을 따라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 주부(主簿)가 되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고 이듬해 굴욕적 화의가 성 립되자 은퇴했다가 1663(현종 4)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냈다.

원만리(元萬里) 1624(인조 2)1672(현종 13)

()는 중거(仲擧), ()는 청재(聽齋), 좌의정 두표(斗杓)의 아들. 1648(인조 2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1660(현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수원 부사(水原府使) 등을 거쳐 평안도 관찰 사가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원만춘(元萬春) 1626(인조 4)1697(숙종 23)

()는 군시(君始), 좌의정 두표(斗杓)의 아들. 17세 때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2년 후 돌아와 빙고 별검(氷庫別檢)이 되고, 숙종 때 수원 부사(水原府使)․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했다.

원몽린(元夢麟) 1648(인조26)1674(현조15)

()는 용여(龍歟), ()는 죽서(竹西), 시호(諡號)는 효헌(孝憲), 관찰사 만리(萬里)의 아들. 1659(효종 10) 효종의 제6녀 숙경공주(淑敬公主)와 결혼, 흥평위(興平尉)에 봉해진 뒤 여러 번 도총관(都摠管)을 지냈다.

원철(元 㯙) 조선조(朝鮮朝)에 사예(司藝)를 지냈다.

원성유(元聖兪)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원경하(元景夏) 1698(숙종24)1761(영조37)

()는 화백(華佰), ()는 창하(蒼霞)․비와(肥窩). 시호(諡號)는 충문(忠文), 목사(牧使) 명귀(命龜)의 아들. 1721(경종 1) 진사(進士)가 되고, 1736(영조 12) 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率)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교리(校理)․예방 승지(禮房承旨)․헌납(獻納)․이조 참판(吏曹參判)․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거쳐 급제 후 불과 10여 년 만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탕평책(蕩平策)의 시행 방법에 있어서, 각 당파의 인재를 등용한 뒤 당론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60세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로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문장(文章)에 능했으며, 공주(公主)의 집안인 줄 모를 정도로 생활이 검소했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원경순(元景淳) ()는 도이(道而), 시호(諡號)는 정헌(正憲). 조선조(朝鮮朝)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원경렴(元景濂) ()는 도원(道原), ()는 소재(疎齋). 조선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

원의손(元義孫) ()는 자방(子方), ()는 모와(慕窩). 조선(朝鮮)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원인손(元仁孫) 1721(경종 1)1774(영조 50)

()는 자정(子靜), 시호(諡號)는 문민(文敏), 예조 판서 경하(景夏)의 아들. 1740(영조 1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1753(영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정언(正言)․사서(司書)를 지냈다.

그후 부응교(副應敎)로서「천의소감(闡義昭鑑)」편찬에 참여하면서 부터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1765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서명응(徐命膺) 같이「어제독서록(御製讀書錄)」과 「연대고(年代考)」를 교정(校正), 1769년 왕명을 받고 울릉도(鬱陵島)의 형승(形勝)과 물산(物産)을 그려 바쳤고, 1772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어 우의정에 이르렀다.

원계손(元繼孫) 1733(영조 9)1772(영조 48)

()는 자승(子承), ()는 환범재(換凡齋),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경하(景夏)의 아들. 우의정 인손(仁孫)의 동생.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후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나 당시 이언진의 시()와 임불남(任芾男)의 그림과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원세성(元世性) 1898(광무 2) 황국 협회(皇國協會) 대표로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904(광무 8) 칙임 시종(勅任侍從)으로서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가 국내 황무지 개척권을 매수하려 하자 송수만(宋秀萬)․송인섭(宋寅燮) 등과 보안회(保安會)를 조직, 백목전 도가(白木廛都家)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이를 규탄했다.

고종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 끝까지 투쟁하다가 이범창(李範昌)․신영식(申永植) 등과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안주 일본병참사령부(安州日本兵站司令部)에 압송,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원우상(元禹常) 19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에 여러 관직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육군 참장(陸軍參將)․경무사(警務使)․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