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충주박씨시조,박영(朴英),충주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3 13:41 수정일 : 2018-02-06 16:49

충주박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충주박씨(忠州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기간 : 917~924)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왕(沙伐王) 언창(彦昌)이 11세손 박영(朴 英)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충주박씨세보(忠州朴氏世譜)」에 의하면 중시조 영(英)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오른 원정(遠挺)의 둘째 아들로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당시 중원경(中原京)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본관(本貫)을 충주(忠州)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완장성(薍長城)․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2대 왕, 재위기간 : 534~576)이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추(忠州)로 개칭하고 뒤에 창화군(昌化軍)이라하여 중원도(中原道)라 칭하다가 고종(高宗) 떄 국원경(國原京)이 되었으며, 조선(朝鮮) 명종(明宗) 때 유신현(維新縣)으로 부르다가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되었다. 그후 많은 변천을 거쳐 고종 때 20군(郡)을 다스리는 부(府)가 되었다가 1956년 충주면(忠州面) 일원으로는 충주시(忠州市)를 만들고 나머지는 중원군(中原郡)으로 고쳤다.

그 후 영(英)의 아들 신(臣)이 고려 때 검교신호위 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손자(孫子) 원숭(元崇)은 삼사 우사(三司右使)를 역임하여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아들 득승(得升)과 함게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고려 말에 와서는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의 전횡(專橫)을 탄핵했던 8세손 광리(光理)가 개성 소윤(開城少尹)을 세 번이나 역임하고 청렴(淸廉)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진해(鎭海)․직산(稷山) 감무(監務)를 지냈던 진(秦)과 은산 군사(殷山郡事)를 역임한 소(蘇)의 형제가 어지러운 정국(政局)을 피하여 충청도 덕진현(忠淸道德津縣 : 지금의 대전시 가장동)으로 은거(隱居)하였다.

한편 조선조(朝鮮朝)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동고조(同高祖) 안에서 25명을 출사(出仕)시켰던 청간재(聽澗齋) 효함(孝諴)이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에 이르렀으며, 3형제 도덕(道德), 문장가(文章家)를 배출한 지흥(智興)의 아들 하촌(荷村) 정(禎), 눌재(訥齋) 사(祥 : 청백리에 녹선), 육봉(六峯) 우(祐)와 명덕재상(明德宰相)으로 명망이 높았던 사암(思庵) 순(淳) 등이 충주 박씨가 자랑하는 인맥(人脈)이다.

일찍이 석학(碩學) 이퇴계(李退溪)가〈고풍탁식(高風卓識)의 완인(完人)〉이라고 극찬했던 상(祥)은 성격이 간략하고 높아서 악(惡)을 미워함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고「병진청사록(丙辰丁巳錄)」에 기록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여러번 외직으로 나갔다.

중종(中宗) 때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나가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 정(金 淨)과 함께 앞서 단경왕후(端敬王后 : 중종의 비, 신수근의 딸) 신씨(愼氏)의 복위(復位)를 상소했다가 왕의 진노를 사서 오림 역(烏林 驛)에 유배되었으나 풀려나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를 지냈다.

당대의 권신(權臣)이었던 심정(沈貞)이 양천(陽川)에다 소요당(逍遙堂)을 짓고 글 잘하는 사람을 청하여 현판을 쓰는데 상(祥)이 아래와 같은 시(詩)를 지어 풍자했다.

〈반산(半山)에 음식상을 차렸고 가을 구렁 추학(秋壑)에 술잔을 열었도다(半山排案俎秋壑闢燇盂)〉 반산(半山)은 중국 송대(宋代)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왕안석(王安石)의 호(號)요 추학(樞壑)은 가사도(賈似道)의 호인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송(宋)나라를 망친 대신이다. 심정은 뒤에 이 싯귀의 풍자함을 알고 떼어 불태우고 상(祥)에게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특히 상은 성격이 활달하여 고결한 선비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일을 일생의 신조로 삼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떠돌아 다니자 충주(忠州) 집에 불러다가 보살펴 주었으며, 김안국(金安國)과 김세필(金世弼)이 여주(驪州)에 있을 때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어 매년 봄에 찾아가 여주 목사 이희보(李希輔)에게 관의 조곡(糶穀) 200석을 빌어 두 선생과 학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을이 되면 다시 쌀을 몸소 싣고 가서 그 조곡 갚기를 해마다 했다고 한다.

