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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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1 19:19 수정일 : 2018-02-12 11:03

박씨의 득성 연원

신라(新羅)가 이룩하기 전에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들은 동해변(東海邊)이나 산골에 흩어져 살아서 육촌(六村)을 이루고 육촌에는 촌장(村長)이 있었으니,

첫째 알천양상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은 이알평(李謁平)으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요,

둘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은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로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요,

셋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은 손구례(孫俱禮)니 경주손씨(慶州孫氏)의 시조요,

넷째 자산진지촌(자 山珍支村)의 촌장은 정지백호(鄭智伯虎)로 경주정씨(慶州鄭氏)의 시조요,

다섯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은 배지타(裵智陀)로 경주배씨(慶州裵氏)의 시조요,

여섯째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촌장은 설호진(薛虎珍)으로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이다.

이렇게 촌장만 있고 임금이 없었다. 서기 기원전 69년에 육촌장이 알천(閼川)에 모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있을 때 양산 아래 나정(蘿井)의 수풀 사이에 오색이 영롱한 서기(瑞氣)가 뻗치고 용마(龍馬)가 큰 소리를 지르고, 어떤 선인(仙人)이 서기를 향하여 절하는 모습이 육촌장에게 보였다.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친히 가까히 가보니 한 용마가 울고 있으며, 포(胞; 보자기) 하나가 있는데 알의 형상 같기도 하고 박 모양 같기도 하였다. 소벌도리공이 신기하게 여겨 포를 풀어보니 거기서 사내아기가 태어나니 풍채(風采)가 단정하고 아름다운지라 동천(東川)에 목욕시켜 드리니 온몸에서 광채가 나고 가까이 있던 새와 짐승들이 신인의 탄생을 축복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기로 육촌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받들어 길렀고, 박 모양의 포에서 탄생했다고 하여 박(朴)으로 성을 삼고, 혁혁한 세상에 오래오래 살아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지어 드렸다 한다.

서기 기원전 57년에 육촌 사람들이 받들어서 임금으로 모시고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徐羅) 또는 사로(斯盧)라 했다. (그뒤 지증왕 때 국호를 新羅로 고쳤다)

이분이 신라의 시조왕이시고 박씨(朴氏)의 시조(始祖)이시다.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이 8왕자에게 8대군(大君)을 봉하였으니, 그 첫째 언침(彦忱)은 밀성대군(密城大君)이요, 둘째 언성(彦成)은 고양대군(高陽大君)이요, 셋째 언신(彦信)은 속함대군(速咸大君)이요, 넷째 언립(彦立)은 죽성대군(竹城大君)이요, 다섯째 언창은 사벌대군(沙伐大君)이요, 여섯째 언화(彦華)는 완산대군(完山大君)이요, 일곱째 언지(彦智)는 강남대군(江南大君)이요, 여덟째 언의(彦儀)는 월성대군(月城大君)으로 봉(封)해져서 이로써 관향(貫鄕)을 삼게 되었다.


월성박씨(月城朴氏) 득관유래(得貫由來)

월성박씨(月城朴氏)는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아들 8형제 중 막내인 언의가 월성대군으로 봉군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을 월성(月城)으로 하게 되었다.

월성(月城)은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개국하여 사로국 즉 서라벌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로 불려오던 중 기원전 65년(탈해왕 9)에 계림으로 개명되었고, 기림왕 때 다시 신라로 고쳤으나 고려 때 경주로 개칭하였다.

