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청풍김씨(淸風金氏),청풍김씨시조,김대유(金大猷),청풍김씨유래,청풍김씨조상

작성일 : 2017-03-29 16:33 수정일 : 2020-04-08 16:01

청풍김씨시조 및 청풍김씨유래

청풍(淸風)은 충청북도 제원군(堤原郡)에 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시대(時代)에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다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청풍(淸風)으로 고쳤다.

조선조(朝鮮朝)에서 명문(名門)으로 일컬어진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後裔)인 대장군(大將軍) 김순웅(金順雄)12세손 김대유(金大猷)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高麗) 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려 때 문하성의 정1품 으뜸 벼슬)을 지내고 청성(淸城 : 청풍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관향(貫鄕)청풍(淸風)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빼어난 명현(名賢)과 충신(忠臣)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지위를 지켰다.

특히 청풍 김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 상신(相臣 :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별칭) 8,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 3, 왕비(王妃) 2명이 나왔으며, <3대정승><부자영상(父子領相)>을 베출하여 청송 심씨(靑松沈氏)․달성 서씨(達成徐氏)와 함께 명문(名門)으로 명성을 날렸다.


가문(家門)의 두드러진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7세손 길통(吉通)이 조선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지낸 후 전라(全羅)․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라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월천군(月川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 : 1품 관계)에 이르렀으며, 그의 맏아들 순경(順敬)은 판사(判事)를 지냈고, 넷째 순명(順命)은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하여 적개 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 성종(成宗) 때는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으며, 4(四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한편 숙필(叔弼)의 아들 식()은 현량과(賢良科)에 장원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성(大司成 : 조선 때 유학의 일을 맡아보던 정3품 관직)이 되었으며,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도학소장파(道學少壯派)를 이루어 제도개혁(制度改革)과 이상정치(理想政治)의 구현을 위하여 애쓰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되자 「군신천세의(君臣千歲義)」라는 시()를 남기고 자결하여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다.


()의 손자(孫子) ()은 선조(宣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으며, 현감(縣監) ()의 아들 신국(藎國)1593(선조 26) 전주별시문과(全州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사복시정(司僕寺正)․관서 어사(關西御史) 등을 지낸 후 광해군(光海君) 때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다.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정귀(李廷龜)와 함께 금()나라 사신(使臣)과 화약(和約)을 논정(論定)했고, 공조(工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왕()을 호종(扈從)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끝가지 싸울 것을 극력 주장했다.

이듬해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세자시강원 종1품 문관 벼슬)로 심양(瀋陽)에 다녀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46(인조 24)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광해군(光海君)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시국(蓍國)은 인조(仁祖) 때 우승지(右承旨)․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낸 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라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대사성(大司成) ()의 현손(玄孫) ()은 실학(實學)에 바탕을 둔 경제학(經濟學)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을 비롯하여 정치(政治)․천문․지리․병략(兵略)․복서(卜筮)․율력(律曆) 등 다방면에 정통했다. 효종(孝宗) 때 충청도에서의 <대동법(大同法)> 실시와 <상평통보(常平通寶)> 주조는 그의 탁월한 경제정책의 식견으로 이룩한 업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그후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651(효종 2)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의 두 아들중 좌명(佐明)은 인조(仁祖) 때 대사헌(大司憲)․대사간․대사성․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내고, 현종(顯宗) 초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라 아버지 육()이 생전에 호남지방에 실시케 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애로가 있음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펴기 위해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로 임명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662(현종 3) 공조(工曹) 및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같은 해 병조 판서(兵曹判書) 겸 수어사(守御使)가 되어 병기․군량을 충실히 관리하고 군사훈련을 엄격히 실시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고, 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우명(佑明)은 자기 딸을 세자(世子)의 빈()으로 맞아들인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좌명(佐明)의 아들 석주(錫冑)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낸 후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했다.


그외 병조참의(兵曹參議) 두명(斗明), 우참찬(右參贊) (), 형조판서(刑曹判書) 석연(錫衍)이 유명했고, 관찰사 징()의 아들 구()6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1703(숙종 29) 우의정(右議政)에 이르고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아우 유()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우의정 구()의 아들 희로(希魯)는 영조(英祖) 때 공조(工曹) 및 호조(戶曹)참판(參判)을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그의 아우 재로(在魯)1710(숙종 36)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수찬(修撰) 등을 거쳐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호조 참의(戶曹參議)․부제학(副題學)․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나가 1728(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며, 좌우의정(左右議政)을 거쳐 1740(영조 16) 영의정에 이르고,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치우(致垕), 병조 판서(兵曹判書) 성응(聖應) 등과 함께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재로(在魯)의 아들 치인(致仁)은 정조(正祖)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서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85(정조 9)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국대전을 원전으로 하여 만든 새 법전)」 편찬을 총재했으며, 이듬해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기용되어 조부(祖父) (: 우의정을 역임), 아버지인 재로(在魯 : 영의정을 역임)와 함께 <3대정승(三代政丞)>이자 <부자영상(父子領相)>이 되어 청풍 김씨를 명문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1759(영조 35) 영의정에 오른 상로(尙魯)와 호조 판서(戶曹判書) 취로(取魯), 이조 판서 종정(鍾正)․익휴(翊休), 병조 판서 시묵(時黙), 대사간(大司諫) 상묵(尙黙) 등이 뛰어났고, 종수(鍾秀)는 정조(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공조 판서(工曹判書) 기후(基厚)․희화(熙華), 좌의정(左議政) 약로(若魯), 예조판서 동헌(東獻)․학성(學性)․만식(晩植), 우참찬(右參贊) 경선(景善)․익문(益文),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세호(世鎬), 형조 판서(刑曹判書) 원식(元植) 등과 함께 조선조 후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이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남한(南韓)110,8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청풍김씨조상

김대유(金大猷) 고려때 사문진사(四門進士)문과에 급제 보문각(寶文閣)태학사(太學士)가 되고 중추원사(中樞院使)로서 남경유수(南京留守)에 나가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후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김인우(金仁祐) 고려때 시랑(侍郞)을 역임하였다.

