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사천박씨시조(泗川朴氏),박자문(朴自文),사천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10 12:01 수정일 : 2018-04-15 16:1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의 둘째 아들 남환(男桓:사수 군주)의 후손 인겸(仁謙)이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사주군(泗州君)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사천(泗川)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인겸의 손자 자문(自文)이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사천군(泗川君)에 봉해졌으며, 우왕(禑王) 때 어지러운 정국을 피하여 함경남도 안변(咸鏡南道安邊)으로 둔거(遁居)하였다가 영흥(永興)에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박자문(朴自文)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사천(泗川)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 때에는 사주(泗州)로 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자문의 아들 양준(良俊)이 향직(鄕職)인 창정(倉正)을 역임했고, 손자 수도(守道)는 총경장군(摠京將軍)으로 무명(武名)을 떨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낸 대재(大材:양준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정용낭장(精勇郎將) 인경(仁景:자문의 10세손)의 아들 용계(龍桂)가 1469년(예종즉위)에 출생하여 장사랑(將仕郞)으로 의릉 참봉(義陵參奉)을 지내고 영흥 좌수(永興座首)를 자청하여 선원전(璿源殿) 축성 때 도감(都監)으로 공(功)을 세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으며, 함주군 상조양면 상한리(咸州郡上朝陽面上閒里)로 옮겨 살게 되어 후손들이 입함흥중조(入咸興中祖)로 받들어왔다.

그 외 판결사(判決事) 창문(昌文)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던 두문(斗文)․원해(元楷)가 유명했고, 창조(昌朝)는 찰방(察訪)을 역임하여 주부(主簿)를 지낸 영주(永冑)와 더불어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천박씨(泗川朴氏)는 남한(南韓)에 5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사천박씨조상인물

박양준(朴良俊) 조선(朝鮮) 때 창정(倉正)을 지냈다.

박수도(朴守道) 조선 때 장군(將軍)을 역임하였다.

박부(朴 富) 조선 때 사정(司正)을 지냈다.

박공비(朴公庇)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를 역임하였다.

박대재(朴大材) 조선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박희정(朴希正) 조선(朝鮮) 때 별장(別將)을 지냈다.

박운(朴 芸) 조선조(朝鮮朝)에 낭장(郎將)을 역임하였다.

박인경(朴仁景) 조선 때 낭장(郎將)을 역임하였다.

박용계(朴龍桂)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박윤손(朴允孫) 조선 때 봉직랑(奉直郞)을 역임하였다.

박승진(朴承軫) 조선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박승예(朴承輗) 조선 때 도위장(都尉將)을 지냈다.

박이경(朴以敬) 조선조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라 순릉 참봉(純陵參奉)을 역임하였다.

박이정(朴以貞) 조선(朝鮮)에서 통사랑(通仕郞)에 올라 의릉 참봉(懿陵參奉)을 지냈다.

박거인(朴居仁) 조선 때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박선문(朴善文) 자(字)는 문숙(文淑). 조선조에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냈다.

박창문(朴昌文) 조선 때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다.

박두문(朴斗文) 자(字)는 성보(星甫). 조선에서 효자(孝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박세검(朴世儉) 조선 때 사과(司果)를 지냈다.

박원해(朴元楷) 조선(朝鮮) 때 효자(孝子)로 널리 알려졌다.

박진주(朴震冑) 조선 때 향임(鄕任)을 지냈다.

박팽령(朴彭齡) 자(字)는 유경(有敬).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박창조(朴昌朝) 자는 군명(君明), 호는 오은. 조선 때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