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만경노씨시조(萬頃盧氏),노극청(盧克淸),만경노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3 11:30 수정일 : 2018-03-05 12:0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만경노씨(萬頃盧氏)는 평양백(平壤伯) 노 판(盧 坂)의 후손 극청(克淸)이 고려 명종조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만경군(萬頃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평양노씨(平壤盧氏)에서 분적(分籍), 만경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극청(克淸)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만경(萬頃)은 전라북도(全羅北道) 김제군(金提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두내산현(豆乃山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만경현(萬頃縣)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예종(睿宗)이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현(縣)으로 삼았고,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을 폐하고 김제(金堤)에 속하였다.

인조(仁祖) 때 다시 현이 되고, 1895년(고종 32)에 와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속한 만경면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인물

일세조 극청의 아들 상귀(尙貴)가 고려조에서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璘)은 부사(府使)를 역임하여 동정(同正) 근(謹)과 함께 가맥(家脈)을 이어 왔으며, 7세손 혁(革)은 1401년(태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세종(世宗) 때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한편 중봉(重峯) 조 헌(趙 憲)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한 응환(應晥 : 세득의 아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따라 의병(義兵)이 되어 아우 응탁(應晫)․응호(應晧)와 함께 여러 전투에서 왜군(倭軍)을 격퇴시키고 금산(錦山) 전투에서 용전(勇戰)하다가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절하여 향리(鄕里)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그의 아들 숙(숙)은 이 괄(李 适)의 난(亂) 때 공주(公州)로 피난간 인조(仁祖)의 시중을 극진히 하여 난이 평정(平定)된 후 왕이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벼슬을 내리고 공신(功臣)에 책록(策錄)하려 하자 이를 극구 사양하므로 인조(仁祖)는 그의 고향을 <조왕동(助王洞)>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의 아우 (瑋)는 별제(別提)를 지냈고, 응호(應晧)의 아들 찬(璨)은 좌랑(佐郞)을 역임하여 현감(縣監) 삼방(三房), 부사(府使) 이점(以漸), 군수(郡守) 이척(以倜)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만경 노씨(萬頃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7,4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만경노씨조상인물

노혁(盧 革) 1401년(태종 1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1419년(세종 1)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노자우(盧自羽) 조선(朝鮮) 때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을 역임하였다.

노죽명(盧竹鳴)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노일동(盧一仝) 조선에서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노세공(盧世恭)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노세득(盧世得) 자(字)는 군실(君實). 조선(朝鮮)에서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노응환(盧應晥) ? ~ 1592 (선조 25)

자(字)는 명원(明遠), 호(號)는 수암(守庵), 봉사(奉事) 세득(世得)의 아들, 조 헌(趙 憲)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 조 헌을 따라 의병(義兵)이 되어 청주(淸州)에서 왜적을 격파, 이어 금산(錦山) 싸움에서 용전하다가 7백 의사(義士)와 함께 전사했 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노응탁(盧應晫) 자(字)는 계회(季晦), 호(號)는 국재(菊齋).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동생 응호(應晧)와 함께 선봉(先鋒)이 되어 청주(淸州) 싸움에서 공(功)을 세웠고,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殉節)하였다. 후율사(後栗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노응호(盧應晧) 자(字)는 시회(時晦), 호(號)는 체헌(棣軒). 조선(朝鮮) 때 부승지(副承旨)를 지냈다.

노 영(盧 瑩) 조선(朝鮮) 때 좌승지(左承 旨)를 지냈다.

노 환(盧 瑍) 조선에서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노 위(盧 瑋) 조선조(朝鮮朝)에 별제(別提)를 지냈다.

노 찬(盧 璨) 조선(朝鮮)에서 좌랑(佐郞)을 지냈다.

노언백(盧彦伯) 자(字)는 미보(美甫).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노언명(盧彦明) 자(字)는 훈보(훈輔). 조선 (朝鮮)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노삼방(盧三邦) 자(字)는 태고(台考), 호(號)는 산천재(山川齋).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노이점(盧以漸) 자(字)는 사홍(士鴻), 호(號)는 추산(秋山).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노이척(盧以倜) 자(字)는 탁이(卓爾).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노 준(盧 準) 자(字)는 성서(聖瑞). 조선(朝鮮) 때 사과(司果)를 역임하였다.

노원급(盧元及) 자(字)는 선작(善灼). 호(號)는 연어정(鳶魚亭).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노기태(盧基泰) 자(字)는 경로(景魯), 호(號)는 금춘(錦春).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노병원(盧炳元) 자(字)는 경홍(景弘), 호(號)는 양우(養愚). 조선조(朝鮮朝)에 주사(主事)를 지냈다.

노이형(盧以亨) 조선에서 어모장군(禦侮將 軍)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