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죽산안씨(竹山安氏),죽산안씨시조,안방준(安邦俊),죽산안씨유래,죽산안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1 20:59 수정일 : 2018-01-23 11:36

죽산안씨시조의 유래 (始祖由來)

죽산 안씨(竹山安氏)의 시조(始祖) 안방준(安邦俊)은 당()나라에서 동래(東來)해 온 이 원(李 瑗)의 아들 3형제 중 장남으로, 본래의 이름은 이지춘(李枝春)이었으나 두 아우와 함께 모반(謀反)을 평정(平定)하여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안씨(安氏)의 성()을 하사(下賜)받아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방준을 시조로 받들고 죽산(竹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죽산안씨유래(관향)

죽산(竹山)은 경기도(京畿道) 용인군(龍仁郡)과 안성군(安城郡) 일부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죽주(竹州)로 고쳤다가 995(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는 광주(廣州)에 속하였다. 1413(조선 태종 13)에 죽산(竹山)으로 개칭,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고종 32) ()이 되었다가 1913년 일부는 용인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안성군에 합해졌다.


죽산안씨 역사(歷史)

죽산안씨 시조의 맏아들 안국보(安國輔)가 고려조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둘째 안국필(安國弼)은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여 죽산 안씨의 양대 인맥(人脈)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들의 후대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가문(家門)의 중흥을 다졌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거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한평(漢平 : 국보의 10세손)과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판호조사(判戶曹事)에 올라 죽산부원군(竹山府院君)에 봉해진 사경(社卿)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사경의 맏아들로 공민왕(恭愍王)의 국구(國舅)가 되었던 극인(克仁)은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거쳐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우왕(禑王) 때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가통(家統)을 이었다.

문하시랑(門下侍郞) 국필(國弼)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만생(晩生)이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했고, 8세손 영의(令儀)가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라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낸 손자 홍상(洪祥)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찰리사(察理使) 숙로(叔老)의 아들 맹담(孟聃)이 세종(世宗)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가 연창군(延昌君)에 이어 연창위(延昌尉)로 개봉(改封)되고 세조(世祖) 등극에 공()을 세워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지고성군사(知固城郡事) 계인(季仁)의 아들로 1447(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한 초()는 세조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경기도 암행어사(京畿道暗行御史)가 되어 도정을 순찰하고 돌아와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참의(刑曹參議)와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낸 후 형조 및 호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한편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방경(方慶)은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와 검열(檢閱)․동부승지(同副承旨)․공조 참의 등을 지내고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선정(善政)을 배풀었으며, 숙종(肅宗) 때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구(絿)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목사(牧使) 상원(相元)의 아들로 영조(英祖) 때 등과 한 윤행(允行)은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지냈으며 직언(直言)을 하다가 왕의 비위를 거슬려 한 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부교리(副校理)로 다시 등용되어 승지와 울산 부사(蔚山府使)를 거쳐 대사간․대사헌․형조 판서를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그 밖의 인물로는 영조(英祖) 때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던 표(: 목사 종해의 아들)가 제주 목사(濟州牧使)와 형조 참의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여 정조(正祖) 때 감찰(監察)과 형조 참판을 지낸 억(), 순조조(純祖朝)에 예조 판서를 역임한 광직(光直), 철종(哲宗) 때 동부승지 희수(喜壽)와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경수(駉壽)가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회장(會長)을 역임하여 죽산 안씨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죽산안씨(竹山安氏)는 남한(南韓)에 77,0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죽산안씨조상인물

안국보(安國輔): 고려(高麗)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안국필(安國弼): 고려(高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안윤(安 倫):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안검(安 儉): 고려(高麗)에서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

안덕생(安德生):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안만생(安晩生): 고려(高麗) 때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

안사(安 思):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안욕(安 慾): 고려조(高麗朝)에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

안학겸(安學謙):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안기(安 祈): 고려(高麗) 때 죽산군(竹山君)에 봉하여졌다.

안준(安 濬): 고려(高麗) 때 소부감(小府監) 소감(少監)을 지냈다.

