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평해손씨시조(平海孫氏),손순(孫順),평해손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8 18:34 수정일 : 2018-02-22 22:47

평해손씨시조

평해손씨(平海孫氏)는 밀양(密陽)․경주(慶州)․청주손씨(淸州孫氏)와 더불어 동원(同源)으로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때의 국효(國孝)인 손순(孫 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순(順)의 손자 익담(翼淡 : 이부 상서 부의 둘째 아들)이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진 연유로 익담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본관(本貫)을 평해(平海)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익담의 아들 경상(景尙)이 고려조에서 나라에 공(功)을 세워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고, 손자 술조(術祖)가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평해군(平海君)에 봉군되어 가세(家勢)가 융성하게 되었으며, 도진(道津)의 아들 기정(起貞 : 평해군 익담의 현손)이 병부 상서를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러 크게 명성을 떨쳤다.


본관의 유래

평해(平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울진군(蔚珍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인데 고려(高麗) 초에 평해(平海)로 고치고 현종조(顯宗朝)에 예주(禮州 : 영해)에 속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朝鮮) 때도 평해군(平海郡)으로 삼았고, 1913년 울진군에 병합하여 지금은 울진군에 속한 평해면(平海面)으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을 빛낸 인맥(人脈)으로는 고려 원종(元宗) 때 임 연(林 衍)의 난을 평정시켜 기성후(箕城侯)에 봉해진 인량(仁亮)이 뛰어났으며, 득부(得富)의 아들 영(永)은 충숙왕(忠肅王) 때 가정대부(嘉靖大夫)로 형조 참판(形曹參判)을 지내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어,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議 政府左贊成)에 추증된 밀(密 : 병조 판서 유례의 아들)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한편 군수(郡守) 밀(密)의 맏아들 인효(仁孝)는 단종(端宗) 때 생원시(生員試)에 일등(一等)으로 올라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절의(節義)를 지키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동방청절사(東方淸節士)>라 불렀다.

그의 아우 순효(舜孝)는 세조(世祖) 때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전한(典翰) 겸 집의(執義)에 올라 17개 항목의 정책(政策)을 상소하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고, 특히 성종(成宗)이 윤비(尹妃)를 폐위(廢位)할 때 그 부당함을 극간(極諫)했다. 그후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1487년(성종 18) 「식료찬요(食療撰要)」를 찬진했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받았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은 학자로 그림에도 뛰어나서 죽화(竹畵)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순효(舜孝)의 아들로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주(澍)는 장령(掌令)과 정언(正言)․수찬(修撰)․부제학(副提學) 등을 거쳐 중종(中宗)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고, 1521년(중종 16)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하존시사(賀尊諡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밖의 인물로는 군수(郡守) 부(溥)와 호조 참판(戶曹參判) 식(軾), 참의(參議) 윤선(胤善) 등이 유명했으며, 몽열(夢說)의 아들 필대(必大)는 인조(仁祖)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공청도 도사(公淸道都事)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이 탁월하여 당대에 이름난 시인(詩人)으로 명망이 높아 평해손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해손씨(平海孫氏)는 남한(南韓)에 15,4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평해손씨조상인물

손경상(孫景尙) 고려(高麗) 때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손태상(孫泰尙) 고려에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했다.

손취상(孫就尙)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손술조(孫述祖) 고려조(高麗朝)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고 평해군(平海軍)에 봉해졌다.

손도진(孫道津) 고려에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

손도주(孫道柱) 고려(高麗)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역임하고 이천군(伊川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손기정(孫起貞)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손공기(孫珙玘) 고려 때 판예의(判禮儀)를 지냈다.

손현(孫 賢) 고려(高麗)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손귀황(孫貴璜) 고려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손용진(孫用珍)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했다.

손유룡(孫有龍) 고려(高麗)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손수장(孫修章) 고려조(高麗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손원식(孫元植) 고려에서 예판부(禮判部)를 지냈다.

손시창(孫始昌) 고려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손승조(孫陞祖) 고려 때 용진 현감(龍津縣監)을 역임했다.

손인량(孫仁亮)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하였고, 1269년(원종 10) 임연(林衍)의 난(亂)에 공이 있어 기성후(箕城候)에 봉(封)해졌다.

손여(孫 廬) 고려조(高麗朝)에 수안 군수(邃安郡守)를 지냈다.

손득직(孫得直)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손휴(孫 休) 호(號)는 정충(貞忠). 고려(高麗) 때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했다.

손번(孫 蕃) 고려 때 동정(同正)을 지냈다.

손영(孫 永) 1336년(충숙왕 5) 출생하여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직랑(直郞)에 이르렀다. 가정대부(嘉靖大夫)로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손유례(孫有禮) 고려(高麗) 때 낭장(郎將)을 역임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손밀(孫 密) 고려에서 장사랑(將仕郞)에 올라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지내고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손인효(孫仁孝) 호(號)는 눌재(訥齋). 단종조(端宗朝)에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급제하였고, 동방청절사(東方淸節士)라는 호(號)로 불렸으며 벼슬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르렀다.

손순효(孫舜孝) 1427년(세종 9) ~ 1497년(연산군 3)

자(字)는 경보(敬甫), 호(號)는 물재(勿齋), 칠휴거사(七休巨士),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밀(密)의 아들. 1453년(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 1457년(세조 3)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했다. 그후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전한 겸 집의(典翰兼執義)로서 17항목(項目)의 정책을 상소(上疏)하여 채택되자 1471년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특진되었다. 성종(成宗)이 윤비(尹妃)를 폐위(廢位)할 때 그 부당함을 극간했으며 148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 나라에 다녀와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두둔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좌천되었다가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1487년 「식료찬요(食療撰要)」를 찬진(撰進)했다. 1496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고령을 이유로 사퇴코자 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손증효(孫曾孝)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손주(孫 澍) ? ~ 1539년(중종 34). 자(字)는 여림(汝霖), 시호(諡號)는 희질(禧質), 순효(舜孝)의 아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장령(掌令)․정언(正言)․수찬(修撰)․부제학(副提學) 등을 거쳐 1508년(중종3)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고, 이어 대사헌(大司憲)․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의 처벌에 가담했다. 뒤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라 1521년 하존시사(賀尊諡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개성 유수(開城留守)․예조 참판(禮曹參判)․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1531년 예조 판서에 승진,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을 거쳐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죽었다.

손부(孫 溥)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손윤회(孫胤會) 조선에서 승지(承旨)를 지냈다.

손식(孫 軾)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손윤선(孫胤善) 조선조(朝鮮朝) 때 참의(參義)를 지냈다.

손필대(孫必大) 1599년(선조 32) ~ ?. 자(字)는 이원(而遠), 호(號)는 세한재(歲寒齋), 몽열(夢說)의 아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630년공청도 도사(公淸道都事)를 지낸 뒤 사복시정(司僕寺正)․통례원통례(通禮院通禮)․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시문으로 이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