김 현(金 鉉) 고려때 감문위(監門衛)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창조(金昌祚) 고려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

김 충(金 忡) 고려 때 도총제(都摠制)를 지냈다.

김중방(金仲房) 고려 시대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하였다.

김중원(金仲源)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김 관(金 灌) 조선조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김 정(金 瀞) 조선조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김흔지(金俒之) 호조참의(戶曹參議)()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감역(監役),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조, 병조,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고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겸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역임한 후 한성윤(漢城尹)을 지내고 정란좌익원종공신(靖亂佐翼原從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김의지(金儀之) 호조참의(戶曹參議) ()의 아들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되고 호조참의(戶曹參議) 경상도절제사,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보지(金保之) 호조참의 관()의 아들 평안도찰방(平安道察訪), 길주목사(吉州牧使),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를 역임하고 좌익원종공신에 책훈 되었다.

김억지(金億之) 현감(縣監),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역임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좌익원종공신에 책훈 되었다.

김길통(金吉通) 1408 (태종 8) 1473 (성종 4)  자는 숙경(叔經), 호는 월천(月川), 시호는 문평(文平), 효례(孝禮)의 아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황주 목사(黃州牧使)․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그뒤 호조 판서에 이르러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월천군(月川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

김 여(金 礪) 1459(세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김 기(金 耆) 1459(세조 4)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일본사행(日本使行)때 풍랑(風浪)을 만나 돌아가시니 세조께서 특별히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케 하고 자손을 서용(敍用)토록 명하였다.

김 질(金 耋) 1433(세종15) 1493(성종24) 자는 수옹(壽翁) 1459년 진사(進士)에 이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고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르렀으며 안동부사(安東府使)시에 선정(善政)을 펴시었다.

김순경(金順敬) 조선 때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김순명(金順命) 1435 (세종 17) 1487 (성종 18)  자는 거이(居易), 시호는 공양(恭襄), 길통(吉通)의 아들. 1456년(세조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이 되어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으며 예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다.

김순성(金順誠) 조선조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김세걸(金世傑)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김세영(金世英) 1495(연산군 1) 문과(文科)에 급제, 예빈시정(禮賓寺正),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등을 역임하고 청풍군(淸風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김 식(金 湜) 1482 (성종 13) 1520 (중종 15)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 시호는 문의(文毅), 숙필(叔弼)의 아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장원, 부제학(副提學)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조광조 등과 도학 소장파 (道學少壯派)를 이루어 제도개혁과 민중 교화에 힘쓰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선산(善山)에 유배,「군신천세의(君臣千歲義)」라는 시를 짓고 자결했다.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 지고있다.

김우증(金友曾)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이르렀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다.

김수성(金遂性) 자는 유초(有初), 세영(世英)의 아들.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의 석방을 탄원하다 유배되었고 후에 풀려 나와 1525(중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39년 대사성(大司成)에서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1541(중종 36)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고, 예조참의가 되고 1546(명종 1)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었다.

김덕수(金德秀) 1500(연산6)1552(명종7)  자는 경진(景眞) 호는 이진자(頤眞子) 부자(父子)간 학자로 연원(淵源)을 이루고 윤근수(尹根壽), 이언적(李彦迪), 원호(元豪)와 같은 제자를 두고 있으며 조선조예학자계보(朝鮮朝禮學者系譜)에 의하면 윤근수(尹根壽)문하(門下)에는 김상헌(金尙憲), 조익(趙翼), 조형(趙炯), 이정귀(李廷龜) 같은 문하가 있으며 김상헌(金尙憲) 문하(門下)에는 홍명하(洪命夏), 박세채(朴世采)같은 쟁쟁한 계통을 이루고 있다. 효성(孝誠)이 지극하며 형제간 우애(友愛)가 깊고 학문행의(學問行誼)가 독실하였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 정(金 鼎) 1505 연산11) 1568 (선조1) 자는 응지(凝之) 1522년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1524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곡산부사(谷山府使), 전라도사(全羅都事),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등을 역임하였다.

김 계(金 繼) 1528 (중종23) 1565 (명종20) 조선의 학자  자는 성부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행의(行誼)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전하며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추증(追贈)되었다.

김 권(金 權) 1549 (명종 4) 1622 (광해군 14)  자는 이중(而中), 호는 졸탄(拙灘), 시호는 충간(忠簡), 덕무(德懋)의 아들. 성 혼(成 渾)에게 학 문을 배우고,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헌납(獻納).사복시 첨정 (司僕寺僉正) 등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으며, 1615년(광해군 7) 사 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조 때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김 용(金 鎔) 1546(명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사의(司議)를 지냈다.

김 엄(金 淹)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병마첨절제사겸(兵馬僉節制使兼)도호부사( 都護府使), 강진수군첨제사(江鎭水軍僉制使), 황해도수륙군방어사를 역임하고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이르렀다.

김 락(金 洛) 1545 (인종1) 1604(선조37)  자는 중심(仲深) 호는 칠봉(七峯)이다. 1567년 진사(進士)에 급제 도사(都事), 주부(注簿), 사평(司評)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산청현감(山淸縣監) 담양(潭陽), 연안(延安), 강화부사(江華府使)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면서 선정(善政)을 펴시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김충백(金忠伯) 1554 (명종9) 1613 (광해5)  자는 군서(君恕) 집의(執義) 계(繼)의 아들 학문이 독실하였고 효행(孝行)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 되었다.

