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홍천용씨시조(洪川龍氏) ,용득의(龍得義),홍천용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6 10:08 수정일 : 2018-02-23 15:40

홍천용씨시조

용씨(龍氏)의 득성유래(得姓由來)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상고(上古)시대의 부족사회가 동물의 이름을 따서 부족의 명칭으로 불렀다고 전해 내려온다. 홍천용씨(洪川龍氏)의 시조(始祖) 용득의(龍得義)는 고려(高麗) 때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1241년(고종 28)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만드는 불사(佛事)를 총 지휘 하였으며, 강원도(江原道) 홍천군(洪川郡) 북방면(北方面)에 용수사(龍遂寺)를 창건하여 불전(佛典) 전수와 불교(佛敎) 전파에 여생을 바쳤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홍천(洪川)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홍천(洪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용씨(龍氏)의 본관(本貫)은 홍천(洪川)․경주(慶州)․양근(楊根)․용인(龍仁) 등을 비롯하여 20여 본(本)이 있으나, 이는 모두가 홍천 용씨(洪川龍氏)에서 분파(分派)된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홍천(洪川) 단일본(單一本)으로 전한다.


본관의 유래

홍천(洪川)은 강원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인데, 신라 때는 녹효(綠驍)로 고쳐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홍천이라 개칭하고 삭주에 그대로 예속시켰으며, 1143년(인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홍천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춘천부(春川府) 홍천군이 되었으며, 1896년 13도제(道制) 실시로 홍천군이 되었다. 1917년 금물산면(今物山面)을 남면, 군내면(郡內面)을 홍천면, 영귀미면(永歸美面)을 동면, 감물악면(甘勿岳面)을 서면으로 고치고, 1935년 경기도 양평균 단월면 분지리(分地里)를 서면 굴원리(屈原里)에 편입시켰다. 8․15해방 후 국토가 양단되면서 38선 이남에 해당되는 인제군 기린면(麒麟面)의 진동리(鎭東里)와 북리(北里)의 각 일부 및 인제면의 원대리(院垈里)와 남면의 어론(於論)․부평(富坪) 등 7개 리(里)를 편입하여 신남면(新南面)을 만들고, 인제군 내면(內面)도 편입시켰다. 1954년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직법 시행에 따라 기린면과 남면 등은 인제군에 환원시켰고 1963년 홍천면은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홍천용씨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 용득의(龍得義)의 6세손 희수(希壽)가 이태조(李太祖) 잠저(潛邸) 시(時)에 오랫동안 시종한 공으로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고 공조(工曹)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천기(天奇) 역시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정종(定宗)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판서(判書)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또한 진충호종공신(盡忠扈從功臣)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서연(瑞衍)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를 지낸 맹손(孟孫),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운 협(協),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에 책록된 운(雲) 등이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천용씨(洪川龍氏)는 전국에 14,48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홍천용씨조상인물

용연(龍 延):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제주 부사(濟州府使)를 지냈다.

용검(龍 劍):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용허(龍 許):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때 태학 박사(太學博士)를 지내고 한성후(漢城候)에 봉해졌다.

용해(龍 海): 고려 충정왕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용세(龍 世):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용서(龍 緖): 1367년(공민왕 16)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공주 목사(公州牧使)를 역임한 후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용희수(龍希壽): 자(字)는 충일(忠一), 호(號)는 잠재(潛齋),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이태조(李太祖) 잠저시(潛邸時)에 오랫동안 시종(侍從)한 공(功)으로 개국공신이 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검교(檢 校)․공조 판서(工曹判書)․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죽으니 이태조(李太祖)가 제문(祭文)을 내리고, 1923년 8월 서울 옥수동에 대형 도통비(道統碑)가 세워졌다.

용천기(龍天奇): 자(字)는 흥운(興雲), 호(號)는 만헌(晩軒), 시호(諡號)는 충의(忠毅). 1399년(정종 1)에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를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으며, 개국공신에 책록(策錄)되었다.

용천검(龍泉劍): 공조(工曹) 판서(判書) 천기(天奇)의 아들. 1404년(태종 14)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용치우(龍致雨): 자(字)는 시윤(施潤), 호(號)는 신잠재(愼箴齋). 1400년(정종 2)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거쳐 정순대부(正順大夫)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랐다.

