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고성박씨시조(固城朴氏),박서(朴犀),고성박시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9 14:04 수정일 : 2018-03-11 23:0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고성박씨(固城朴氏)는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네째 아들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11세손인 박서(朴 犀)를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서(犀)는 1231년(고려 고종 18) 8월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을 때 몽고(蒙古) 장수 살리타이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김중온(金仲溫 : 삭주분도장군)․김경손(金慶孫 : 정주분도장군)등과 함께 귀주의 성(城)을 사수(死守)하여 1개월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이를 물리쳤다.

귀주에서 물러난 몽고군이 개성(開城)을 먼저 함락하고 고종(高宗)의 항복을 받은 후 군세를 가다듬어 귀로에 다시 귀주를 공격하자 이를 대파하여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때 왕명(王命)으로 지병마사(知兵馬使) 최임수(崔林壽)와 감찰어사(監察御使) 민희(閔曦)등이 와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끝내 거부하다가 왕명을 어기지 못해 항복하지 않고 성문(城門)만 열어주자 일찍 항복하지 않고 어명(御命)을 거역했다고 하여 조정(朝廷)에 입조(入朝)하지 못하고 죽주(竹州)로 귀향하였다.

그후 서의 현손 혁충(奕忠)이 고려조에서 이조 전서(吏曹典書)와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내고, 서의 행장(行裝)과 사적(事蹟)을 갖추어 조정에 제출하여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자 서가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고 철성백(鐵城伯)에 추봉되었으며, 혁충에게도 철성(鐵城)을 세습(世襲)하게 하여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게 되자 후손들이 서(犀)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서의 아들로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지태자첨사(知太子詹事)를 지낸 실(實)로부터 고성박씨(固城朴氏)가 분적(分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39년(헌종 5) 조정(朝廷)에 정문(呈文)하여 윤허(允許)가 되어 다시 죽산 박씨로 복구관(復舊貫)되었다고 하며, 원본(原本)이 경남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慶南南海郡二東面茂林里) 박태민(朴太玟)씨 종가(宗家)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고성(固城)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납부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6가야(六伽倻)중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인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 때 철성부(鐵城府)로 개칭하였으며, 조선(朝鮮) 때 고성현(固城縣)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고성군(固城郡)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혁충(奕忠)의 맏아들 보로(寶老 : 초명은 흡)가 고려 우왕(禑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서해도 부원수(西海道副元帥) 겸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수차에 걸쳐 왜구(倭寇)를 토벌했으며, 1378년(우왕 4)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안주 상원수(安州上元帥) 겸 서북면 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에 이르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보로의 아들 형제중 장남 희고(希古)는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館)을 거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및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그의 아우 전고(專古)는 조선조에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어 아들 취신(就新)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세조(世祖) 때 원종공신(原綜功臣)에 올랐던 취신(就新)은 안성(安城)과 합천 군사(陜川郡事)를 역임했고, 그의 맏아들 희성(喜成)이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둘째 희명(喜明)은 사직(司直)을, 막내 희굉(喜宏)은 영동 현감(永同縣監)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으며, 세조(世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미(彌)는 홍원현감(洪原縣監)과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지냈다.

희성(喜成)의 아들로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지낸 준(儁)과 참봉(參奉) 임(任), 금오랑(金吾郞) 효(涍)의 3형제가 크게 현달했으며, 희명의 아들 영형(永亨)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거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세조(世祖) 때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낸 식(植)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 외 금생(今生)의 아들 애상(愛祥)이 어득강(魚得江)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고성 현령 조응도(趙凝道)와 함께 여러 차례 왜적을 격파하여 용양위 부호군(龍讓衛副護軍)에 올랐으며, 통영(統營)의 귤도(橘島) 전투에서 용전하다가 조응도와 함게 장렬하게 전사하여 현종(顯宗) 때 현감을 역임한 내경(來慶)과 더불어 고성박씨의 전통(傳統)을 살렸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성박씨(固城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5,1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고성박씨조상인물

박빈(朴 彬) 고려조에 중산대부(中散大夫)로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역임하였다.