서기 987년(성종 7)에는 동경이라 하고 목종 때 낙랑군으로 강등하였다가 현종 때 다시 경주라 하였으며, 이후 안동대도호부 경주목 등으로 변천해 오다가 충렬왕 때 계림부로 고쳐 불렀다. 1415년(태종 15) 경주부로 다시 고치고, 근대에는 1895년(고종 32)에 경주군이 되었으며, 1955년 8월 경주시를 설치하면서 종전의 경주군의 나머지 지역을 월성군으로 개칭하였다가 최근에 이르러 경주시와 통합하여 경주시로 오늘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조선서 겸형(겸형: 월성대군의 10세손)의 손자 귀(귀: 문하시중 유의 아들)가 고려말에 중군사정(中軍司正), 부령을 지냈으나 고려가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인천에 있는 산중에 은거하여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장아산이라 불렀다. 그 후 조선 태종이 여러 차례에 걸쳐 벼슬을 하사하며 그를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를 지켰고, 망경대에 올라 망국의 한을 통곡으로 달래다가 장아산에서 일생을 마쳤다..

구례현감을 역임하고 영남 의흥으로 낙향했던 옹의 증손 민수는 효성이 뛰어나 부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막에서 시묘하여 공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민수의 둘째 아들인 응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70세의 병든 몸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다.

한편, 응상의 조카 종남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 방어에 공을 세워 병조정랑과 평안도절제사겸 순무사가 되었고, 참판 호겸의 증손 홍미는 선조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1624년(인조 4) 창원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 받았으며, 이듬해 목민관으로 치적을 쌓아 경주부윤에 올랐다가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당대의 명인 석학들의 신망을 받았던 홍중(홍중: 호겸의 증손, 용휘의 아들)은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의 전횡을 탄핵했으며, 억울하게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임목대비: 선조의 계비, 영창대군의 모)에게 양식을 바쳤다가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외 영조 때 효행으로 이름난 천우와 종석(종석: 응상의 증손, 여자의 유복자)이 유명했고, 한말에 와서는 능일이 을사보호조약의 울분으로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함으로써 가문을 빛냈다.


월성박씨 인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성박씨는 남한에 26,5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성박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박견(朴鄄) 월성대군(月城大君)의 아들로 벼슬이 고려 때 좌사간(左司諫)이며,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박호(朴灝) 고려. 판예부사(判禮部事)로 월성군에 봉해졌다.

박영록(朴永祿) 고려.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하였다.

박정세(朴貞世) 고려. 문과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박방량(珀方亮) 고려. 문하시랑(門下侍郞)이며 월성군에 봉해졌다.

박박(朴珀) 고려.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시랑을 역임했다.

박지(朴智) 고려. 봉상대부(奉常大夫) 호조의랑(戶曹議郞)을 역임했다.

박천가(朴天佳) 고려.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했다.

박인육(朴仁育) 고려. 대능직(戴陵直)을 역임했다.

박겸형(朴謙亨) 고려. 정순대부(正順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했다.

박유(朴 瑜)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다.

박구(朴 龜) 고려. 자는 우길(于吉), 중군부령(中軍副令)을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인천(仁川)에 해안 둔거(遁居)하여 장아동(藏我洞)이라 이름하고 뒷산을 장아산(藏我山)이라 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꼭대기에 망경대(望京臺)를 쌓아 항상 고려의 멸망을 개탄하며 통곡하다가 사망했다. 묘지는 장아산에 있고, 망경대도 남아있다.

조선시대 인물

박간(朴幹)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과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지냈다.

박휘(朴徽) 도호부사(都護府使)와 판결사(判決司)를 거쳐 사헌부대사헌(司憲府 大司憲)으로 강직한 간관(諫官)으로 이름이 높았다.

박호겸(朴好謙) 호는 송계(松溪), 문과 등제하여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박신겸(朴信謙)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와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박종겸(朴宗謙) 당진(唐津)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박사량(朴士良) 당진(唐津)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박옹(朴 雍) 구례(求禮)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박제인(朴齊仁) 1536년(중종 31)~1618년(광해군 10). 자는 중사(仲思), 호는 황암(篁癌) 또는 정묵(靜黙). 함안(咸安) 출신. 조식(曺植)의 문인 .1594년(선조 27) 천거로 태릉 참봉.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고, 1599년 송(宋)나라 찰방(察訪)을 거쳐 1602년 시직(侍直)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 왕자사부로 취임. 1605년 형조좌랑(刑曹佐郞), 군위(軍威) 현감(縣監)을 지내고 함안(咸安)의 도림서원(道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박대익(朴大益)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지냈다.

