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광김씨(靈光金氏), 고려 의종 때, 문하시랑을 거쳐 영성백(靈城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영광(靈光)으로 하였다.

작성일 : 2017-03-28 14:19 수정일 : 2020-04-02 15:09

영광김씨(靈光金氏)의 연원(淵源)과 득관(得貫)

신라(新羅) 제4대(第4代) 석탈해왕(昔脫解王) 때인 서기(西紀) 65년(年), 경주(慶州) 계림(鷄林)에서 찬란(燦爛)히 빛나는 금궤(金櫃)를 열어 기이(奇異)한 남아(男兒)를 얻었다.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고, 자라남에 따라 총명(聰明)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로 하였다. 신라김씨(新羅金氏)는 대보공(大輔公)벼슬에 오른 원조(元祖) 김알지(金閼智)부터 시작(始作)되었다.

영광김씨시조 김석공(金碩公)은 신라김씨(新羅金氏) 원조(元祖) 김알지(金閼智)의 제28세 (第28世)며, 신라(新羅) 제56대(第56代)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제8자(제8子)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의 제8세(第8世)다. 원주김씨(原州金氏) 시조(始祖) 김거공(金巨公)은 중형(仲兄)이다.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영성백(靈城伯)에 봉(封)해져,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영광(靈光)으로 하였다. 영성(靈城)은 영광(靈光)의 고호(古號)다.

초휘(初諱)는 후공(厚公)이었으나, 총명박식 (聰明博識)하고 최고 (最高)의 석학자 (碩學者)였으므로 의종왕(毅宗王)께서 명자(名字)를 석공(碩公)으로 사명(賜名)하여 개명(改名) 히였다. 성품(性品)이 온화(溫和)하며 용모(容貌)가 단정(端正)하고, 덕망(德望)이 높으며 지식(知識)이 남달리 깊었다. ‘애민선정(愛民善政)허여 풍공(豐功)과 위업(偉業)이 세상(世上)에 떨쳤고, 도덕박식(道德博識)하여 문장(文章)과 사범(師範)이 백세(百世)에 으뜸이었고, 성품고결(性品高潔)하여 청명(淸名)과 정절(貞節)이 해와 달과 같이 빛났다’고 칭송(稱頌)하였다.

서기(西紀) 1878년(年) 봉산(鳳山)에서 두 영광김씨(靈光金氏)가 합보(合譜)한 8권(卷) 5책(冊) 1질(帙)을 불암산 (佛岩山)밑 김준(金俊) 댁(宅)에서 찾았다. ‘영광김씨 유이 일즉 김경언지후 일즉 김석공지후’ ‘(靈光金氏 有二 一卽 金景言之後 一卽 金碩公之後‘라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의 제4자(第4子) 김은열(金殷說)의 손자 (孫子)인 김심언(金審言)=초휘(初諱) 김경언(金景言)=의 후(後)와, 경순왕(敬順王)의 제8자(第8子) 김추 (金錘)의 재8세(第8世)인 김석공(金碩公)=초휘(初諱) 김후공(金厚公)=의 후(後)다. 따라서 영광김씨(靈光金氏)는 둘이다.

서기(西紀) 1924년(年) 발행(發行)한 영광김씨황해세보(靈光金氏黃海世譜)에도, 원조(元祖)․시조(始祖)․ 중조(中祖), 그리고 각파(各派)의 파조(派祖)와 세손(世孫)이 똑같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시조(始祖) 김석공(金碩公)의 제7세(第7世) 김현성(金賢聖)의 자(子) 일정(一鼎)에서 구정(九鼎)까지 9형제(兄弟) 증(中), 김사정(金四鼎)과 김칠정(金七鼎)의 후손(後孫)이 기록(記錄)되어 있어, 시조(始祖)를 찾았다.