김효백(金孝伯) 1557 (명종12) 1619 (광해11)  자는 행원(行源) 집의(執義) 계(繼)의 아들 염계(炎刂 溪)선생의 문인, 평생 소학(小學)을 근본(根本)으로 삼았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 되었다.

김 무(金 瞀) 1555(명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注簿)를 지냈다.

김인백(金仁伯) 1561 (명종16) 1617(광해9) 자는 군수(君壽) 학문행의(學問行誼)가 독실하였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증손 대에서 부터 사대육상(四大六相)이 배출되었다.

김문표(金文豹) 1576(선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다.

김신국(金藎國) 1572 (선조 5) 1657 (효종 8)  자는 경진(景進), 호는 후추(後瘳), 급(汲)의 아들. 임진왜란 때 영남에서 의병 1천여 명을 모집,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참봉(參奉)이 되었다. 1593년(선조 2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 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했으며,「경 현록(景賢錄)」을 편찬했다. 광해군 때 사간(司諫)을 거쳐 익사공신(翼社功臣)이 되어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으며, 공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南漢 山城)에 들어갔다. 이듬해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 (貳師)로 심양(瀋陽)에 배종(陪從), 1646년(인조 24) 영중추부사(領中樞院府事)가 되었다.

김시국(金蓍國) 1577 (선조 10) 1655 (효종 6)  자는 경징(景徵), 호는 동촌(東村).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8년 병조 좌랑(兵曹佐郞), 1620년 직강(直講) 등을 역임하고, 1630년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했으며, 1632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40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김 인(金 寅) 1586 (선조19) 1654(효종5) 자는 여()() 1635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교수(敎授) 찰방(察訪) 현감(縣監)등을 역임했고 판결사(判決事)에 추증 되었다.

김사일(金事一) 1559 (명종14) 1652(효종3)  자는 맹성(孟城) 1581년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여 제용감(濟用監)의 직장(直長)에 이르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상주(尙州)의 함창(咸昌)에 내려와 당쟁(黨爭)의 화(禍)를 개탄하고 불취(不就) 시서(詩書)를 벗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가 내렸다.

김 육(金 堉) 1580 (선조 13) 1658 (효종 9)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 흥우(興宇)의 아들. 1624년(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643년(인조 21)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 가자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 귀국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 1649년(인조 27)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이어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영중추부사(領中樞院府事)로 전직되어 진향사(進香使)로 또 청나라에 다녀왔다.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을 맡아보았고, 1654년(효종 5)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경제정책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어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서양의 새로운 역법(曆法)「신력효식(新曆曉式)」을 보고 1653년부터 시헌력(時憲曆)이라는 새역법을 시행케 하였으며, 수레를 제작하고, 관개(灌漑)에 수차(水車)의 사용을 주청하였다. 한편 1651년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를 건의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소실된 활자를 새로이 제작, 많은 서적을 간행하게 했다. 그의 경제학은 실학(實學)의 원조(元祖)인 류형원(柳馨遠)에게 큰 영향을 끼쳐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김정화(金鼎華) 1599 (선조32) 1654 (효종5) 자는 국경(國卿) 호는 감호(甘湖) 1636년에 진사(進士)가되고 여러 관직(官職)이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김흥지(金興址) 1600 (선조33) 1679 (숙종5) 1635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1644년에 지례현감(知禮縣監)을 거쳐 문경, 양구, 문의등 삼읍(三邑)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한조(金翰朝) 1600 (선조33) 1680 (숙종6)  자는 헌국(憲國)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4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김 탁(金 鐸) 1603(선조 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지냈다.

김시번(金始蕃) 1610 (광해2) 1652(효종3)  자는 중거(仲擧) 호는 면호(眠湖)이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국(藎國)의 아들이다. 1632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壯元)하고 교리(校理)등을 거쳐 사간(司諫)에 오르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김극형(金克亨) 1605 (선조38)1663 (현종 4) 자는 태숙(泰叔), 호는 사천(沙川)․운촌(雲村), 인백(仁伯)의 아들. 20세에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이 되었고,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창릉 참봉(昌陵參奉)․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화순현감(和順縣監) 등을 역임했다.

김중명(金重明) 1614 (광해군 6) 1685 (숙종 1)  자는 이회(而晦), 전(㙉)의 아들. 1645년(인조 23) 무과(武科)에 급제, 1671년(顯宗 12)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김좌명(金佐明) 1616 (광해군 8) 1671(현종 12)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귀천(歸川), 시호는 충숙(忠肅), 영의정 육(堉)의 아들. 1644년 (인조 2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대사성(大司成)․도승지(都承旨) 등을 거쳐 1662년(현종 3) 공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했으며, 같은 해 병조 판서 겸 수어사(守禦使)가 되었다. 영의정.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증(追贈) 되었다.

김우명(金佑明) 1619 (광해군 11) 1675 (숙종 1)  자는 이정(以定), 시호는 충익(忠翼), 영의정 육(堉)의 아들. 현종의 장인. 1642년(인조 20) 진사 (進士)가 되고, 자기 딸을 세자(世子) 때 빈(嬪)으로 맞아들인 현종이 즉위하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김 징(金 澄) 1623 (인조 1) 1676 (숙종 2)  자는 원회(元會), 호는 감지당(坎止堂), 극형(克亨)의 아들. 이 식(李 植)․송준길(宋浚吉)의 문인. 1652년(효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 등을 역임하고, 사간(司諫)․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670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김석주(金錫冑) 1634 (인조 12) 1684 (숙종 10)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 영의정 육(堉)의 손자, 좌명(佐明)의 아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壯元), 전적(典籍) 등을 지냈다. 1674년(현종 15)에 수어사(守禦使)․도승지(都承旨), 병조판서(兵曹判書), 양관(兩館 : 홍문관,예문관)대제학(大提學)이 되었으며, 훈련대장(訓練大將)과 판의금을 겸 하고 이후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호위대장을 겸하였다. 1680년 허견(許 堅)의 모역(謀逆)사건을 사전에 발각 고변(告變)케 하여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封) 하여졌다.

