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산김씨시조(永山金氏) 김영이(金令貽)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영산(永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작성일 : 2017-03-28 14:43 수정일 : 2020-04-02 15:07

영산김씨시조

신라 제31대 신무왕(神武王)의 넷째 아들 김광익(金益光)의 후예(後裔)로 전하는 영산김씨(永山金氏)의 시조(始祖) 김영이(金令貽)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 (本貫)을 영산(永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영동(永同)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함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길동군(吉同郡)이라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영동(永同)으로 고쳤으며, 서기 995년(고려 성종 14) 계주(稧州)로 승격시켜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 상주(尙州)에 예속시켰다.

1413년(태종 13) 경상도(慶尙道)로부터 충청도(忠淸道)에 이관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영동군(永同郡)이 되고 1914년에 황간(黃澗)을 편입하였다. 시대(時代)는 알수 없으나 옛날에는 한때 영산(永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조선초기(朝鮮初期)에 명성을 날린 영산김씨(永山金氏)는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길원(吉元)의 맏아들 종경(宗敬)이 고려 정종(定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우찬성(右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 : 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괄하던 정2품 최고군직)을 지냈으며, 종경(宗敬)의 손자 수온(守溫)은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의 명신(名臣)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441년(세종 23) 문과(文科)에 오른 수온(守溫)은 중시(重試)를 거쳐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하고,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있으면서 세종(世宗)의 특명으로 집현전(集賢殿)에서「치평요람(治平要覽」과「의방유취(醫方類聚)」편찬에 참여하였으나, 부사직(副司直)에 올라「석가보(釋迦譜)」를 증수(增修)하였다.

그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라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았으며,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고,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에 뛰어나 명(明)나라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나 항상 청빈하게 살았다.

1481년(성종 12) 병이 악화되어 운명이 가까워지자 자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부디「중용(中庸)」과「대학(大學)」을 많이 읽지마라. 내 이제 혼미한 중에서도 눈 앞에 서언한 것은 모두 중용과 대학의 글자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학문에 깊이가 있었다.

담대의 석학(碩學) 구종직(丘從直)은 남의 표문(表文)을 써준 것을 보고 모래 위에 꿇어 앉으면서 “평일에 비록 공(公)의 문장이 교묘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 경지에 이를 줄은 몰랐오.”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수온(守溫)의 형(兄)은 신미(信眉)라는 불명(佛名)으로 탈속하여 웅문거필(雄文巨筆)로 명성을 떨쳤으며, 속리산(俗離山) 성불사(成佛사) 복천암(福泉菴)에 사리(舍利)를 남기고 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학행(學行)으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천거되었던 곤(滾도)과 뛰어난 효행(孝行)으로 감찰(監察)에 증직된 언건(彦建)이 유명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낸 각(覺)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득진(得進), 부호군(副護軍) 염근(廉謹)․호덕(好德) 등과 함께 충효(忠孝)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영산김씨(永山金氏)를 더욱 빛냈다.


영산김씨 인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영산김씨(永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24,9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 영산김씨조상인물

김길원(金吉瑗)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다.

김 포(金 苞) 고려(高麗) 때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김종경(金宗敬) 조선 때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했다.

김용갑(金龍甲) 조선조(朝鮮朝)에 감정(監正)을 지냈다.

김종덕(金宗德) 조선 때 부정(副正)을 역임했다.

김종귀(金宗貴) 조선(朝鮮) 때 부정(副正)을역임했다.

김 순(金 淳) 조선조에 감사(監司)에 이르렀다.

김 훈(金 訓) 조선 때 소윤(少尹)을 지냈다.

김 량(金 諒)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에이르렀다

김연지(金連枝) 조선조에 감사(監司)에 역임했다.

김수경(金守經)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역임했다.

김수온(金守溫) 1409 (태종 9) ~ 1481 (성종 12) 자(字)는 문양(文良), 호는 괴애(乖崖), 시호는 문평(文平). 1441년 (세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때「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으며, 1445년(세종 27)에는「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였다. 그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했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고「명황계감(明皇誡鑑)」을 국역하였으며, 저서로는「식우집(拭疣集)」및「세종․세조․성종실록(世宗․世祖․成宗實錄)」등이 있다.

김수화(金守和)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득정(金得精)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지냈다.

김세창(金世昌)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냈다.

김 개(金 愷) 조선(朝鮮)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다.

김 한(金 漢)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 민(金 旼) 조선조(朝鮮朝)에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김 휘(金 暉)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계성(金繼成) 조선(朝鮮) 때 정랑(正郞)을역임했다.

김 호(金 浩)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 경(金 璟) 조서 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김여손(金驪孫) 조서조(朝鮮朝)에 한림(翰林)을 역임했다.

김인손(金驎孫) 조선 때 한림(翰林)을 역임했다.

김일손(金馹孫)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역임했다.

김 원(金 源) 조선조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공저(金公著)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형보(金刑寶)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대형(金大亨)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에이르렀다.

김종만(金從萬)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순강(金舜江)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역임했다.

김 결(金 潔)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경존(金卿存) 조선(朝鮮) 대 판사(判事)에이르렀다.

김계생(金繼生) 조선조(朝鮮朝)에 부승지(副承旨)를 역임했다.

김 관(金 寬)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사종(金嗣宗) 조선(朝鮮) 때 사복시정(司僕寺情)을 역임했다.

김계훈(金繼勳)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승호(金承豪) 조선 때 중군(中軍)을 지냈다.

김승립(金承立) 조선(朝鮮) 대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김언건(金彦建) 1511 (중종 6) ~ 1571 (선조 4) 자는 정보(精甫), 호는 예정(藝亭). 효(孝)가 극진하였으며, 감찰(監察)에 추증되었다.

김신문(金信文)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김종려(金宗麗)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 師)를 역임했다.

김영우(金盈宇) 조선(朝鮮)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김순년(金舜年)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가립(金可立)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 동(金 錬) 조선조에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김 각(金 覺) 자는 경성(景惺), 호는 석천(石川). 효(孝)가 지극했고, 특히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맹주(盟主)가 되었으며,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김중기(金重器) 조선 때 봉사(奉事)를 역임하였다.

김중거(金重鐻)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김홍록(金弘錄)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득진(金得進) 조선 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事)를 지냈다.

김명록(金命祿)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감성(金鑑成) 조선조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역임했다.

김염근(金廉謹)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호덕(金好德)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 연(金 渷) 조선조에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김지복(金知復) 조선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김종민(金種敏) 조선(朝鮮) 때 감정(監正)을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