김사정(金四鼎)은 공민왕(恭愍王) 때인 서기(西紀) 1367년(年) 정미(丁未)에 출생(出生)하고, 묘(墓)는풍천 (豊川)에 합부 (合祔)하였다. 제11세(第11世) 김용(金鎔)의 자(子) 김백온(金伯溫), 김차량(金次良), 김차공(金次恭), 김차검(金次儉), 김양(金讓) 5형제(兄弟)는 이조(李朝) 세종대왕(世宗大王) 33년(年) 경오(庚午)에 풍천(豊川) 천곡방 (泉谷坊) 오룡촌(五龍村)에 우거(寓居)하였다. 제1자(第1子) 김백온(金伯溫)은 절충장군 (折衝將軍)과 도호부사 (都護府使)를 지내고, 재직(在職) 중(中)엔 침입(侵入)하는 호적(胡賊) 및 왜구(倭寇)를 평정(平定)하여 변방방위 (邊方防衛)를 철저(徹底)히 하고, 민생안정(民生安定)을 위(爲)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성품(性品)이 엄정 (嚴正)하며 학식(學識)이 탁월(卓越)하고, 문무겸전(文武兼全)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爲)해 공정신속 (公正迅速)한 공사처리(公事處理)로 원근각처(遠近各處)에서 존경(尊敬)과 추앙(推仰)을 받았다.

관직(官職)에서 은퇴(隱退)한 후(後)엔 풍천(豊川) 오룡촌(五龍村)에서 후세교육(後世敎育)에 심혈(心血)을 기울이며 일생(一生)을 바쳤다.

배(配)는 진주(晉州) 류씨(柳氏) 판서(判書) 용생(龍生)의 여(女)다. 묘(墓)는 풍천 (豊川) 혀사진(許沙鎭) 외청룡(外靑龍)에 있다.

김양(金讓)의 제6세(第6世) 김거등(金巨登)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보사정(禮寶寺正)이고, 베(配)는 숙인(淑人) 양성(陽城) 이씨(李氏)고, 묘(墓)는 옹진군(甕津郡) 교정면(交井面) 월암리(月岩里)에 있다.

이조(李朝) 선조대왕(宣祖大王) 때, 일본(日本) 임진병화(壬辰兵禍)로 풍천(豊川) 사인암(舍人岩)으로 이사(移徙)하여 교정면(交井面) 월락촌(月洛村)에서 살다가, 다시 이사(移徙)하여 옹진군(甕津郡) 서면(西面) 소강(蘇江)에 정착(定着)하였다.

김백온(金伯溫) 후(後)는 풍천파(豊川派)․일도파(一道派)로, 김차량(金次良) 후(後)는 황주파(黃州派)․봉산파(鳳山派)로, 김차공(金次恭) 후(後)는 은율파 (殷栗派)․재령파(載寧派)로, 김차검(金次儉) 후(後)는 해주파 (海州派)․신천파(信川派)로, 감양(金讓) 후(後)는 옹진파(甕津派)로 분파(分派)하였디.

감칠정(金七鼎)의 제10세(第10世) 김완(金琓)은 배몰파(派)의 파조(派祖)다. 파조(派祖) 김완(金琓)은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버리고, 만년(晩年)에 북면(北面) 배몰에 정착(定着)하여 자자손손(子子孫孫)의 삶의 터를 만들었다.

인자(仁慈)한 용모(容貌)와 강직(剛直)한 성품(性品)과 언행(言行)의 단정(端正)으로, 모두로부터 존경(尊敬)과 흠모(欽慕)를 받았다. 자연(自然)에 묻혀 농사(農事)를 짓고 가촉(家畜)을 기르며, 향리(鄕里)에서 한학(漢學)을 가르치고 유생(儒生)을 길러냈다. 배(配)는 남양(南陽) 홍씨(洪氏)며, 묘(墓)는 구이정산(舊梨井山)에 합부(合祔)히였다.

