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남평서씨(南平徐氏),남평서씨시조서호(徐灝),남평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7 17:15 수정일 : 2018-04-27 14:1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남평서씨(南平徐氏)은 이천 서씨(利川徐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원손(遠孫) 서호(徐灝)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호(號)는 누대(累代)로 남평(南平)에 세거(世居)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그의 아들 효당(孝堂)이 조선조(朝鮮朝)에서 전생서 판관(典牲署判官)을 역임하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손자 우(祐)와 지(祉)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세거지(世居地)인 남평(南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이천 서씨(利川徐氏)에 분적했다고 한다.

남평(南平)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군(羅州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을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경덕왕(景德王)이 현웅현(玄雄縣)으로 고쳐 무주(武州 : 광주의 옛 이름)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조(高麗朝)에서는 남평 (南平) 또는 영평(永平)이라 하여 나주목(羅州牧)에 속했었다. 그후 여러 차 례 변천을 거쳐 1913년 나주군(羅州郡)에 합해져서 지금의 남평면(南平面) 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현감(縣監) 우(祐)의 아우 지(祉)는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으로 명망이 높아 석학(碩學) 김종직(金宗直)의 격찬을 받았으며, 1498년(연산군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승지(承旨)이 되었으나 폐위(廢位)된 단경왕후(端敬王后 : 중종의 비 신씨)의 복위(復位)를 상소하다 탄핵을 받은 박 상(朴 祥)과 김 정(金 淨)의 무고함을 변호하다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던 이 행(李 荇)과의 의견 충돌로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鄕里) 로 돌아갔다.

그외 참봉(參奉) 연(演)의 아들로 현감(縣監)을 지낸 탁(晫)과 전적(典籍)을 역임한 국정(國楨)의 부자(父子)가 남평 서씨를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평서씨(南平徐氏)은 남한(南韓)에 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남평서씨조상인물

서효당(徐孝堂) 호(號)는 익롱(益聾). 조선조에 전생서 판관(典牲署判官)을 역임하였다.

서우(徐 祐)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지(徐 祉) 1468 (세조 14) ~ 1537 (중종 32)

자(字)는 수지(綏之), 호(號)는 나정(懶亭). 학문과 문 장이 뛰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인정을 받아 조광조(趙光祖), 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했고, 1498년(연산군 4) 문과(文科)에 급제, 전적(典籍)이 되었다.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우고 수찬(修撰), 교리(校理)에 이어 순천 부사(順天府使)을 지냈다.

1515년(중종 10) 승지(承旨)이 되고, 이어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었는데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復位)를 상소한 박 상(朴 祥), 김정(金淨)이 탄핵을 받자 그들을 논구(論救)했으나 이 행(李 荇)과의 의견 충돌로 사직, 고향에 돌아갔다.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신진사류(新進士類)가 화를 당한 이후, 공조, 병조의 판서(判書), 이듬해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서연(徐 連)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서열(徐 說) 조선조(朝鮮朝) 때 진사(進士)를 역임하였다.

서탁(徐 晫)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서국정(徐國楨) 조선(朝鮮)에서 전적(典籍)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