안시무(安時茂): 고려(高麗)에서 군기감(軍器監)을 지냈다.

안영의(安令儀): 고려(高麗)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안세량(安世亮): 고려(高麗) 때 삼사 판관(三司判官)을 지냈다.

안한평(安漢平): 시호(諡號)는 양량(襄良). 고려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안홍상(安洪祥): 고려(高麗)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안사경(安社卿): 시호(諡號)는 희정(僖靖). 고려 때 성근수의보리벽상공신(誠勤守義補理壁上功臣) 및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으로 판호조사 (判戶曹事)․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등을 역임하였으며 죽산부원군(竹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안전(安 晋戈):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경상(慶尙)․충청(忠淸)․서북(西北) 3도의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역임하였다.

안극인(安克仁): ?1383(우왕 9)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한평(漢平)의 손자, 정비(定妃 : 공민왕비)의 아버지. 문과(文科)에 급제, 1363(공민왕 12) 동경도 병마사(東京道兵馬使), 1366년 우상시(右常侍), 이어 동지밀직(同知密直)을 거쳐 중대광(重大匡)․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승진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1377(우왕 3)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안현(安 玹): 고려(高麗) 때 중문지후(中門祗侯)를 지냈다.

안증(安 曾): 고려(高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안숙로(安叔老): ()는 죽오(竹塢). 고려 우왕(禑王) 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으며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역임하였다.

안망지(安望之):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안등(安 騰): 시호(諡號)는 정경(貞景). 조선(朝鮮)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안맹담(安孟聃): 1415(태종 15)1462(세조 8) ()는 덕수(德壽), ()는 해파(海坡), 시호(諡號)는 양효(良孝). 함길도 도관찰출척사(咸吉道都觀察黜陟士) 망지(望之)의 아들. 1428(세종 10) 세종(世宗)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결혼, 죽성군(竹城君)에 이어 1432년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연창위(延昌尉)로 개봉(改封)되고, 1455(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초서(草書)를 잘 쓰고 사어(射御)를 잘 했으며, 음률(音律)․약물(藥物)에도 통달했다.

안계인(安季仁): 조선 때 지고성군사(知固城郡事)를 역임하였다.

안초(安 迢): 1420(세종 2)1483(성종 14) ()는 자이(自邇), 지고성군사(知固城郡事) 계인(季仁)의 아들. 1441(세종 23) 생원(生員)이 되고, 1447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博士)가 되었다. 1456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이 되고, 1458(세조 4)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경기도 암행어사(京畿道暗行御史)를 거쳐, 1467년 전라도 관찰사, 이듬해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1476(성종 7)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형조와 호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안상계(安桑鷄): ()는 자신(子信), ()는 전온(田은), 연창위(延昌尉) 맹담(孟聃)의 아들, 세종의 외손자. 어머니가 세종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였으므로 종실(宗室)의 지친(至親)으로서 왕위를 노리는 세조 밑에서 벼슬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단종 초에 저자도(楮子島)에 물러가 살면서 김종직(金宗直)․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시()로써 서로 수창(酬唱)하다가 1492(성종 23)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안팽수(安彭壽): ()는 국로(國老). 1492(성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예조 참의(禮曹參議)․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안세언(安世彦): ()는 사미(士美). 조선(朝鮮)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안방경(安方慶): 1513(중종 8)1569(선조 2). ()는 선응(善應), ()는 구배헌(灸背軒). 1540(중종 35) 생원(生員)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 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검열(檢閱)․동부승지(同副承旨)․공조 참의(工曹參議)․청홍도 관찰사(淸洪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판결사(判決事)․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역임했다.

안종전(安從㙉): ()는 이후(而厚).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안사현(安士鉉): ()는 승숙(昇叔). 1576(선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안중길(安重吉): ()는 선백(善伯). 조선 때 필선(弼善)을 지냈다.

안창(安 昶): ()는 경용(景容), ()는 석천(石泉). 1594(선조 27) 문과(文科)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안욱(安 旭): ()는 명원(明遠), ()는 청천(淸川).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안홍망(安弘望): ()는 망지(望之). 조선(朝鮮)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다.