용지우(龍之雨):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용남우(龍南雨): 조선 세종(世宗)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옹원 판사(司饔院判事)를 역임하였다.

용복우(龍福雨): 조선(朝鮮) 때 통례대부(通禮大夫)에 올랐다.

용희우(龍禧雨): 초명(初名)은 득우(得雨).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용득한(龍得漢): 조선 세종(世宗)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용득강(龍得江): 조선 세종(世宗)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올랐다.

용득실(龍得實): 자(字)는 덕능(德能), 호(號)는 오진(五眞), 공조 참판(工曹參判) 치우(致雨)의 아들. 1420년(세종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용원발(龍元發): 조선(朝鮮) 성종(成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용흥부(龍興富): 조선 때 판사(判事)를 지냈다.

용운(龍 雲): 조선(朝鮮) 때 계공랑(啓功郞)에 올랐다.

용무(龍 霧): 조선 때 회덕 현감(懷德縣監)을 지냈다.

용보우(龍輔虞): 조선에서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를 지냈다.

용서연(龍瑞衍): 자(字)는 선방(善邦), 호(號)는 겸은(謙隱). 1466년(세조11) 진충호종공신(盡忠扈從功臣)에 책록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용귀생(龍貴生): 조선(朝鮮)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용수연(龍守淵): 조선에서 별정 동정(別正同正)을 역임하였다.

용영호(龍永湖):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용회종(龍誨宗):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용철주(龍鐵柱): 자(字)는 대견(大見), 호(號)는 벽담(碧潭), 판서(判書), 서연(瑞衍)의 아들. 조선 성종(成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갑산 부사(甲山府使)를 역임하였다.

용만(龍 萬): 조선 때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용연택(龍延澤): 조선(朝鮮) 때 품계(品階)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용귀진(龍貴珍): 조선 때 부위(副尉)를 지냈다.

용진국(龍震國): 조선조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용영구(龍泳九): 초명(初名)은 영해(永海). 조선(朝鮮)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올랐다.

용상문(龍祥文):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용언상(龍彦祥): 조선(朝鮮)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용자상(龍自祥): 자(字)는 홍구(洪九), 호(號)는 담산(담汕), 부사(府使) 철주(鐵柱)의 아들. 조선 성종(成宗) 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에 추증(追贈)되었다.

용계상(龍繼祥): 자(字)는 홍원(洪元), 호(號)는 송파(松坡). 조선 때 품계(品階)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호군(護軍)을 지내고, 절충장군(折衷將軍)으로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다.

용구천(龍九天):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용일손(龍日孫): 조선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올랐다.

용수장(龍粹長): 초명(初名)은 수장(壽長), 자(字)는 순일(純壹), 호(號)는 정와(靖窩). 조선 성종(成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용맹손(龍孟孫): 자(字)는 한서(漢瑞), 호(號)는 도일(道逸). 조선(朝鮮)때 좌수사(左水使)를 지냈다.

용영손(龍永孫): 자(字)는 현유(賢維), 호(號)는 금서(錦西),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용윤택(龍潤澤): 자(字)는 이원(利原). 조선 성종(成宗)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용지(龍 智): 자(字)는 인관(仁寬), 호(號)는 양우(良宇).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 장악원(掌樂院) 정(正)을 지냈다.

용천(龍 千): 조선조(朝鮮朝)에 사과(司果)를 지냈다.

용치운(龍致雲): 자(字)는 시종(施從), 호(號)는 담소(淡素). 조선에서 순릉 참봉(純陵參奉)을 역임하였다.

용덕운(龍德雲):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용두운(龍斗雲):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용응남(龍應南): 조선에서 품계(品階)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용의강(龍擬江): 자(字)는 원유(元有). 조선조(朝鮮朝)에 장례원 정사(掌隷院正事)를 지냈다.

용윤택(龍允澤): 조선 때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용연우(龍淵友): 자(字)는 치효(致孝), 호(號)는 석천(石泉).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으며,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용수택(龍水澤):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용승천(龍勝天): 조선 때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였다.

용하성(龍夏聖): 조선조(朝鮮朝)에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이르렀다.

용성하(龍聲河): 자(字)는 기성(起聲). 조선에서 판관(判官)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