상(祥)의 아우 우(祐)는 중종(中宗) 때 우승지(右承旨)를 지내다가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자 자청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갔고, 뒤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으나 탄핵으로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당하기도 했으나 다시 기용되어 해주 목사(海州牧使)․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명종(明宗) 대 전주부윤(全州府尹)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냇으며, 문장(文章)과 학덕(學德)으로 세인(世人)의 추앙을 받았다.

충주 박씨의 유일한 상신(相臣)이었던 순(淳)은 일찍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워 시(詩)․문(文)․서(書)에 모두 뛰어났으며, 14년 동안이나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격심한 동서 당쟁(東西黨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육행(六行)이 구비된 선비들을 천거했으며 이 이(李 珥)와 성 혼(成 渾)을 옹호하다가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의 백운산(白雲山)에 은거(隱居)했다.

그는 풍신(風神)이 시원하고 명랑하며 항상 몸가짐이 조용하고, 경서(經書)의 깊은 뜻을 해석하여 응대(應對)함이 정민(精敏)하였다. 명종(明宗)이 이르기를 박 순은 송죽(松竹)같은 절조와 지조가 있고, 수월(水月)같은 정신이 있다 고 했으며,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은 박 순과 상대하면 한 덩이의 맑은 얼음과 같아서 정신이 갑자기 시원해짐을 느낀다 고 하였다.

그는 명종(明宗) 때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신 윤원형(尹元衡)과 요승 보우(普雨)를 탄핵하여 꺽음으로서 백성들이 길에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우의정(右議政)에 있을 때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등극을 하례하는 사신(使臣)으로 갔었는데, 외국사절은 대궐의 옆문으로 들어가게끔 관례가 되어 있었으나 순은 정문으로 들어가면서 배신(培臣)이 출입할 때에 혹 표문(表文)을 받들고 왔다면 황제에게 바칠 것인데 어찌 옆문으로 들어간단 말이가 하니 예부(禮部)에서 변론하지 못하고 정문으로 들어오라고 허락하여, 그 후 부터는 우리나라 사신(使臣)이 정식으로 정문 출입을 하였다고 한다.

순(淳)이 탄핵을 받고 강사(江舍)로 물러가 있을 때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술을 하사(下賜)하니 즉석에서 아래와 같은 시(詩)를 지었다.

 

은혜 보답할 길 없어 촌심이 어겨졌으니(答恩無路寸心遠)

쇠잔한 몸을 수습하여 들 사립으로 들어간다.(收佮殘骸返野扉)

한 점의 남산이 볼수록 멀어지니,(一點南山看更遠)

서풍이 불어 눈물을 벽나의에 떨어뜨리네.(西風吹淚碧蘿衣)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박광옥(朴光玉)․고경명(高敬命) 등과 함께 호남(湖南)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무공(武功)을 세원 희수(希壽 : 부사 민제의 아들, 민중에게 입양)가 대가(大鴐)를 호종(扈從)하여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책로되었으며, 이룡(以龍)은 능성(陵城縣令)으로 나갔다가 황간(黃磵)에서 창의(倡義)하여 전쟁에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한 지효(之孝)는 금산(錦山)에서 칠백의사(七百義士)와 순절한 사진(士振), 성리학자(性理學者) 사삼(事三)과 함께 이름을 떨쳤고, 진영(震英)은 이 괄(李 适)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또한 함흥 판관(咸興判官)을 거쳐 평안 도사(平安都事)를 지낸 해(海)와 경사(經史)에 통달했던 사원(思遠)이 유명했고, 효종(孝宗) 때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천거되었던 유동(維棟)과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를 역임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진 금(嶔)은 효자(孝子) 노(簵)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1646년(인조 24) 류 탁(柳 濯)의 모반을 공주진(公州鎭)에서 진압했던 홍우(弘祐)는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호조 판선(戶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수문(守文)은 방축(防築)을 쌓아 관개수리(灌慨水利)를 개선하여 향민(鄕民)의 복리(福利)에 공(功)이 컸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던 세화(世華)는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어 학자(學者)로 유명한 경운(慶運)․세원(世元)․준번(俊蕃)과 더불어 가문을 대표했다.

