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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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3 14:21 수정일 : 2018-01-05 10:10

함양박씨시조 및 함양박씨본관의 유래

신라 종성(宗姓)의 후예인 함양박씨(咸陽朴氏)는 경명왕(景明王 : 신라 제54대 왕, 재위기간 : 917924)의 세째 아들 언신(彦信)속함대군(速咸大君)에 봉해졌으므로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고, 속함(速咸)이 함양(咸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貫鄕)을 함양으로 삼게 되었다.

함양(咸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속함군(速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함양군(咸陽郡)이 되어 합주(陜州 : 합천)에 속하였다가 함()을 함()으로 고쳐서 함양(咸陽)이 되었다. 1172(명종 2) 함양현(咸陽縣)으로 강등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군()이 되었고, 1914년 안의군(安義郡)7개면을 병합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이속시켜 함양읍으로 승격시켰다.

그후 중시조(中始祖) (: 예부 상서를 역임)의 현손(玄孫) 신유(臣蕤)가 고려 고종(高宗) 때 김경손(金經孫)과 더불어 나주(羅州)에서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고, 슬하에 아들 6형제를 두어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 지문(之文)을 파조(派祖)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와 문원공파(文元公派 : 지빈)․함양군파(咸陽君派 : 지량)․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 지수)․어사공파(御史公派 : 지온)․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 지영) 등으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 ()의 아들 충좌(忠佐)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폐신(嬖臣) 박 연(朴 連)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무고를 당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나와 개성부윤(開城府尹)을 거쳐 충목왕(忠穆王) 때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왕()에게「정관정요(貞觀政要 : 중국 당태종과 신하의 문답이나 군신사적을 분류 편찬하여 위정자의 참고로 했던 책)」를 시강(侍講)했고, 당대의 석학 역동(易東) 우 탁(禹 倬)과 쌍벽을 이루었던 역학(易學)의 대가(大家)로 명망이 높았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으로 불교의 배척을 상소했던 초(: 문량공이의 손자)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세종(世宗) 때는 북변에 여진(女眞)의 잦은 침입으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 용성(龍城)으로 옮기려 하자 이를 반대하여 국토(國土)가 좁아드는 것을 막았다.

중추원사(中樞院事) ()의 아들 안()은 창왕(昌王) 때 원수(元帥)로서 대마도(對馬島)에 잡혀 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조선태종(太宗) 때 경기도 수군도체찰사에 이르렀다.

세종(世宗) 때 전라도 수군처리사(水軍處理事)와 도총제(都摠制)를 역임했던 실()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이 어릴 때 그의 아버지 안()이 전라도의 도안무사(都按撫使)로서 항복한 왜적들을 처리하였는데 그때 왜인에게 군사기밀을 알리는 말을 하였다고 하여 태조(太祖)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斬刑)을 받게 되었다.

이때 실이 경비가 삼엄한 궁궐 안에 잠행하여 태조의 대전 앞에서 뒹굴며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태조는 실의 효행(孝行)에 감동하여 구명사절을 보내어 형이 집행 되는 순간에 안()이 구명되었고, ()은 보은의 뜻으로 나라에 충성하여 당상관까지 올랐다고 한다.

한편 태종(太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습()의 현손 세무(世茂 : 생원중검의 아들)는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명종(明宗) 때는 내섬시정(內贍寺正)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고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일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진 영문(永文)과 명종조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민헌(民獻)이 유명했으며, 현령(玄齡)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아우 희령(希齡)과 함께 순절하여 가통(家統)을 세웠다.