김 굉(金 宏) 1635(인조 13)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 잠(金 土岑) 1641 (인조19) 1732 (영조8) 자는 이준(而俊) 호는 수와(睡窩)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적성현감(積城縣監) 사직서령(社稷署令)을 거쳐 연천현감(漣川縣監) 함경도(咸鏡道) 문천목사(文川牧使)를 역임하였다.

김석익(金錫翼) 1645 (인조23) 1686 (숙종12)  자는 여량(汝兩)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김우명(金佑明)의 아들 처음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벼슬에 오르고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김광국(金光國) 1666(현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注簿)를 지냈다.

김정립(金廷立) 1585(선조 18) 진사(進士)가 되고,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가 되었다. 판서(判書)로 추증(追贈)되고 청풍군(淸風君)에 봉()해졌다.

김득성(金得聲) 1628(인조 6) 류효립(柳孝立)의 모반을 적발하여 영사공신(寧社功臣)으로 책록(策錄)되었으며, 청풍군(淸風君)에 봉() 해지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진성(金振聲)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김두명(金斗明) 1644 (인조 22) 1706 (숙종 32)  자는 자앙(子昻), 호는 만향(晩香), 준(峻)의 아들. 윤증(尹拯)의 문인. 1671년(顯宗 12) 정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684년(숙종 10) 헌납(獻納)을 거쳐 사간(司諫)을 지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승지(承旨)가 되고, 이어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 다.

김 간(金 榦) 1646 (인조 24) 1732 (영조 8)  자는 직경(直卿), 호는 후재(厚齋), 시호는 문경(文敬), 도(濤)의 아들, 수(洙)에게 입양. 각 문집에 흩어져 있는 선인(先人)들의 예설(禮說)만을 뽑아「동유예설(東儒禮說)」을 편찬, 간행했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18년(숙종 44) 집의(執義)에 임명되고, 찬선(贊善)․대 사헌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김석연(金錫衍) 1648 (인조 26) 1723 (경종 3)  자는 여백(汝伯), 시호는 정희(貞僖),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동생, 우명(佑明)의 아들. 음보(蔭補)로 1680년(숙종 6)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내고, 형조참의, 1700년에 강화유수 1708년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자헌대부에 승품(陞品), 한성판윤(漢城判尹), 형조(刑曹),공조판서(工曹判書),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도총관(都摠管)등을 역임했다. 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김 구(金 構) 1649 (인조 27) 1704 (숙종 30)  자는 자긍(子肯), 호는 관복재(觀復齋), 시호는 충헌(忠憲), 징(澄)의 아들. 1682년(숙종 8)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에 재직하면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하기에 힘썼다. 평안도 등지의 관찰사를 지내고, 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복위를 주장하여 단종의 위(位)를 추복(追復)케 했다. 1700년 6조(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1703년(숙종 29) 우의정에 이르렀다.

김남두(金南斗)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역임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어 청계군(淸溪君)에 봉해졌다.

김남기(金南器) 조선 시대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다.

김문하(金文夏) 1683(숙종 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응교(應敎)․삼사정(三司正)을 지냈다.

김 유(金 楺) 1653(숙종 9) 1719 (숙종 45)  자는 사직(司直), 호는 검재(儉齋), 시호는 문경(文敬), 징(澄)의 아들. 박세채(朴世采)․송시열(宋時 烈)의 문인. 정랑(正郞)으로 1699년(숙종 2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찬수낭관(纂修郎官)으로「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증보(增補)했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이르렀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석문(金錫文)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역학도해(易學圖解)」를 저술했고, 여러 관직을 거쳐 1726(영조 2) 통천 군수를 역임했다.

김 고(金 橰) 1670 (현종11) 1727(영조3) 자는 봉년(逢年) 171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 예조(禮曹), 병조좌랑(兵曹佐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등 삼사(三司)를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김성후(金聖垕) 1683 (숙종9) 1755(영조31) 자는 영서(永瑞)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의 문인. 172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 전랑(銓郞) 수찬(修撰) 응교(應敎)등을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김세형(金世衡) 1686(숙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원호(金園皓) 1687(숙종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김 재(金 栽) 조선 1695(숙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김취로(金取魯) 1682 (숙종 8) 1740 (영조 16)  자는 취사(取斯), 시호는 충헌(忠獻), 유(木柔)의 아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 경종 초에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지내다가,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1731년(영조 7)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737년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김희로(金希魯) 1673 (현종 14) 1753 (영조 29)  자는 성득(聖得), 우의정 구(構)의 아들. 1702년(숙종 2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704년 빙고 별검(氷庫別儉) 등을 지내고, 공조.호조의 참판(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재로(金在魯) 1682 (숙종 8) 1759 (영조 35)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허주자(虛舟子), 시호는 충정(忠靖), 우의정 구(構)의 아들. 1710년(숙종 3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수찬(修撰) 등을 역임했다. 1718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으며, 대사간․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목사(忠州牧使)로 호서 안무사(安撫使)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웠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직하여「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740(영조 6)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1746년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의 복관을 건의하여 신원케 했다.

김치만(金致萬) 1697 (숙종 23) 1753 (영조29)  자는 회일(會一), 호는 고은당(高隱堂), 희로(希魯)의 아들. 1721년(경종 1)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1723년(경종 3)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거쳐 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을 지냈다.