동형(東亨)은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책록되고 충원군(忠原君)에 봉군되어, 사로당(四老堂)을 지어 후진양성에 진력했던 수근(守謹), 공조 참판(工曹參判) 주흠(周欽), 문필(文筆)로 이름났던 제륜(濟輪) 등과 함께 충절(忠節)과 문벌(文伐)의 가문(家門)인 충주 박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박씨(忠州朴氏)는 남한(南韓)에 34,2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충주박씨조상인물

박신(朴 臣) 고려(高麗) 때 검교신호위 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박원숭(朴元崇) 고려 때 삼사 우사(三司右使)를 지냈다.

박득승(朴得升) 고려에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하였다.

박덕린(朴德麟)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냈다.

박지성(朴之誠) 고려에서 민부 상서(民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

박세량(朴世梁) 고려(高麗) 때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지냈다.

박광리(朴光理) 고려조(高麗朝)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을 지내고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박진(朴 蓁) 호(號)는 송은(松隱).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지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박소(朴 蘇)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효함(朴孝諴) 호(號)는 청간재(廳澗齋). 조선 때 여러 고을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재임시 치적(治績)이 있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박충함(朴忠諴) 조선 때 군기시 사정(軍器寺司正)을 지냈다.

박제함(朴悌諴) 조선조(朝鮮朝)에 군기시 판사 (軍器寺判事)를 지냈다.

박신함(朴信諴) 조선에서 집의(執意)를 역임하였다.

박의흥(朴義興)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지흥(朴智興) 일찍 진사(進士)가 되고 학명(學名)을 떨쳤다. 품성이 맑고 깊어 권신 권 남(權 擥)이 누차 벼슬에 천거하였으나 세조(世 祖)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이를 거절하고 광주(光州)에 은거(隱居)하였다.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박원직(朴原直)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박원창(朴原昌)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을 역임하였다.

박수기(朴秀基) 호(號)는 파은(波隱).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박형문(朴衡文) 자(字)는 규보(奎輔), 호(號)는 이예당(二藝堂). 1468년(세조 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재임중 1475년(성종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육진 어사(六鎭御史)․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창원 부사(昌原府使)․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박형무(朴衡武) 자(字)는 우보(羽輔).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6개 주군(州郡)과 3개 일선(一線) 무관직을 거쳐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박온(朴 溫) 조선 때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역임하였다.

박양(朴 良)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와 중시(重試)에 각각 급제한 후 좌랑(佐郞)․교리(校理)․기주관(記註官) 등을 지냈다.

박정(朴 禎) 자(字)는 창국(昌國), 호(號)는 하촌(荷村). 1492년(성종23) 생원시에 합격,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을 자득(自得)하여 명성이 높아 사림(士林)의 칭송을 받았고, 동생 상(祥)과 우(祐)를 훈육(訓育)하여 대학자(大學者)로 대성(大成)케 하였다.

박상(朴 祥) 1474 (성종 5) ~ 1530 (중종 25)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간(文簡), 진사(進士) 지흥(智興)의 아들. 1496년(연산군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50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서관 정자(敎書館正字)․박사(博士)를 역임했다. 1506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중종 초기에 헌납(獻納)이 되어 종친(宗親)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좌천, 후에 종묘 서령(宗廟署令)․소격 서령(昭格署令)을 거쳐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 현감(臨陂縣監)으로 나갔다.