박대이(朴大頤) 호는 동호(東湖), 통훈대부(通訓大夫),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를 지냈다.

박계조(朴繼祖) 절도사를 역임.

박인형(朴仁亨) 자는 희로(希老), 호는 눌재(訥齋), 집의(執義)를 역임.

박세대(朴世大) 자는 윤백(允伯), 첨정(僉正) 역임.

박영(朴 榮) 첨정 역임.

박민수(朴敏樹) 자는 덕재(德載), 호는 무계(舞溪). 명종 때 효행이 지극하여 공조참의(工曹 參議)에 증직되었고, 도강서원(道剛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응상(朴應祥) 자는 중수(仲綏), 호는 낙옹(樂翁). 민수(敏樹)의 둘째 아들. 현감을 역임.

박종남(朴從男) 자는 선술(善述), 호는 유촌(柳村). 선전관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 忘憂堂)와 함께 화왕성(花王城)을 지키는데 공을 세워 병조정랑(兵曹正郞), 평안도 절제순무사(平安道 節制巡撫使)가 되었고, 도강서원(道岡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종석(朴宗碩) 자는 대백(大白), 호는 만취당(晩濢堂). 효행이 지극하여 벼슬에 천거되었다.

박민록(朴敏祿) 자는 국서(國瑞),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순절하였다.

박을상(朴乙祥) 첨정을 지냈다.

박운적(朴雲迪) 첨정을 지냈다.

박덕망(朴德望) 부사를 지냈다.

박사공(朴士恭)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박홍미(朴弘美) 1571년(선조 4)~1642년(인조 20). 현룡(顯龍)의 아들. 초명은 경립(敬立), 자는 직재(直哉), 군언(君彦). 호는 관포(灌葡). 참봉(參奉)을 지냈다.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19년(광해군 11)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626년(인조 4) 창원부사(昌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지방관 중에서 치적(治績)이 제일이라 하여 승진되고, 1634년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올랐고 1635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박춘립(朴春立) 자는 화보(花甫). 총관(摠管)을 지냈다.

박건(朴 健)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박한정(朴漢貞) 자는 집중(執中).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박창해(朴昌垓) 자는 창보(昌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였다.

박시영(朴始榮) 자는 화경(華卿).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냈다.

박종경(朴宗敬) 자는 여흠(汝欽). 첨정(僉正)을 지냈다.

박여춘(朴汝春) 자는 수경(壽卿). 도사(都事)를 지냈다.

박천건(朴天健) 자는 군강(君剛).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홍정(朴弘鼎) 자는 자중(子重). 도사(都事)를 지냈다.

박흔(朴 俒) 자는 구이(久而), 호는 겸재(謙齋).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을 지냈다.

박홍중(朴弘中) 1582년(선조 15)~1646년(인조 24). 호겸(好謙)의 증손. 자는 자건(子建), 호는 추산(秋山). 1600년(선조 33) 진사시에 합격, 1608년(선조 41) 음보로 세마(洗馬)를 거쳐 장령(掌令), 절제사(節制使)가 되었다.

박성검(朴性儉) 평해군수(平海郡守)와 창원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가 되었다.

박천교(朴天僑) 자는 익성(益聖).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박일남(朴逸男) 자는 안지(安之).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박정엽(朴廷燁)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수변(朴守釆) 자는 매보(梅甫).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박천우(朴天祐) 자는 서응(瑞應), 호는 수창(睡窓). 1750년(영조 26) 진사과에 합격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주위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박태환(朴台煥) 육군 참령으로 구괘장훈오등(九褂章勳五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