돈령부정(敦寧府正) 세영(世榮)의 아들 대립(大立)은 조선조에서 가문을 일으킨 중흥 인물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중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 양주 교수(楊洲敎授)를 거쳐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올라 수십년 묵은 송사(訟事)를 해결하여 지평(持平)에 올랐으며, 선조조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와 판돈령부사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선조 즉위에 공을 세웠던 소립(素立), 호조 참판(戶曹參判) 정립(挺立), 주자학(朱子學)에 심오했던 지계(知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올랐던 내정(乃貞)과 감찰어사(監察御使) 득겸(得謙),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승운(承運) 등이 뛰어났으며, 군수(郡守) ()의 아들 종부(宗阜)는 인조(仁祖)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과 헌납(獻納) 등을 거쳐 김제 군수(金提軍需)로 나갔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앞장섰다가 함북 안변(咸北安邊)에서 순절한 기봉(基鳳)과 학자(學者) 의병장(義兵將)으로 유명했던 기대(基大)가 뛰어났으며, 봉천감옥(奉天監獄)에서 순절한 찬희(燦熙)<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고, 일본 천황을 죽이려 했던 열(: 영수의 아들)과 함께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전통(傳統)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박씨(咸陽朴氏)는 남한(南韓)163,6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양박씨조상

역대인물(歷代人物)

박선(朴 善)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박인정(朴仁挺) 예부 상서(禮部尙書) ()의 아들. 고려(高麗) 때 예부 상서를 지냈다.

박신청(朴信淸) 고려조(高麗朝)에 예부상서(禮部尙書)․검교신호위장군등을 역임하였다.

박윤정(朴允禎) 고려 때 판호부상서(判戶部尙書)를 지냈다.

박신유(朴臣蕤) 초명(初名)은 신보(臣寶), 시호(諡號)는 충질(忠質). 1237(고종 24) 김경손과 함께 호남의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박지문(朴之文) 고려 때 검교군기시소감(檢校軍器寺少監)에 올랐다.

박지빈(朴之彬) 시호는 문원(文元). 고려 때 위위윤(衛尉尹)을 지냈다.

박지량(朴之亮) 1274(원종 15) 여몽 연합군(麗夢聯合軍)이 일본을 정벌할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 휘하의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事)로 참전, 대마도(對馬島)를 공략하고, 일기도(壹岐島)를 쳐서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이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관 군천호(武德將軍官軍千戶)의 벼슬을 받았다.

그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事)․전라도 순문사(全羅道巡問使)를 역임하였으며, 1289(충렬 15)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1290(충렬왕 16)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좌군 만호(左軍萬戶) 로 이천(伊川)에 진을 치고 거란(契丹)군을 격파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박지수(朴之秀) 고려(高麗)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박지온(朴之溫) 고려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하였다.

박지영(朴之穎) 고려조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박경(朴 冏) 고려조에 시강원 시학(侍講院侍學)을 역임하였다.

박장(朴 莊) 고려 때 군부 총랑(軍部摠郞)으로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이(朴 理) 시호(諡號)는 문량(文良). 고려 때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냈다.

박겸(朴 謙) 고려(高麗) 때 선부 산랑(選部散郞)을 지냈다.

박계원(朴季元) 고려조(高麗朝)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박오(朴 汚) 고려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다.

박안창(朴安昌) 고려조(高麗朝)에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박눌(朴 訥) 고려 때 사인(舍人)을 지냈다.

박충좌(朴忠佐) 1287 (충렬왕 13) 1349 (충정왕 1)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庵), 시호는 문제(文齊), 군부 총랑(軍簿摠郞) ()의 아들.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 연(朴 連)의 비행을 막다가 도리어 무고를 당해 해도(海島)에 유배되고, 뒤에 풀려나와 내서사인(內書舍人)․밀직 제학(密直提學)․개성 부윤(開城府尹) 등을 거쳐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시강(侍講)했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이 되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양계(朴良桂) 고려(高麗) 때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역임하였다.

박광실(朴光實) 고려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박인계(朴仁桂) 1362(공민왕 11) 김 용(金 鏞)의 난을 평정하였고 예의 판서(禮儀判書)․양광도 안무사(楊廣道按撫使)를 겸하여 연해변에 침입한 왜구를 격멸하였으며,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공주 지방의 왜적을 맞아 개봉사(開奉寺)에서 격전을 벌이다 전사 하였다. 충의열사(忠義烈士)로 정려(淨侶)가 세워졌으며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박중휘(朴重徽) 고려조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역임하였다.

박현(朴 玄)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박민중(朴敏中) 조선 때 군사(郡事)를 지냈다.

박길중(朴吉中) 조선(朝鮮) 때 호부 시랑(戶部侍郞)을 역임하였다.

