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해주석씨시조(海州石氏),석성(石星),해주석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7 23:36 수정일 : 2018-04-19 12:2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해주석씨(海州石氏)의 시조(始祖) 석성(石星)은 중국(中國)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명(明)나라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이과(吏科)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에 뽑혀 목종(穆宗) 즉위년에 직간(直諫)을 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신종(神宗) 때 다시 등용되어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1584년(명나라 신종 12, 조선 선조 17) 종계변무(宗系辨誣)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병(援兵)을 파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의 은인(恩人)이다.

해주(海州)는 황해도(黃海道)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내미홀(內米忽), 일명 지성(池城)․장지(長池)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다가 1938년 부(府)로 승격, 1940년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후 명(明)나라 신종(神宗)은 사신(使臣)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 왜 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 성(石 星)에게 물어 투옥(投獄)시켜 옥사(獄死)케 하였다.

「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에 의하면 석 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의 딸로서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으로 조선의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지원하게 하는데 숨은 공적이 컸다고 한다.

석 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형제 중 차남 천(洊)은 1597년(만력 25, 조선 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伽倻山)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석씨(星州石氏)가 되었으며, 장남 담(潭)은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海州)에 이르자 왕(王)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해주(海州)로 사적(賜籍)하였다.

그 후 담(潭)의 작은 아들 귀당(貴棠)과 손자 난(亂 : 귀실의 아들)이 청인(淸人)을 피하여 산음현 모호리(山陰縣 毛好里 :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 추내동)에 이거(移居)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양군(首陽君) 담의 증손 중립(仲立 : 난의 맏아들)이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진번(進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 참의(刑曹 參議)을 지냈다. 한편 천(洊)의 증손 숭길(崇吉 : 이수의 맏아들)과 선일(善一) 부자가 가선대 부로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순조(純祖) 때 와서는 후손 준옥(俊玉)이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낸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외 좌승지(左承旨)을 지낸 재풍(在豊)과 군자감정(軍資監正) 관기(冠琦)가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는 상룡(祥龍)과 채룡(彩龍)이 항일 투쟁에 공헌하여 해주 석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석씨(海州石氏)는 남한(南韓)에 9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해주석씨조상인물

석담(石 潭) 자(字)는 형현(亨見), 호(號)는 고옹(孤翁). 조선(朝鮮) 때 수양군(首陽君)에 봉(封)해졌다.

석이수(石泥壽) 자(字)는 중여(重汝).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호군(龍驤衛護軍)을 역임하였다.

석중립(石仲立) 1664년(현종 5) ~ 1766년(영조 42) 자(字)는 달지(達之).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지냈다.

석숭길(石崇吉) 자(字)는 자안(自安), 호군(護軍) 이수(泥壽)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을 역임하였다.

석진번(石進繁) 1684년(숙종 10) ~ 1742년(영조 18)  자(字)는 경관(慶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중립(仲立)의 아들.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석선일(石善一) 1660년(현종 1) ~ 1726년(영조 2)  자(字)는 덕경(德卿).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을 지냈다.

석원식(石元植) 1744년(영조 20) ~ 1802년(순조 2)  자(字)는 경천(擎天).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을 역임했다.

석종발(石宗發) 자(字)는 흥중(興仲).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을 지냈다.

석태옥(石太玉) 초명(初名)은 종달(宗達), 자(字)는 경탁(景琢).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석준옥(石俊玉) 1831년(순조 31) ~ 1896년(고종 33)  자(字)는 윤중(允中).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석종문(石宗文) 1816년(순조 16) ~ 1877년(고종 14)  자(字)는 영현(永顯).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석재풍(石在豊) 1826년(순조 26) ~ 1892년(고종 29)  자(字)는 경오(擎五). 좌승지(左承旨)을 역임하였다.

석관기(石冠琦) 1736년(영조 12) ~ 1768년(영조 44)  자(字)는 화경(和慶).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석상룡(石祥龍) 1870년(고종 7) ~ ?. 자(字)는 용견(龍見). 의병(義兵)을 일으켜 경기(京畿), 충청도(忠淸道) 지방에서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온 문태수(文泰守), 박화서 등과 합세하여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남원(南原)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진주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석채룡(石彩龍) 자(字)는 상선(상善), 호(號)는 지산(智山). 한말(韓末)의 항일투사(抗日鬪士)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