박보로(朴寶老) 시호(諡號)는 경렬(敬烈). 1375년(우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서해도 부원수(西海道副元帥) 겸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었으며, 여러 차례 왜구(倭寇)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 겸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승진, 그후 서해도 조전원수(西海道助戰元帥), 이어 1378년(우왕 4)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올라 안주 상원수(安州上元帥) 겸 서북면 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에 이르렀다.

박희고(朴希古) 초명(初名)은 효관(孝寬)․고려에서 호조 참의(戶曹參議)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거쳐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다.

박전고(朴專古) 초명(初名)은 세필(世弼)․고려조(高麗朝)에 봉순대부(奉順大夫)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역임, 이조 참의(吏曹參議)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으로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취신(朴就新) 초명(初名)은 경(警) 자(字)는 일경(日警)․조선 세조(世祖) 때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합천 군사(陜川郡事)를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總府副摠官)에 추증(追贈)되었다.

박희성(朴喜成)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순창 군수(淳昌郡守)에 추증(追贈)되었다.

박희명(朴喜明) 자(字)는 광용(光用).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박희굉(朴喜宏) 자(字)는 대용(大用). 조선조에 영동 현감(永同縣監)․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에 추록(追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追贈), 고성군(固城君)에 봉(封)하여졌다.

박미(朴 瀰) 1460년(세조 5) 무과(武科)에 급제, 선교랑(宣敎郞)으로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지내고 통덕랑(通德郞)에 올라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박준(朴 儁) 조선조(朝鮮朝)에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지냈다.

박임(朴 任)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박효(朴 涍) 조선에서 금오랑(金吾郞)을 역임하였다.

박영형(朴永亨) 자(字)는 달보(達甫). 조선조(朝鮮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거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박식(朴 埴) 자(字)는 중재(仲載), 호(號)는 육일헌(六一軒),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1455년(세조 1) 무과(武科)에 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이르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

박돈(朴 墩) 자(字)는 중길(仲吉), 호(號)는 휴헌(休軒). 조선조(朝鮮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영동 현감(永同縣監)을 역임하였다.

박미수(朴眉壽) 조선조(朝鮮朝)에 영월 부사(寧越府使)를 지냈다.

박세규(朴世規) 조선 때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박건수(朴乾壽)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박숙구(朴淑龜)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박유(朴 瑜) 초명(初名)은 몽수(夢壽), 자(字)는 이혁(而赫). 조선조(朝鮮朝)에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역임하였다.

박완(朴 琬) 초명(初名)은 견수(堅壽), 자(字)는 이찬(而燦). 조선(朝鮮)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박욱(朴 頊) 초명(初名)은 대근(大根), 자(字)는 이규(而珪). 조선조(朝鮮朝)에 양천 현령(陽川縣令)을 지냈다.

박수(朴 琇) 자(字)는 경옥(卿玉). 조선 때 강서 현령(江西縣令)을 지냈다.

박도(朴 壔) 자(字)는 여옥(汝玉). 조선 때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박정수(朴靖壽) 자(字)는 인숙(仁叔), 호(號)는 의수(毅叟).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였다.

박승순(朴承舜)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박욱(朴 郁) 조선(朝鮮)에서 문과(文科)에 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贊官)․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다.

박석(朴 碩)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박옥(朴 沃)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박윤(朴 潤) 조선조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박홍(朴 泓) 조선(朝鮮) 때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을 지냈다.

박진(朴 蓁)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박류(朴 蔂)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박한종(朴漢宗) 조선(朝鮮)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박수질(朴守質) 조선조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박인립(朴仁立) 조선 때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역임하였다.

박옥립(朴玉立) 자는 백여(白汝).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박사일(朴士逸) 조선조(朝鮮朝)에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박주준(朴柱準) 조선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박동호(朴東豪)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박동걸(朴東傑)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박제(朴 梯) 조선(朝鮮)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아 현령(縣令) 조응도(趙凝 道)와 함께 6년(六年)동안 왜적(倭賊)을 각 처에서 막아 많은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통영(統營)의 귤도(橘島) 전투에서 조응도(趙凝道)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殉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