박정(朴 珽) 고려 때 찬성(贊成)을 지냈다.

박전(朴 琠) 고려 때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렀으며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박신(朴 信) 고려조에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박경(朴 瓊) 고려조(高麗朝)에 판서(判書)를 지냈다.

박번(朴 璠) 고려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박사직(朴斯直) 고려 때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박원렴(朴元廉) 고려(高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박성원(朴成遠) 고려조(高麗朝)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박덕상(朴德祥) 고려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박초(朴 礎) ()는 자허(子虛), ()는 사헌(士軒).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고려말(高麗末)에 불교(佛敎)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 불교를 국교(國敎)로 하던 당시 조야(朝野)를 놀라게 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등과(登科)하여 전라도 수군도절제사(全羅道水軍都節制使) 및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국방(國方)에 공()을 세웠다. 그후 함길도(咸吉道) 및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이조 판서 (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중국(中國) 또는 일본(日本) 통신사(通信士)로 외교(外交)에도 탁월한 수완을발휘하였다.

1424(세종 6) 북변에 여진(女眞)의 침입이 잦으므로 조정에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 용성(龍城)으로 옮기려 하자 이를 반대, 부령(副寧)에 존속케 하여 국토(國土)가 축소되는 것을 막았다.

박부(朴 敷) 조선 태종(太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박번(朴 蕃) 조선 때 교수(敎授)를 지냈다.

박헌(朴 軒) 고려말(高麗末)에 판결사(判決事)를 지냈고, 조선초 공조 전서(工曹典書)로 개국에 공()을 세웠다.

박언(朴 彦) 조선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박성관(朴成瓘) 조선(朝鮮) 때 대리경(大理卿)을 역임하였다.

박득시(朴得時) 조선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박안(朴 安) 고려말 왜구(倭寇)를 수 차례 격퇴한 공으로 경기도 연해절제사(京畿道沿海節制使)가 되었고, 1389(창왕 1) 원수(元帥)로서 박 위(朴 葳)와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포로가 된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는데 공을 세웠다. 1400(정종 2)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408(태종 8)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서 전라(全羅)․충청(忠淸)․경기도수군도체찰사(京畿道水軍都體察使)를 겸하였다.

박성림(朴成霖) 조선 때 군사(郡事)를 지냈다.

박춘미(朴春美) 조선(朝鮮) 때 판윤(判尹)을 지냈다.

박거실(朴居實) 조선 태종(太宗) 때 좌윤(左尹)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박선(朴 鮮) 조선조(朝鮮朝)에 홍문관 동정(弘文館同正)을 지냈다.

박습(朴 習) ? 1418 (태종 18)

태종(太宗) 때 관찰사․인녕부윤(仁寧府尹) 등을 지내고 1412(태종 12)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부임, 김제(金提)의 벽골제(碧骨提)를 수축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417년 경상도 도관찰사로 전직,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고,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전직했다가 병사(兵事)를 상왕(上王 : 태종)에게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사천(泗川)에 유배(流配) 되었다.

박실(朴 實) 시호(諡號)는 정효(정孝), 문하평리(門下評理) ()의 아들. 세종(世宗) 때 전라도 수군처리사(全羅道水軍處理事)․도총제(都摠制) 등을 역임하였다.

박의손(朴義孫) 1403(태종 3) 문과에 급제한 후 감찰(監察)을 지냈다.

박세영(朴世榮) 조선(朝鮮)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으며 독특한 필법(筆法)을 구사하였다.

박성양(朴成陽) 시호(諡號)는 정헌공(定憲公). 고려(高麗) 말 정포은(鄭圃隱)의 문인(門人)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으나 고려가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수 차레에 걸쳐 벼슬에 오를 것을 태조(太祖)가 권하였으나 사양하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던 중, 왜구의 약탈이 심해지자 백성을 구제하고자 태종(太宗) 때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어 세종(世宗) 때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고 도총관(都摠管)에 올랐으며 그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무양(朴茂陽) 조선에서 전라도 수군절제사(全羅道水軍節制使)를 지낼때 왜구(倭寇)를 토벌하다가 순사(殉死)하였다.