김치후(金致垕) 1691 (숙종 17) 1742 (영조 18)  자는 사중(士重), 호는 사촌(沙村), 태로(泰魯)의 아들. 1726년(영조 2)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있을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1738년 대사간이 되어 탕평책(蕩平策)의 폐단을 상소하다가 위도(蝟島)로 유배, 2년 후 풀려나와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었고, 뒤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죽었다.

김약로(金若魯) 1694 (숙종 20) 1753 (영조 29)  자는 이민(而民) 호는 만휴당(晩休堂), 시호는 충정(忠正), 유(木柔)의 아들. 1727년 공조․호조의 판서가 되고, 1749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김몽로(金夢魯) 조선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김형로(金亨魯)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김석일(金錫一) 1694(숙종 20)1742(영조 18) 자는 수언(壽彦), 호는 허주와(虛舟窩), 두명(斗明)의 아들. 17 31(영조 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을 역임한 후 1741년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김상로(金尙魯) 1702 (숙종 28) 1766 (영조42)  자는 경일(景一), 호는 하계(霞溪).만하(晩霞), 시호는 익헌(翼獻) 유(木柔)의 아들, 약로(若魯)의 아우. 1734년(영조 28) 우의정, 1754년 좌의정, 1759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도수(金道洙) 1699 (숙종25) 1733(영조9) 호는 춘주(春州). 음보(蔭補)로 공조 정랑(工曹正郞)․통천 군수(通川郡)守)에 이르렀다.

김성응(金聖應) 1699 (숙종 25) 1764 (영조 40)  자는 군서(君瑞), 시호는 효정(孝靖), 석연(錫衍)의 손자, 도영(道泳)의 아들. 초시(初試)를 통과했으며,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후 사복시 내승(司僕寺內乘)으로 기용, 고부 군수(古阜郡守)가 되었다. 173 3년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서 별군직(別軍職)으로 전임, 내시사(內試射)에 합격, 훈련대장(訓鍊大將) 등을 지내고 병조 판서에 올랐으며, 1750년(영조 26)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특진 되었다.

김치인(金致仁) 1716 (숙종 42) 1790 (정조 14)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시호는 헌숙(憲肅), 재로(在魯)의 아들. 1748년(영조 2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여 1765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을 역임하고, 1766년부터 수차 영의정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고부 겸 청승습주청사(告訃兼請承襲奏請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85년「대전통편(大典通編)」편찬을 총재했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정조의 명으로 당쟁(黨爭)의 조정에 힘썼다.

김종후(金鍾厚) 1721 (경종1) 1780 (정조 4)  자는 백고(伯高), 호는 본암(本庵). 진재(眞齋), 시직(侍直) 치만(致萬)의 아들. 민우수(閔遇洙)의 문인. 진사 (進士)가 된뒤 성리학자로 이름났으며,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1778년(정조 2) 장령(掌令)이 되고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자의(咨議)에 이르렀다.

김종정(金鍾正) 시호는 청헌(淸獻). 1757(영조 3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청천군(淸川君)에 봉해진 뒤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정조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김시묵(金時黙) 1722 (경종 2) 1772 (영조 48)  자는 이신(爾愼), 시호는 정익(靖翼),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아버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우명(佑明)의 후손, 성응(聖應)의 아들. 1750년(영조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762년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딸이 세손빈(世孫嬪)이 되자 총융사(摠戎使)로 발탁, 공조와 호조의 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좌참찬(左參贊)을 역임했다. 죽은 뒤 정조가 즉위하고 딸이 왕비로 진봉(進封)되면서 영의정․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치양(金致讓) 1725 (영조1) 1793(정조17) 자는 여득(汝得) 175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 정언(正言)등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영의정(領議政) 김상로(金尙魯)의 아들이다.

김종순(金鍾純) 1750 (영조26) 1802(순조2) 자는 원강(元剛) 177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부정자(副正字)를 역임했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김복휴(金復休) 1757(영조 3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칭한 말)의 벼슬을 지냈다.

김익휴(金翊休) 1761(영조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뒤에 대사간(大司諫)․순흥부사(順興府使)․형, 공조판서(, 工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김상묵(金尙黙) 1726 (영조 2) 1779 (정조3) 자는 백우(伯愚), 성채(聖采)의 아들.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71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서 기민(飢民)을 구제한 공으로 포상되었으며, 1774년(영조 50)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재임할 때 사무를 공정히 처리하여 명성을 얻었고 뒤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김치묵(金峙黙) 1741 (영조17) 1788 (정조12) 자는 정부(靜夫) 1768년에 사서(司書), 1771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고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 보덕(輔德)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치구(金致九) 1766(영조 4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양사(兩司)의 벼슬을 지냈다.

김광묵(金光黙) 1767(영조 4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경상도 관찰사․이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김종수(金鍾秀) 1728 (영조 4) 1799 (정조 23) 자는 정부(定夫), 호는 몽오(夢梧)․진솔(眞率), 시호는 문충(文忠), 희로(希魯)의 손자, 치만(致萬)의 아들. 1768년(영조 44) 군수(郡守)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거쳐 이조판서에 등용되었고, 1785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어 대제학, 1789년 우의정, 1793년 좌의정을 역임한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 때「경연고사(經筵故事)」「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議)」를 지어 바쳤다.

김종선(金鍾善) 1771(영조 4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며, 삼사(三司)의 벼슬을 지냈다.

김기대(金基大) 1767(영조 4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김치공(金致恭) 1767(영조 43) 정시(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김지묵(金持黙) 1724 (경종 4) 1799 (정조 23)  자는 유칙(維則), 시호는 익헌(翼憲), 성응(聖應)의 아들, 부원군(府院君) 시묵(時黙)의 아우. 1750년(영조 26) 생원시(生員試)에 급제, 참봉(參奉)을 거쳐 1771년(영조 4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호조 참의(戶曹參議)․총융사(摠戎使)가 되고, 1793년(정조 17) 형조 판서, 이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했다.

