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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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4 22:04 수정일 : 2018-01-01 20:37

해주오씨의 연원(海州吳氏의 淵源)

周太王에 二者가 있었으니 長子는 泰伯이요, 仲子는 仲雍이고 계자는 계력이다. 계력이 아들 昌을 낳으니 이분 이 後日 周文王이다. 태왕은 昌이 聖德이 있음을 알고 傳 位하려하나 泰伯과 仲雍이 있어 말을 못하였더니 泰伯이 父親의 뜻을 알고 아우 仲雍과 함께 멀리 長江(楊子江) 을 건너 살았으니 지 금의 江蘇省吳縣이다. 그 地方 사람 들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섬겨 吳太伯이라 하였다.

後日 孔子께서 칭찬하여 이르되 「泰伯은 지극한 德을 가진분이로다 天下를 辭讓하였어도 사람들은 아는 이가 없었다」 하였다.

吳國時代는 姬氏로서 周室과 同宗의 讓를 지키며 姑蘇에 도읍하였으니 그 姑蘇는 지금의 蘇州이다. 그 後 BC 四七2年 越句賤에게 滅亡되니 二五代 七五九年이며 그 子孫들이 國號로서 姓氏를 삼았으며 「吳後爲越所滅子孫 國號爲姓氏」라 했다. 後孫이 번연하여 中國에 二七五 本貫이 傳해지고 있고 우리나라에는 海州를 爲始하여 十九개 本貫으로 傳하나 모두 同祖同根으로 이해되고 있다.

海州吳氏의 시조 吳仁裕공은 학덕을 겸비한 대학자로서 고려 성종3년(984년)에 중국에서 건너와 해주에 살며 나라에 벼슬하였다. 成宗은 공이 中華의 제도를 잘 알고 있음을 알고 특별히 진급시켜 군기감과 예부의 일을 맡겼다.

공은 성종7년에 임금에게 아뢰어 五廟와 社稷, 그리고 다음해에는 太廟와 國子監(국립대학)을 세워서 새로운 문화와 국민교화에 힘썼다.

1481년 領相 노사신 등 24명의 公卿과 巨儒가 임금에게 올린 글에 「고려 예종 때 尹f1장군과 吳延i:장군이 여진을 물리 쳐 西北은 압록강을 한계로 삼고 東北은 先春嶺을 경계로 삼았으니 대개 서북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나 동북은 그보다 지나쳐 지리의 盛함이 極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 댜 그 先春嶺은 두만강 북쪽으로7백리에 있고 송화강변이니 두 분이 거기까지 나가 「高麗之境」이라는 비를 세웠다. 오연총장군은 1107년 윤관장군과 함께 여진을 물리치고 두만강북 7백리에 있는 先春嶺에 高麗定界碑를 세운 것이다.

지금은 그곳이 조선족 연변자치주이니 비록 국력은 미치지 못해도 5백여년전 성종과 노사신등이 발행한 《동국여지승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始祗 인유공께서 해주에 정착하신지 1천여년된 지금은 우리나라 11번째 大姓이며 그 동안 국가에 헌신한 烈士와 대학자. 효자 효부들이 많았고 국가기관에는 위로는 相臣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수많은 종친들이 공헌하여 대내의적으로 찬란한 업적을 쌓았고 지금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

海州吳氏 가문 중 또 하나 이름있는 분은 吳炯公으로 초명은 한경이며 문장이 뛰어난 대학자로서 명성이 높았고 儉議贊成事와 監春秋館事에 이르렀다.

조선조에는 相臣. 大提學, 湖堂, 文章家, 功臣. 忠臣. 烈士. 淸白吏. 駒馬와 文武 급제자가 수백명에 이르고 효자, 효부 등의 그 위용이 宗中의 긍지로서 靑史에 빛나고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오씨는 남한에 462,7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