안홍량(安弘量): ()는 몽부(夢孚), ()는 취봉(醉峰). 조선에서 전적(典籍)을 지냈다.

안진(安 縝): 1617(광해군 9)1685(숙종 11) ()는 율보(栗甫), ()는 학촌(鶴村),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정섭(廷燮)의 아들. 1639(인조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52(효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664(현종 5)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0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효행(孝行)으로 이름났고, 문장에도 능했다.

안구(安 絿): ()는 자유(子柔). 경사(經史)에 밝았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1682(숙종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89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廢位)를 반대했다. 위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를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에 이르렀다.

안유행(安允行): 1692(숙종 18)? ()는 성지(性之),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목사(牧使) 상원(相元)의 아들, 1717(숙종 43) 생원(生員)이 되고, 1740(영조 1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746년 정언(正言)․지평(持平)을 거쳐 1749년 헌납(獻納)으로 윤 급(尹 汲)․송영중(宋瑩中)의 석방을 주장하다 파직되었다. 1751년 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내며 직언(直言)하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 1753년 부교리(副校理)로 등용되고 1758년 승지(承旨)를 거쳐, 1760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나갔다.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왕이 세자(世子)의 진현(進見)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여 삭출(削黜) 된 뒤 1763년 다시 대사간이 되어 조유진(趙維鎭)의 일파인 이현급(李賢伋)을 절도(絶島)에 유배시켰다. 이해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전임되고 1767년 대사헌(大司憲), 1769년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안정(安 糸正): ()는 덕장(德章), ()는 백인당(百忍堂).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안상휘(安相徽): ()는 신보(愼甫).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안표(安 杓): 1710(숙종 36)1773(영조 49) ()는 사정(士定), 목사(牧使) 종해(宗海)의 아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 1754(영조 3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발탁, 이어 사복시(司僕寺) ()이 되었고, 1764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거쳐 형조 참의(刑曹參議)․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안종철(安宗喆): ()는 숙보(淑保).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안책(安 策): ()는 지숙(持叔). 1775(영조 5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안억(安 檍): ()는 구숙(久叔). 1790(정조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감찰(監察)을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안광우(安光宇): ()는 천택(天宅).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안광직(安光直): ()는 현백(賢伯), ()는 계포(桂圃), 시호(諡號)는 정헌(靖獻). 1805(순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안희수(安喜壽): ()는 길부(吉夫). 1843(헌종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1857(철종 8)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안광묵(安光黙): ()는 성중(聖中), ()는 정산(廷山).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안경수(安駉壽): ?1900(광무 4) ()는 성재(聖哉), 시호(諡號)는 의민(毅愍). 1893(고종 30) 전환국 방판(典圜局幇瓣)으로 도일(渡日), 서양식 화폐의 주조를 시찰하고 돌아와 신화폐를 주조했다. 1894(고종 31) 동학혁명(東學革命)이 발발, 청․일(淸日) 군대가 주둔하게 되자 개화 친일(開化親日) 정객이 되어 보수 친청(保守親淸)의 민영준(閔泳駿)과 함께 사태수습에 진력,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을 거쳐 이해 외세에 의해 갑오경장(甲午更張)이 단행되자 경무사(警務使)를 거쳐 신설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위원이 되었다. 이어 제 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을 거쳐 이듬해 다시 경무사에 전임했다가 제 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올랐다. 이해 일본 공사(日本公使) 미우라(三浦梧樓)가 부임, 을미사병(乙未事變)을 일으키자 그 책임을 지고 한때 파면되었으나 곧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복직하여 다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키는 주동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이로 인해 3년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896(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특사되어 경무사에 기용, 이어 중추원 일등의관(一等議官)에 전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 조직에 참여, 회장을 지냈다. 1898(광무 2) () 경무사 김재풍(金在豊) 등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 1900(광무 4)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알선으로 귀국했으나 곧 체포되어 앞서 이준용(李埈鎔)의 모역사건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권형진(權瀅鎭)과 함께 사형되었으나 1907(융희 1)에 신원(伸寃)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