김성준(金聖準) 1735 (영조11) 1801 (순조1) 자는 해여(海如) 177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돈영부(敦寧府)도정(都正)에 이르렀다.

김성화(金聖和) 1737 (영조13) 1825 (순조25) 자는 혜보(惠甫)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거창부사(居昌府使),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종문(金鍾文) 1750 (영조26) 1825 (순조25) 자는 유인(猶人) 180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등을 역임했다.

김치신(金致信) 1771(영조 4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역임했다.

김치현(金致顯) 1771(영조 4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지냈다.

김희채(金熙采) 1744 (영조 20) 1802 (순조2) 자는 혜중(惠仲), 택휴(宅休)의 아들. 승휴(承休)에게 입양(入養). 1780년(정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88년(정조 12) 수찬(修撰)을 거쳐 평택 안핵어사(按覈御史)가 되었으며,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었다.

김희조(金熙朝) 1783(정조 7) 증광전시(增廣殿試)에 갑과(甲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삼사(三司)와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김희화(金熙華) 1765 (영조 41) 1849 (헌종15) 자는 관여(觀汝), 익휴(翊休)의 아들.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825년(순조 25) 예방 승지(禮房承旨)를 거쳐 1843년(헌종 9) 공조 판서에 승진, 1849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김회연(金會淵) 1750 (영조 26) 1817 (순조 17) 자는 문통(文通), 호는 효운루(曉雲樓), 종정(鍾正)의 아들. 1800년(정조 24)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 1801년(순조 1)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종부시 부정(宗簿寺副正) 등을 거쳐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1808년(순조 8) 예조 참의(禮曹參議)․대사간을 지냈다. 그후 1810년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통신사(通信使)가 일본에 갈 때의 경비로 도에 신수곡(信需穀)을 비치하고 백성에 대한 잡부금을 엄금하는 등으로 신망을 얻었다. 이조 참의를 거쳐 1815년 예조 참판(禮曹參判)․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지냈다.

김기후(金基厚) 1747 (영조 23) 1830 (순조 30)  자는 사중(士重), 시호는 효헌(孝憲), 지묵(持黙)의 아들. 이귀상(李龜祥)의 문인. 1774년(영조 5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영릉 참봉(寧陵參奉)이 되고, 1811년 총융사(摠戎使)․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였다.

김세연(金世淵)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명연(金命淵)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했다.

김기풍(金基豐) 조선 시대에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김종후(金從厚) 1724 (경종 4) 1784( 정조 8)  초명은 치묵(致黙), 초자(初字)는 인지(因之). 자는 자용(子容), 호는 동병(東屛), 중로(重魯)의 아들. 1765년(영조 41)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서 학문을 닦았다. 영남(嶺南)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종선(金宗善) 1766 (영조 42) 1810 (순조 10)  자는 성보(城甫), 호는 송재(松齋),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시묵(時黙)의 손자, 기대(基大)의 아들. 어려서 이술원(李述源)에게서 학문을 닦고, 후에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의 문인이 되었다. 정조때 척신(戚臣)으로 기용되어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용묵(金用黙) 1773 (영조49) 1819 (순조19) 자는 현로(玄老) 호는 성은(城隱) 1795년에 진사(進士) 1802년 정시문과(庭試文科) 을과(乙科)로 급제 집의(執義)에 이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김주묵(金周黙) 1777 (정조1) 1847 (헌종13)  자는 몽유(夢臾) 호는 재재실(哉哉室) 1809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삼사(三司)와 사읍(四邑)의 수령(守令)을 역임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김경연(金敬淵) 1778 (정조2) 1820 (순조20) 자는 시현(時顯) 1813년에 진사(進士) 181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이르렀다.

김성연(金盛淵) 1784 (정조8) 1834 (순조34) 자는 현가(顯可) 1813년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도사(都事)로 재직(在職)시인 182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김동건(金東健) 1788 (정조 12) 1848 (헌종14) 자는 자순(子順).군원(君元), 시호는 문간(文簡), 종정(鍾正)의 손자, 명윤(命潤)의 아들. 세연(世淵)에게 입양(入養). 1826년(순조 2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어「삼조보감(三朝寶鑑)」의 편찬에 참여했다. 뒤에 청녕군(淸寧君)에 습봉(襲封)되었다.

김동헌(金東獻) 1791 (정조15) 1869(고종6) 자는 경정(敬正) 시호는 효정(孝貞). 조선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숭록대부(崇錄大夫)로 품계(品階)가 올랐으며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김동선(金東選) 조선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김경선(金景善) 1788 (정조 12) 1853 (철종4) 자는 여행(汝行), 시호는 정문(貞文), 기풍(基豐)의 아들. 1830년(순조 3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39년(헌종 5) 이조 참의(吏曹參議), 1843년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851년(철종 2) 우참찬(右參贊)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김성겸(金聖謙) 1790 (정조14) 1865 (고종2)  자는 사목(士牧) 호는 지족당(知足堂) 181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병조좌랑(兵曹佐郞), 장령(掌令), 응교(應敎),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고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우연(金友淵) 1797 (정조21) 1871 (고종8) 자는 희안(希顔) 호는 연가제(然可齊) 1852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북청부사(北靑府使)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김기서(金基敍) 자는 정택(正宅) 180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역임했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김주교(金周敎) 1802 (순조2) 1860 (철종11) 자는 범수(凡秀) 호는 고산(古山) 참판(參判) 희조(熙朝)의 아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 진성현감(眞城縣監)을 역임했고 효자(孝子)로 정려(旌閭)되었다.