1511년(중종 6) 수찬(修撰), 이어 교리(校理)․응교(應敎)를 거쳐 담양 부사(潭陽府使)가 되어 1515년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 정(金淨)과 함께 앞서 중종 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復位)를 상소하여 중종의 진노(震怒)를 사서 오림역(烏林驛)에 유배되었다. 1516년 풀려나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 부사(順天府使)가 되었으나 이해 겨울 모친상(母親喪)으로 사직했다.

1519년 복을 벗고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선공감정(繕工監正), 1521년 상주(尙州)와 충주(忠州)의 목사(牧使), 이어 사도사 부정(司䆃寺副正) 등을 지내고, 1526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장원, 1527년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 청백리(淸白吏)에녹선(錄選)되고, 문장가(文章家)로 이름 높았으며,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4가(家)로 칭송된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우(朴 祐) 1476 (성종 7) ~ ?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진사(進士) 지흥(智興)의 아들. 1507년 (중종 2) 진사가 되고 151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된 후 전적(典籍)․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자 자청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갔고, 뒤에 도승지(都承旨)로 있을 때 탄핵을 받고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이어 파면되었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해주 목사(海州牧使)․대사성(大司成)을 거 쳐, 병조․이조의 참의(參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지냈다. 인종 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고 명종 때 전주 부윤(全州府尹)․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박이린(朴以麟) 조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도(朴 壔)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인(朴 堙) 1522년 (중종 17) 무과에 급제한 후 이효원(李孝元)의 부장(副將)으로 남구(南寇)를 토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당색(黨色)을 피하여 제천(堤川)에 은거하였다. 남방의 해송(海松)을 취종(取種)하여 무성한 산림을 가꾸어 현재까지유지되고 있으며 박달상(朴達峠)․옹당(翁堂) 등 유적이 전한다.

박민제(朴敏齊)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박민중(朴敏中) 자(字)는 시숙(時叔). 조선 때 학자(學者)로 18세에 진사가 되었고, 학문이 능통하여 감히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며, 유속(流俗)과 섞이지 아니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그가 주장한 이제론(夷齊論)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

박개(朴 漑) 자(字)는 대균(大均), 호(號)는 인파처사(烟波處士). 일찍부터 과거(科擧)에 뜻이없어 처사(處士)로 자처하였다. 선조(宣祖)가 그의 지행(志行)의 고결함과 학문(學問)의 심오함을 알고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하여 특명(特命)으로 고산 현감(高山縣監), 김제군수(金堤郡守) 등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처사(處士)로 여생을 마쳤다.

박순(朴 淳) 1523 (중종 18) ~ 1589 (선조 22)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시호는 문충(文忠), 우윤(右尹) 우(祐)의 아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53년(명종 8)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을 거쳐 공조․병조․이조의 낭관(郎官)에 이어 수찬(修撰)․교리(校理)․사인(舍人)을 역임, 1555년 (명종 10)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한산 군수(韓山郡守)․이조 참의(吏曹參議)․대제학․대사헌․우의정․좌의정 등을 거쳐 1572년(선조 5)에 영의정에 올라 14년 간이나 재직 했다.

동서 당쟁(東西黨爭)이 격심할 무렵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을 편들다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의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했다. 시(詩)․문(文)․서(書)에 모두 뛰어났고, 특히시는 당시(唐詩)의 풍을 따랐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썼다. 개성(開城)의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나주(羅州)의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인범(朴仁範)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박성즙(朴成楫) 자(字)는 제공(濟恭). 조선에서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성량(朴成樑)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박성권(朴成權) 자는 사예(士預), 호는 소촌(邵村).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박억년(朴億年) 조선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박간(朴 衎) 자는 간지(衎之).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박대수(朴大壽) 자는 인수(仁叟), 호는 송계(松溪). 조선 때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박희수(朴希壽) 자는 덕로(德老), 호는 회헌(悔軒), 부사(府使) 민제(敏齊)의 아들. 1577년(선조 10) 음보(蔭補)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이 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박광옥(朴光玉)․고경명(高敬命)과 함께 호남(湖南)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다.

