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보성오씨(寶城吳氏),보성오씨시조,오현필(吳賢弼),보성오씨유래,보성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4 13:49 수정일 : 2018-01-23 16:17

보성오씨시조 및 보성오씨유래(본관)

보성오씨(寶城吳氏)  시조 오현필(吳賢弼)은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고종(高宗) 때 거란(契丹)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은 보성(寶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보성(寶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부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복홀군(伏忽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보성군(寶城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삼양군(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개칭하였다가 1668(현종 9) 전라도(全羅道)에 소속되면서 다시 보성군(寶城郡)이 되었다.


현필(賢弼)7세손 천복(天福)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고 보성부원군(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천복(天福)의 아들 점()이 조선(朝鮮)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고려 말(高麗末)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몽을(蒙乙)은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었고,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자경(子慶)은 단종(端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내고 이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으며, 고원 군수(高原郡守)를 지낸 대남(大南)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서 거란군(契丹軍)에 항거하다 순절하여 후에 순절비(殉節碑)충신문(忠臣門)이 세워졌다.

이외에도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천을(天乙)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연찰(延札),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른 집(), 그리고 형조(刑曹) 판서(判書)에 오른 성() 등이 배출되어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201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성 오씨(寶城吳氏)는 전국에 71,1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보성오씨조상인물

오숙부(吳淑富): 고려(高麗) 때 예부 좌시랑(禮部左侍郞)을 역임하였다.

오한경(吳漢卿): ()는 쾌항(快巷), 시호(諡號)는 문온(文溫). 1260(원종 1) 감시(監試)에 장원하고 동궁시학(東宮侍學)으로 선발되었으며, 문과에 급제한 후 1308(충렬왕 34) 삼사우사(三司右使)․지선부사(知選部事)․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등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오사충(吳思忠): 1327(충숙왕 14)1406(태종 6). 초명은 사정(思正), 시호(諡號)는 공희(恭僖), 절제사(節制使) 광신(廣信)의 아들. 1355(공민왕 4) 문과(文科)에 급제, 감찰규정(監察糾正)․헌납(獻納)․집의(執義)를 역임, 1389(창왕 1) 사의대부(司議大夫)가 되고 이해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이 색(李 穡) 부자(父子)를 폐왕(廢王)의 일파라고 탄핵하는 한편 신 돈(辛旽)의 일당 근절을 간언했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정몽주(鄭夢周) 및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아 원배(遠配), 1392(태조 1) 정몽주가 피살되자 복직, 이어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해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자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이 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394(태조 3)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교주강릉 도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 이듬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1396년 정당문학(政堂文學)․경기좌도 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 1404(태종 4)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가 되었다.

오점(吳 漸): 조선(朝鮮) 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오효원(吳孝元): 조선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오천을(吳天乙): 조선조(朝鮮朝)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오몽을(吳蒙乙): ?1398(태조 7). 고려말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고, 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1397년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가 되어 이듬해 사직할때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이해 제1차 왕자(王子)의 난에 정도전(鄭道傳)의 일당으로 몰려 주살(誅殺) 되었으며, 1409(태종 9) 공신 녹권(功臣錄卷)이 추탈(追 奪)되었다.

오자경(吳子慶): 1414(태종 14)1478(성종 9). ()는 길보(吉甫), 시호(諡號)는 양무(襄武). 1454(단종 2) 무과(武科)에 급제, 내금위(內禁衛)의 별시위(別侍衛)를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함길도 진무(咸吉道鎭撫)․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냈으며, 1466(세조 12) 무과중시(武科重試)와 등준시 무과(登俊試武科)에 급제,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랐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으며, 1468(세조 14) 평안중도 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를 역임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오대곤(吳大坤): ()는 조지(曹之), ()는 유연옹(悠然翁). 조선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오대남(吳大男):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만호(萬戶)를 거쳐 고원 군수(高原郡守)를 지낼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서 거란군(契丹軍)에 항거하다 순절(殉節)하였다. 그후 강도(江都)에 순절비(殉節碑)가 세워졌으며, 숙종(肅宗) 때 정려(旌閭)가 명()해져 청원군(淸原郡) 현도면(賢都面) 시목리(柿木里)에 충신문(忠臣門)이 세워졌다.

오윤(吳 潤): ()는 윤지(潤之). 조선 때 학록(學錄)을 지냈다.

오행건(吳行健): ()는 여강(汝强), ()는 덕계(德溪). 조선조(朝鮮朝)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오연찰(吳延札):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오집(吳 執): 조선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오성(吳 誠): 조선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오정하(吳廷夏):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오익창(吳益昌):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오방륜(吳邦輪): 조선(朝鮮)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오행민(吳行敏): () 여용(汝勇), ()는 화암(畵巖).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오행통(吳行筒): ()는 여경(汝敬). 조선(朝鮮)에서 강계 판관(江界判官)을 지냈다.

오숙(吳 熽): ()는 회백(晦伯), ()는 금암(琴巖). 조선(朝鮮)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오덕명(吳悳明): ()는 덕보(德甫), ()는 상당일민(上黨逸民). 조선조에 의병장(義兵將)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오저(吳 著): ()는 근보(謹甫), ()는 추봉(楸峰). 조선조(朝鮮朝)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오정근(吳正根): ()는 백심(伯深), ()는 척사민(脊士民). 조선(朝鮮)에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오익환(吳翼煥): ()는 붕약(鵬若), ()는 경산(耕山). 조선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오상현(吳尙鉉): ()는 정립(正立). 조선 때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역임하였다.

오서종(吳瑞鍾): ()는 응보(應寶). 조선(朝鮮)에서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를 지냈다.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남달리 지극하였고, 지조(志操)와 품행(品行)이 독실(篤實)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