김동규(金東奎) 1803 (순조3) 1884 (고종21) 자는 여관(汝寬) 호는 성아헌(醒哦軒)이다.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부호군(副護軍)에 오르고 문사(文詞)가 널리 알려졌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김익철(金益哲) 1804 (순조4) 1829 (순조29) 자는 명여(明汝)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 진위현령(振威縣令), 문화(文化), 서산(瑞山), 배천군수(白川郡守)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기상(金基常) 1807(순조 7) 관직(官職)에 올라 계방 좌승지(桂房左承旨) 등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김기찬(金基纘) 1809 (순조 9) 자는 공서(公緖), 호는 석거(石居), 주묵(周黙)의 아들. 1835(헌종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집의(執義)를 거쳐 18 52(철종 3) 대사간이 되고,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김익문(金益文) 시호는 문정(文靖). 1838(헌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경주유수(慶州留守)․예조판서(禮曹判書)․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했다.

김학성(金學性) 1807 (순조 7) 1875 (고종12) 자는 경도(景道), 호는 송석(松石), 시호는 효문(孝文), 종정(鍾正)의 증손, 동헌(東獻)의 아들.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44년 이조 참판(吏曹參判), 1848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이어 호조 판서를 지냈다. 1850년(철종 1)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 1863년(철종 14) 이조 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고, 1872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세호(金世鎬) 1806 (순조 6) 1884 (고종 21) 자는 치현(稚賢), 호는 수재(修齋), 진교(晋敎)의 아들. 1843(헌종 9) 식년전시(式年殿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1846(헌종 1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김직연(金直淵) 1811 (순조11) 1884 (고종21) 자는 경우(景禺)이고 호는 품산(品山) 184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三司)를 거쳐 승지(承旨) 병조참의(兵曹參議)등을 지내고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김동원(金東元) 1812 (순조12) 1859 (철종10) 자는 선경(善卿)이며 185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하고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김평묵(金平黙) 1819 (순조 19) 1888 (고종 25)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庵), 시호는 문의(文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영남유생들의 척사위정 운동을 후원했으며 척양척왜 소를 올렸다가 섬에 유배됨. 흥선대원군이 집권자 풀려 나왔다. 1881년(고종 11) 스승의 화서아언(華西雅言)을 편집 간행했다. 제학(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익성(金益成) 1820 (순조20) 1888 (철종25) 자는 순구(舜九) 호는 수옹(守翁)이다. 1855년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공조좌랑(工曹佐郞) 별제(別提)를 거쳐 외직(外職)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내고 능주목사(陵州牧使)에 이르렀다.

김원식(金元植) 1823 (순조 23) 1881 (고종 18)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학해(學海), 시호는 효헌(孝憲), 익정(益鼎)의 아들, 군수(郡守) 익철(益哲)에게 입양(入養).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 판서(刑曹判書) 와 돈령부(敦寧府) 등의 지사(知事)를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시문(詩文)과 가승(家乘) 25권이 있다.

김홍기(金弘祺) 1823 (순조23) 1919  자는 조경(祚卿) 184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했다.

김동식(金東軾) 1824 (순조24) 1884 (고종21)  자는 원중(元仲) 1861년 진사(進士), 186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르렀다.

김성선(金聖善) 1829 (순조29) 1901 (광무5) 자는 성여(盛汝) 통정대부(通政大夫)행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했으며 학문행의(學問行誼)가 독실하였다.

김완식(金完植) 1831 (순조31) 1863 (철종14) 청은군(淸恩君) 김익정(金益鼎)의 아들, 자는 폭경(輻卿)이며 1847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김규영(金奎濚) 1834 (순조34) 1886 (건양) 자는 성우(聖禹) 188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김학선(金鶴善) 1841 (헌종7) 1890 (고종27) 자는 여고(汝臯) 1858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87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김복성(金復性) 1842 (헌종8) 1901 (광무5) 1867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교리(校理) 응교(應敎)등을 역임하고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김중식(金中植) 1842 (헌종8) 1898 (광무2) 자는 치화(致和) 능주목사(陵州牧使) 김익성(金益成)의 아들 188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유행(金裕行) 1845 (헌종11) 1897 (광무1) 자는 경건(景健)이고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원식(金元植)의 아들 1867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에 급제 삼사(三司)의 삼전(三銓)을 역임한 후 좌우승지(左右承旨),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육조(六曹)의 참의(參議)를 두루 거쳤고 문장가(文章家)로서 지제교(知製敎), 춘추관(春秋館)수찬(修撰),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김기룡(金基龍) 1847 (헌종13) 1910(경술년) 자는 경전(景田) 진사(進士) 김행묵(金行黙)의 아들. 186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등을 역임하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김유성(金裕成) 1849 (헌종15) 1914  자는 경소(景韶)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원식(金元植)의 아들로 김관식(金寬植)에 입후(入后) 187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三司)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쳐 승지(承旨)에 오르고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냈다.

김규행(金奎行) 1852 (철종3) 1895 (고종32) 자는 인숙(仁叔) 옥구현감(沃溝縣監) 김봉호(金鳳鎬)의 아들 1892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김규형(金奎馨) 1857 (철종8) 1919 자는 재숙(在叔) 188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교리(校理) 비서승(秘書丞)을 거쳐 숙천군수(肅川郡守)를 역임 하였다.

김우성(金祐性) 1857 (철종8) 1880 (고종17) 자는 경평(景平) 187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8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주서(注書)를 역임하였다.

김인식(金寅植) 자는 경춘(景春) 1880(고종 1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응교(應敎) 공조참의(工曹參議)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김원성(金元性) 1859(철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형․예․이조 참판(刑․禮․吏曹參判)을 지냈다.

김형선(金亨善) 1862 (철종13) 1907(순종1) 자는 태경(泰卿) 188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의 시독관(侍讀官)을 역임하였다.