박흥양(朴興陽) 조선(朝鮮)태종(太宗)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으며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박부(朴 富) 조선 개국(朝鮮開國) 후 상서(尙書)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판서(判書)를 지낸 사촌 형제인 박흥택(朴興擇)과 함께 함양(咸陽) 백운산(白雲山)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박환(朴 煥) 조선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박희문(朴希文) 조선 때 군사(郡事)를 지냈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박양손(朴良孫) 조선(朝鮮) 때 검상(檢詳)을 지냈다.

박수지(朴遂智) 조선 때 청백리(淸白吏)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에 이르렀다.

박숭탕(朴崇湯) 조선 때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를 역임하였다. 3()가 높은 관직에 이르러 가문을 빛내니 후손들이 청주근교(淸州近郊)에 숭모단(崇慕壇)을 건립하여 3대 조상의 공덕을 추모하고 있다.

박중경(朴重慶)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박자경(朴子慶) 조선 때 생원(生員)을 지냈다.

박규(朴 規) 조선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박구(朴 矩) 조선(朝鮮) 때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박비정(朴庇禎)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계부(朴季阜)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안부(朴安阜) 1466(세조 12) 문과에 급제한 후 장령(掌令)를 지냈다.

박이관(朴以寬) 자는 자용(子容), 호는 보옹(葆翁), 진사(進士) 수하(遂何)의 아들. 1492(성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한(典翰)․보덕(輔德)을 거쳐 중종 때 담양 부사(潭陽府使)․홍주 목사(洪州牧使)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후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했다. 창평(昌平)의 유곡사(維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이량(朴以良) 조선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이홍(朴以洪) ()는 월영당(月影堂),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組)의 문인(門人). 연주육현(連珠六賢)의 한 사람으로 당대에 칭송이 높았던 학자(學者)이다.

박숙옹(朴肅雝) 조선(朝鮮) 성종(成宗)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성건(朴成乾) 1473(성종 4)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縣監)에 이르렀으며 학문에 능통하여 농암집(聾巖集)을 남겼다.

박권(朴 權) 1496(연산군 2)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縣監)을 지냈고 중종(中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박조(朴 조) 조선(朝鮮) 때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를 지냈다.

박훈(朴 薰) ()는 수심제(收心齊).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된 신하로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소조(朴紹祖)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경종(朴慶宗) 조선 때 방어사(防禦使)를 지냈다.

박희손(朴喜孫) 조선(朝鮮) 때 군사(郡事)를 지냈다.

박철산(朴鐵山)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박중호(朴仲豪) 1500(연산군 6)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평(朴 枰) 조선 세종(世宗) 때 선교랑 교수(宣敎郞敎授)를 역임하였다.

박운준(朴云俊) 1506(중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정자(正字)를 지냈다.

박사희(朴士熹) ()는 묵재(黙齋). 조선 때 학자(學者)로 이름이 높았다.

박철(朴 徹)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평(朴 枰) 조선 문종(文宗) 때 선공봉사(繕工奉事)를 지냈다.

박윤검(朴允儉) 조선 세조(世祖) 때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박명손(朴命孫) 1514(중종 9) 문과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종녕(朴宗寧)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낼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인조(仁祖)를 호위하였고, 강화(講和) 후 세자(世子 : 효종)가 볼모로 연경(燕京)에 갈 때 호종하였다.

박문서(朴文瑞) 조선(朝鮮)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박종무(朴宗茂) 조선에서 무과에 급제한 후 호분위 부호군(虎賁衛副護軍)으로 변방인 북청(北靑)을 수호한 무장(武將)으로서 북청파(北靑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박영창(朴永昌)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천령군(天嶺君)에 봉해졌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영문(朴永文) ? 1513 (중종 8)

생원(生員)으로서 무과(武科)에 급제, 연산군 때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일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06(중종 1) 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있다가 류순정(柳順汀)을 따라 부원수(副元帥)로서 삼포 왜란(三浦倭亂)을 평정한 공으로 공조 판 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간관(諫官)의 탄핵(彈劾)으로 파직되었다.