박이룡(朴以龍) 자(字)는 시윤(施允), 호(號)는 학촌(鶴村). 1577년(선조10)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이조좌랑(吏曹佐郞)․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예조 정랑(禮曹正郞)․사헌부 집의 (司憲府執義)를 거쳐 능성 현령(陵城縣令)으로 나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간(黃澗)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세우니 황의장(黃義將)이라 하였고, 정 철(鄭 澈 : 송강)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청백리(淸白吏)로 천거되었다. 황간(黃澗)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박응훈(朴應勳) 자(字)는 공윤(功允), 호(號)는 오촌(梧村). 조선 때 효성이 지극한 효자(孝子)로 주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조정(朝廷)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주었다.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지효(朴之孝) 자(字)는 자경(子敬). 호(號)는 육유정(六柳亭).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생으로 감찰(監察)․사복시정(司僕寺正)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김장생(金長生)과 더불어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박선(朴 瑄) 자(字)는 원실(元實). 조선 때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치고,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러 권신(權臣)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

박유일(朴惟一) 자(字)는 경지(敬之).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함경도(咸鏡道)에서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등 왕자의 위급함을 구하여 크게 공(功)을 세웠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박사진(朴士振) 자(字)는 경용(敬用), 호(號)는 이락정(二樂亭). 일찍이 학업을 독실히 닦았고 충효(忠孝)가 지극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스승 조 헌(趙 憲)을 따라 의거하여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우고 금산(錦山)에서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순절하였다. 숙종(肅宗) 때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박사삼(朴事三) 자(字)는 여일(汝一), 호(號)는 안정(安定). 조 헌(趙 憲)의 문하(門下)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자(學者)의 추앙(推仰)이 두터웠다. 황간(黃澗)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박진영(朴震英)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남이공(南以 恭)․류효걸(柳孝傑)과 함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박희성(朴希聖) 자(字)는 대이(大而), 호(號)는 돈옹(遯翁). 서 기(徐 起)의 문인. 학문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박희철(朴希喆) 자(字)는 가기(可幾), 호(號)는 오한당(五寒堂). 서 기(徐 起)의 문인. 도학(道學)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아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박해(朴 海) 자(字)는 중함(仲涵), 조선(朝鮮)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正言)․전적(典籍)․지평(持平)․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이조 좌랑(吏曹佐郞)․함흥 판관(咸興判官)을 지낸 뒤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에 이르렀다.

박사원(朴思遠) 자(字)는 중구(仲久), 효우(孝友)로 이름났고, 경사(經史)에 깊이 통달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조수성(曺守誠)과 함께 활약하였고 강화(降和) 후에는 평생토록 은거생활을 하였다.

박사하(朴思遐) 자(字)는 영관(泳觀).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박사(博士)를 지냈다.

박종무(朴從懋) 자(字)는 덕우(德優). 조선 때 부윤(府尹)을 역임하였다.

박유동(朴維棟) 자는 시보(時甫), 호는 일석(一石).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親交)가 있었으며 조헌(趙憲)을 사숙(私淑)했다. 165 3년(효종 4) 진사(進士)가 되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황간(黃澗)의 송계 서원(松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박금(朴 嶔) 자(字)는 경망(景望), 호(號)는 우봉(牛峰). 1613년(광해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정랑(禮曹正郞)․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결성(結城)․임피(臨陂)․만경(萬頃)․풍기(豊基) 등의 외직(外職)을 지내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으며,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로 나갔다.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지고용진서원(龍津書院)에 제향되었다.

박노(朴 輅) 자(字)는 경행(景行), 호(號)는 제호(霽湖). 조선 때 진사가 된 후 음보(蔭補)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으며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박진(朴 軫) 자(字)는 성임(聖任).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세필(朴世弼)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부호군(富護軍)에 이르렀다.