김진협(金鎭協) 1863 (철종14)1906 (광무10) 자는 범오(範五) 정주목사(定州牧使) 김규승(金奎升)의 아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9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규장각(奎章閣)의 시제(侍制)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역임하였다.

김규홍(金奎弘) 1864(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전라(全羅)․경기(京畿)․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김만식(金晩植) 1834 (순조 34) 1900 (광무 4)  자는 대경(大卿), 초자(初字)는 기경(器卿), 호는 취당(翠堂), 청은군(淸恩君) 익정(益鼎)의 아들. 1867년(고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신부사(修信副使) 겸 전권부관(全權 副官)으로 일본에 다녀와 여러 조(曹)의 판서를 거쳤으며, 청일전쟁 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민생 안정에 힘썼다.

김규식(金奎軾) 1838 (헌종 4) 1895 (고종 32)  자는 우약(雨若), 세호(世鎬)의 아들. 1870년(고종 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89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 광양(光陽)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가 되었으며, 1895년 충주부 관찰사(忠州府觀察使)를 지냈다.

김윤식(金允植) 1835 (헌종 1) 1922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익태(益泰)의 아들. 유신환(兪莘煥)의 문인. 1874년(고종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81년 영선사(領選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신식 군대 800여 명을 양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원세개(袁世凱)의 원군으로 김옥균(金玉均) 일파를 제거, 병조 판서가 되었다. 구한말의 이름높은 석학(碩學)이자 문장가로, 저서「운양집(雲養集)」「천진담초(天津談草)」음청사(陰晴史) 등이 있다.

김유홍(金裕弘) 1868 (고종5) 1920 자는 의일(毅一) 189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김진달(金鎭達) 1870 (고종7) 1906 (광무10)  자는 윤문(倫聞) 충주관찰사(忠州觀察使) 규식(奎軾)의 아들, 1892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거쳐 비서승(秘書丞)에 이르렀다.

김규흥(金奎興) 1872 (고종9) 1936  항일독립운동가, 호는 범제(凡齊) 고종의 밀사로 중국에 가려다 사전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08년 중국으로 망명 은행을 설립하여 독립군자금모금 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으로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갈 때에는 동참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한바있다. 1998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춘삼(金春三) 1876 (고종13) 1944) 항일독립운동가 , 일명 김익수(金益洙) 1907년 조영구 의병진에 참여 의병(義兵)을 규합 제천, 원주, 청풍 등지에서 일군(日軍)을 격파 1908년 충주성(忠州城)을 공략 하다가 체포되어 10여년 옥고(獄苦)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규열(金奎悅) 1887 (고종24) 1958) 항일독립운동가, 자는 원습(元習) 31 독립운동당시 동지 500여명을 규합하여 봉화(烽火)를 올리고 만세를 수창 하다가 적에게 잡혀 숨이 끊어질 지경까지 구타당한 후 농토를 매각하여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하여 주고 끝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 군내(郡內) 유림에서 자금을 거출하여 의열비(義烈碑)를 세워 영원히 길이고 있다.

김규철(金奎喆) 한말의병대장 1907(융희 1) 단양(丹陽)․제천(堤川)․영주(榮州)․예천(醴泉)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군을 수 차례 격파하였으며, 뒤에 패전하여 단양에서 잡혀 호송 중 탈출했다. 1908년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하는 고종(高宗)의 친서가 발각되어 수감되었고, 1922년 군자금 모집사건(軍資金募集事件)으로 다시 체포되어 5년간 복역했다.

김규식(金奎植) 1881 (고종 18) 1950  항일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더우드 집에서 서양식 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1905년 귀국하여 경성청년회 총무․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19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파리 평화회의에 전권대사로 참석하였으며, 1923년 로오노오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4년 임시정부 부수석을 지내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48년 유엔에 의한 남한(南韓)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여 김구(金 九) 등과 함께 북한에 가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정치활동에서 은퇴하였다가 6.25 사변 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순애(金淳愛) 1889 (고종26) 1976 여성독립운동가, 김규식박사의 부인,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신한 청년단 이사로 활동, 국내로 파견되어 백신영. 김마리아. 함태영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고, 중국 흑룡강성에서 한인동포들을 규합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 추진하다가 일경에 발각 체포되어 강금 당하였다가 상해로 탈출, 상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참여를 독려,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전달,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을 돌봐주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후원에 진력, 해외각지에 한국지도와 태극기 등을 만들어 보급,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달하는데 힘썼다. 상해의 대한적십자회 이사로 활동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함으로 간호원을 양성 배출하는데 기여,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해 한인교포의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김유정(金裕貞) 1908 (융희1) 1937 소설가, 1931년 이무영, 이 상, 정지용등과 경향파 문학을 배격하는 순수 문예운동인 구인회를 조직했고, 당대의 농촌현실을 계몽적 이상주의나 감상적인 현실중시의 농민문학이 아닌 당시의 농촌과 서민생활에 깊숙히 파고들어 그 생활 감정과 생활습속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소설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1935년 조선 일보에 <노다지>등 소설이 당선되어 혜성처럼 등단한 그는 29세의 짧은 인생을 마치기까지 불과 2년 남짓한 기간에 3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김유택(金裕澤) 1911 1975 1949년 재무부이재국장, 재무부차관등을 역임하고 한국은행 총재시 전시 경제체제를 확립, 부산 피난시 통화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환도 후에는 전재복구의 당면과제와 현대적 금융 통화 질서의 기초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재정의 독립성을 주창 하고 국제기구가입을 실현하는 한편 한국은행 해외지점을 개설 하였으며 또한 국제부흥개발은행 이사겸 국제통화기금이사, 일본, 영국, 덴마아크, 노르웨이, 주재 특명전권대사, 재무부장관, 부총리 겸 경제 기획원 장관과 67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