박세무(朴世茂) 1487 (성종 18) 1554 (명종 9)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逍遙堂), 생원(生員) 중검(仲儉)의 아들. 1516(중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1(중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기용되고, 여러벼슬을 거쳐 헌납(獻納)이 되었다. 1539(중종 34)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을 지내고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나가서 잘 다스렸으며, 1544년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 이듬해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 안변 부사(安邊府使), 1548(명종 3) 내자시정(內資寺正), 후에 내섬시정(內贍寺正)․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예조 판서에 추증(追贈), 괴산(槐山)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세옹(朴世翁) 1493 (성종 24) 1541 (중종 36)

자는 경운(景雲). 1519(중종 1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2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된 후 검열(檢閱)을 거쳐 1539년 당상관(堂上官)이 되고 예조 참의(禮祖參議)를 지냈다.

이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1540년 병조․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박영란(朴英蘭)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곤(朴 崑) 조선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박눌(朴 訥) 조선 때 찰방(察訪)으로 학행(學行)이 높아 추앙을 받았으며, 경북(慶北) 함창(咸昌)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고 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박거린(朴巨鱗) 1506(중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장령(掌令)을 지냈다.

박대립(朴大立) 1512 (중종 7) 1584 (선조 17)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위당(無衛堂), 돈령부정(敦寧府正) 세영(世榮)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40(중종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양주(楊州)의 교수(敎授)로 나갔다.

형조 좌랑(刑曹佐郞) 때 정실관계려 수십년 묵은 송사(訟事)를 판서(判書)에게 항변(抗辯)하여 종결(終決)을 지음으로써 영의정(領議政) 심연원(沈連源)의 추천으로 지평(持平)이 되었다. 1567(명종 22)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고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대사간(大司諫)․함경도 관찰사․대사헌(大司憲)․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 1579(선조 12)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서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특진, 이조 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우참찬(右參贊)․호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으며, 1582(선조 15)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 이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다시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박제립(朴悌立) 조선 때 곡산 군수(谷山郡守)를 지냈으며 1628(인조6)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박홍선(朴弘先)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대기(朴大器)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고경명(高敬命)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금산 전투(錦山戰鬪)에 참전하였었다.

박소립(朴素立) 1514 (중종 9) 1582 (선조 15)

자는 예숙(豫叔). 1555(명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림(士林) 출신의 신진 관리로 촉망을 받아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이조 판서 이 양(李 樑)과 사이가 나빠 1563년 이양과 친근한 대사헌 이 감(李 戡)의 탄핵으로 파면, 1개월 후 이 양이 몰려나자 부교리(副校理)로 복직,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명종(明宗)이 후사 없이 죽자 이준경(李浚慶)․이양원(李陽元) 등과 함께 선조를 즉위케 하는 데 공이 많았다. 1571(선조 4)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박정립(朴挺立)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형린(朴亨鱗) 1517(중종 12)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박홍린(朴洪鱗) 1523(중종 18)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나 153 7(중종 32) 김안로(金安老)의 정변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박사백(朴巳百)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민헌(朴民獻) 1516 (중종 11) 1586 (선조 19)

자는 희정(希正), 초자는 이정(頤正), 호는 정암(正菴)․슬간재(瑟간齋)․의속헌(醫俗軒)․저헌(樗軒), 좌랑(佐郞) ()의 아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46(명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수찬(修撰)을 지낸 뒤 1553(명종 8) 사가독서(賜假讀書)했다.

후에 해남 현감(海南縣監)․수찬․지평(持平)․교리(校理) 겸 지제교(知製敎)․대사헌을 역임, 그후 강원도 관찰사로 있었다. 한때 관작(官爵)을 삭탈(削奪) 당했다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기용되었다.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부승지(副承旨)․함경 북도 병마절도사․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다.

박령(朴 苓) 조선 때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박붕린(朴鵬鱗) 1534(중종 29)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설서(設書)에이르렀다.

박종린(朴從鱗) 1533(중종 28)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박사립(朴思立) 조선 때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였다.

박희립(朴喜立) 1558(명종 13) 문과에 급제한 후 길주 목사(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박승원(朴承源) 1562 (명종 17) ?

