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목천우씨시조(木川于氏),우방녕(于邦寧),목천우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6 11:48 수정일 : 2018-04-18 20:58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우씨(于씨)는 중국(中國) 하남(河南)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땅이름을 성(性)으로 삼았다가 후에 우(于)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 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單本)이며, 고려(高麗)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시조 우방녕(于邦寧)의 아들 학유(學儒)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로부터 난을 일으키고 거사에 가담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무신(武臣)이 전권(全權)을 잡아 잘 된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거절했다. 정중부가 집권한 후 그는 신상이 매우 위태로웠으나 집권층인 이의방(李義方)의 누이와 결혼한 인척(姻戚) 관계로 무사했다.


대표적인 인물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술유(述儒)가 명종(明宗)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판형부사(判刑部事)를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한편 희종(熙宗)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던 승경(承慶)은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되말려 유배당했으며, 필흥(必興)은 공민왕(恭愍王) 때「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과 여자들의 옷을 검은 색으로 입게 하고, 산에 나무를 심게 하여 풍토(風土)를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이를 시행케 하여 명망을 떨쳤다.


인 구

201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우씨(木川于氏)는 전국에 46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목천우씨조상인물

우학유(于學儒): 고려 명종(明宗) 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를 역임하였다.

우승경(于承慶): 1196년(명종 26) 우승선(右承宣)이 되고, 이듬해 대장군(大將軍), 이어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를 거쳐 1207년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우승지(于承志): 고려조(高麗朝)에 중찬(中贊)을 역임하였다.

우술유(于述儒): 1181년(명종 11)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금(金)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1197년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으며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우필흥(于必興): 1357년(공민왕 6) 사천소간(司天少監)으로서 옥룡기(玉龍記)〉의 기사를 인용,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衣冠)은 흑의 청립(黑衣靑笠), 중은 흑건대관(黑巾大冠), 여자들은 검은 비단을 입게 하고, 산에는 소나무를 심게 하며, 유기(諭器)․동기(銅器)․와기 (瓦器)를 사용하여 풍토(風土)에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시행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