박홍우(朴弘祐) 자(字)는 여길(汝吉). 무과에 급제한 후 은율 현감(殷栗縣監)으로 있을 때 류 탁(柳 濯)이 1646년(인조 24) 모반을 꾀하니 공주진(公州鎭)에서 이를 진압하여 일등 공신에 책록(策錄)되었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수문(朴守文) 1728년(영조 4)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수 차례의 왜구를 토벌하여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퇴관(退官) 후 방축(防築)을 쌓아 관개 수리(灌漑水利)하여 향민(鄕民)의 복리(福利)에 공(功)이 컸다.

박형동(朴亨東) 자(字)는 경시(景始). 조선(朝鮮)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희릉 참봉(禧陵參奉)을 지내고 순릉 직장(順陵直長)에 이르렀다.

박규동(朴奎東) 자(字)는 취오(聚五), 호(號)는 권매당(權梅堂). 조선조(朝鮮朝)에 첨지 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병(朴 炳) 자(字)는 화여(華汝), 호(號)는 채헌(蔡軒).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에 추증되었다.

박세화(朴世華) 자(字)는 회지(悔之), 호(號) 는 애송재(愛松齋).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박사(博士)․좌랑(佐郞)을 거쳐 전적(典籍)․현감(縣監)에 이르렀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경운(朴慶運) 자(字)는 군선(君善), 호(號)는 청전처사(靑田處士).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윤봉구(尹鳳九)와 친분을 두터이 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박세원(朴世元) 자(字)는 인로(仁老), 호(號)는 만회당(晩悔堂). 조선(朝鮮) 때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박준번(朴俊蕃) 자(字)는 덕무(德茂).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4개 군의 군수(郡守)를 역임하였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였다.

박동형(朴東亨) 자(字)는 수부(秀夫), 호(號)는 만촌(巒村), 시호(諡號)는 충효(忠孝). 1724년(경종 4)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특히 우두머리였던 박필현(朴弼顯)을 체포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책록(冊錄)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충원군(忠原君)에 봉해졌다. 또한 단서(丹書)․결권(鈌卷), 화상(畵像), 인각(麟閣)이 내려졌다.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수근(朴守謹) 자(字)는 백공(伯恭), 호(號)는 농와(聾窩).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典籍)․좌랑(佐郞)을 거쳐 현감(縣監)에 이르렀고, 사로당(四老堂)을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박효덕(朴孝德) 자(字)는 윤중(潤仲), 호(號)는 삼한옹(三寒翁). 김이안(金履安)에게 수학(修學)하고 학행(學行)이 높아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으며, 도사(都士)․현감(縣監)․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박주흠(朴周欽) 자(字)는 여직(汝稷), 호(號)는 취간(翠澗). 조선 때 음보(蔭補)로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박이휴(朴頤休) 자(字)는 군양(君養), 호(號)는 소산(素山). 조선 때 학행(學行)이 뛰어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된 후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박원대(朴源大) 자(字)는 사옥(士玉). 조선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박원명(朴源明) 자(字)는 덕홍(德弘). 조선 때 7개 군(郡)의 수령(守令)을 역임한 후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고, 제학(提學)에 추증되었다.

박봉주(朴鳳柱) 호(號)는 초은(樵隱). 조선(朝鮮) 때 진사가 된 후 음보(蔭補)로 이조참판(吏曹參判)․장례원경(掌禮院卿)에 이르렀다.

박용주(朴用柱) 자(字)는 용지(用之), 호(號)는 송사(松史).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지제교(知製敎)을 역임하였다.

박경(朴 涇) 자(字)는 사관(士官), 호(號)는 연화당(蓮花堂).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성렬(朴成烈) 자(字)는 여성(汝成). 1886 년 류인석(柳麟錫)의 부장(副將)으로 항일 운동(抗日運動)을 주도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박영철(朴榮喆) 자(字)는 무경(武卿), 호(號)는 다산(多山). 한말(韓末)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박제륜(朴濟輪) 자(字)는 수어(秀魚), 호(號)는 석당(石堂). 한말(韓末)에 의성(義城)․예천(醴泉)․달성(達城)․성주(星州)․영양(英陽) 5개 군의 군수(郡守)를 역임했으며, 문필(文筆)이 뛰어나 당세(當世)에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