자는 계유(季悠), 호는 설파(雪坡), 직장(直長) 대기(大器)의 아들.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함께 의거(義擧),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도 또다시 의병을 일으켜 임 환(林 懽)과 함께적을 격파, 이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계원도유사(繼援都有司)가 되었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에 다시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75세의 노령으로 조행립(曺行立)과 함께 의병을 모아 군량미의 수송에 힘썼다. 뒤에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성오(朴省吾) 조선(朝鮮) 때 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를 지냈으며 인조 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 괄(李 适)의 난때 왕을 호가(扈駕)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위하는데 공을 세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존오(朴存吾) () 성오(省吾)와 같이 이 괄(李 适)의 난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위하는데 공을 세웠다.

박란(朴 蘭) 1544(중종 39) 문과에 급제한 후 풍천 군수(豊川郡守)를 지냈으며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생으로 시문(詩文)에 능통하였다.

박건원(朴乾元) 조선(朝鮮)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부장(部將)을 역임하였다.

박곤원(朴坤元) ()는 옥계(玉溪).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 전념한 학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박문(朴 雯) ()는 송헌(松軒). 불교(佛敎)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박명수(朴命壽) 조선 때 도검정(都檢正)을 지냈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전주(全州) 전투에서 순절(殉節)하였다.

박준(朴 駿)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순절(殉節)하였으며,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박지형(朴之亨) 1564(명종 19) 문과에 급제한 후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박간생(朴艮生) 조선조(朝鮮朝)에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박현령(朴玄齡) 조선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동생 희령(希齡)과 함께 금산 전투(錦山戰鬪)에 참가하여 순절(殉節)하였다.

박사신(朴士信) 조선(朝鮮) 때 학자로 칭송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위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策錄)되었다.

박계천(朴繼天) 조선 선조(宣祖) 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으로 책록(策錄)되었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

박문필(朴文弼) 조선(朝鮮) 때 우승지(右承旨)에 추증되었다.

박혼(朴 渾) 임진왜란 때 조중봉(趙重峰)과 함께 백의 종군(白衣從軍)하여 금산(金山)전투에서 순절(殉節)하였다. 그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朴 琛) 조선(朝鮮)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박종정(朴宗珽) 조선조(朝鮮朝)에 별제(別提)를 지냈다.

박명립(朴名立) 조선 때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를 지냈다.

박지계(朴知誡) 1573 (선조 6) 1635 (인조 13)

자는 인지(仁之), 호는 잠야(潛冶), 시호는 문목(文穆), 수안 군수 (遂安郡守) 응립(應立)의 아들. 1506(선조 39)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사퇴했고, 1609(광해군 1) 좌세마(左洗馬) 겸 서연관(書筵官), 이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사포(司圃)․지평(持平)을 거쳐 1632(인조 10) 사업(司業)․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이듬해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을 깊이 연구했고,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을 종묘(宗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주창한 바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아산(牙山)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지겸(朴知謙) 조선조(朝鮮朝)에서 별좌(別坐)를 지냈다.

박지양(朴知讓)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지경(朴知警)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박득겸(朴得謙) 조선(朝鮮)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하였다.

박득신(朴得新) 조선 때 사재소감(司宰少監)을 지냈다.

박승윤(朴承尹)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승운(朴承運) 조선 때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사성(朴斯聖) 조선 때 금오위 중랑장(金吾衛中郞將)을 지냈다.

박상진(朴相進) 조선 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였다.

박여지(朴汝祉) 조선 때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희안(朴希顔) 1601(선조 34)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박유충(朴由忠) 조선 선조(宣祖) 때 장악첨정(掌樂僉正)을 지냈다.

박수서(朴守緖)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종부(朴宗阜) 1600 (선조 33) 1645 (인조 23)

자는 자후(子厚), 군수(郡守) ()의 아들. 1633(인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설서(設書)․사서(司書) 등을 거쳐 1636년 정언(正言)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이 해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어사(御使)로 장수산성(長壽山城)의 이배원(李培元)의 군사를 독려했고, 강화(江華)에서 해전 (海戰)으로써 적을 맞아 싸웠으나 패전했다. 1638년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고, 교리(校理)․이조 좌랑(吏曹佐郞)․헌납(獻納) 등을 거쳐 김제 군수(金提郡守)로 나갔다가 곧 병으로 사임했다.

박정저(朴廷著) 조선 인조(仁祖)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성인(朴成仁)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낼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박경후(朴慶後) 1644 (인조 22) ?

자는 휴경(休卿), 호는 취옹(醉翁)․만오(晩悟). 1675(숙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수찬(修撰)․정언(正言)을 거쳐 1682년 통신사(通信士)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690년 승지(承旨)․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썼다.

박정설(朴廷薛) 1651(효종 2)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박신지(朴身之) 조선 숙종(肅宗) 때 부사(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세신(朴世身) 조선 숙종(肅宗)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박희민(朴希閔) 조선 숙종(肅宗) 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박성의(朴性毅)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예조 정랑(禮祖正郞)을 역임하였다.

박린(朴 璘) 조선 경종(景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중경(朴重慶) 조선 영조(英祖)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박지경(朴趾慶)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박사형(朴思亨) 조선 영조(英祖)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박진우(朴鎭宇)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박서량(朴瑞良) 조선 영조(英祖)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우규(朴禹圭) 조선 정조(正祖)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박명화(朴鳴和) 조선 순조(純祖)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박주종(朴周鍾) 자는 문원(聞遠), 호는 산천(山泉), 첨정(僉正) 필녕(弼寧)의 아들. 학문이 깊었고 문장이 뛰어났다.

박성형(朴成珩) 1727(영조 3)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시립(朴時立) 조선 때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박재(朴 材)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박기조(朴起祖)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박성로(朴聖輅) 1705(숙종 31)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내정(朴乃貞) 1728(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박태휘(朴泰彙) ()는 삼성당(三省堂). 1719(숙종 45)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위원 군수(渭原郡守)를 역임하였다.

박현보(朴顯輔) 1783(정조 7)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으며 송환기(宋煥箕 : 성담)의 문하생으로 학행(學行)이뛰어났다.

박원묵(朴元黙) ()는 석하(石下). 조심암(趙心蓭)의 문인으로 도정(都正)을 지냈다.

박재화(朴載華) ()는 관재(觀齋). 송연재(宋淵齋)의 문인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박주운(朴周雲) 1820 (순조 20) ?

자는 목경(穆卿), 호는 경당(鏡塘), 필녕(弼寧)의 아들. 생원(生員)을 거쳐 1852(철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문장이 능하고 수학에도 밝았다.

박시순(朴始淳) 조선 고종(高宗)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박기봉(朴基鳳) 한일 합방(韓日合邦) 후 조국의 광복운동(光復運動)에 가담하여 함북(咸北) 안변(安邊)에서 순사(殉死)하였다.

박기대(朴基大) 구한말(舊韓末)의 학자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으며 의병장(義兵將)으로 일제(日帝)에 항거하였다.

박찬희(朴燦熙) 한일 합방 이후 독립군(獨立軍)에 가담하여 활약하다 체포되어 봉천감옥(奉天監獄)에 투옥되었다가 옥사(獄死)하였다.

박열(朴 烈) 1902 (광무 6) ?

본명은 준식(準植), 일명 혁(), 영수(英洙)의 아들. 경북 문경(聞慶) 출신. 함창(咸昌)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상경, 경성 제 2고등보통학교 사범과(師範科)에 다닐 때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퇴학당했다.

1919년 도일(渡日), 무정부주의 운동(無政府主義運動)에 투신하여 권력구조(權力構造)와 천황제(天皇制)를 반대하고, 이를 무력으로 타도하기 위해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다.

1923년 일본 천황 히로히또(裕仁)를 죽이려구 자기 애인 가네꼬(金子文子)의 협조를 얻어 거사하려던 직전에 발각, 체포되어 19263월 대심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 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 1945년 해방으로 22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일본에서 조선건설동맹(朝鮮建設同盟)을 조직, 이어 재일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고 1948년 정부수립으로 귀국했다가 6.25사변 때 납북(拉北)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