배몰로 부르게 된 것은 그 곳에 열 길 높이의 배나무 한 구루가 있는데, 봄이면 흰 꽃이 송이송이 피어나고 가을이면 누런 배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 아래 큰 우물이 있는데,맑고․푸르고․시원한

물이 항상(恒常) 철철 넘쳐 흘렀다. 이 배와 우물로 지명(地名)이 이정(梨井)→배우물→배몰로 되고, 파명(派名)도 배몰파(派)로 되었다. 이 배와 물은 만병(萬病)에 특효(特效)하다고 최근(最近)까지 널리 알려졌다.

서기(西紀) 1924년(年) 옹진파(甕津派)가 발행(發行)한 영광감씨황해세보(靈光金氏黃海世譜)에, 베몰에 정착 (定着)한 김완(金琓)의 부(父) 김여온(金礪溫)까지 기록(記錄)되고, 그 난(欄)에 ‘이하는 불가고 가탄’ ‘ (以下 不可考 可歎)’이라고 기록(記錄)되어 있으니, 그때까지는 서로서로 교류(交流)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영광김씨(靈光金氏)는 나조(羅朝) 때는 금관옥좌(金冠玉座)를 누리며 신라천년(新羅千年)의 찬란(燦爛)한 문화(文化)를 꽃 피웠고, 여조(麗朝) 때는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되어 고려(高麗) 오백년(五百年)의 사직(社稷)을 튼튼히 하였고, 선조(鮮朝) 전반(前半)에는 관직(官職)에 있었으나 후반(後半)에는 관서지방(關西地方)에 흩어져 야(野)에 묻혀 자연(自然)과 더불어 살아 온 신라김씨(新羅金氏) 중(中)의 하나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광김씨는 남한(南韓)에 총 37,8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친(宗親)의 사명(使命)과 소원(所願)

옹진파(甕津派)는 1993년(年)에 영광김씨황해세보(靈光金氏黃海世譜)를, 배몰파(派)는 1998년(年)에 영광김씨 배몰파보(靈光金氏배몰派譜)를 발행(發行)하였다.

1979년(年) 발행(發行)한 선산김씨대동보(善山金氏大同譜)와, 1982년(年) 발행(發行)한 원주김씨대동보(原州金氏大同譜)와, 1979년(年) 발행(發行)한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 수정증보판(修正增補版)과, 몇몇 보책(譜冊)에 영광김씨(靈光金氏)는 둘이며, 시조(始祖)는 김심언(金審言)과 김석공(金碩公)이라고 적혀 있다.

이 사실(事實)이 씨족사(氏族史)에 명기(明記)되고, 보학계(譜學界)에 홍보(弘報)되도록 노력(努力)해야겠다. 8․15 광복(光復)과 6․25 동란(動亂)으로 많은 종친(宗親)이 월남(越南)하여 시방(四方)에서 살고 있다. 50여년(餘年)이 지나는 동안 종친(宗親)이 하나, 둘 타계(他界)하는 것이 한(恨)스럽다. 종친회(宗親會)에 제2세 (第2世)․제3세(第3世)를 대동(帶同)하고 적극(積極) 참여(參與)하여, 조상(祖上)을 숭모(崇慕)하며 선조(先祖)의 위업(偉業)을 계승(繼承)하고, 종문(宗門)을 빛내며 종친(宗親) 상호간(相互間)의 화목(和睦)을 도모(圖謀)하고, 자손만대(子孫萬代)의 번영(繁榮)과 명성(名聲)이 영원(永遠)하기를 바라며 종훈(宗訓)《숭조승선(崇祖承先)․ 화친(敦宗和親)․양예육손(養裔育孫)》을 실천(實踐)하기 바란다.

통일환향(統一還鄕)이 속(速)히 성취(成就)되어 이산(離散) 종친(宗親)이 반세기(半世紀) 여(餘)만에 상봉(相逢)하고 선세(先世) 영혼(靈魂)께 숭앙(崇仰) 배례(拜禮)를 하고, 구보(舊譜)를 찾아 성(聖) 시조(始祖)의 자손(子孫)이 총(總) 망라(網羅)되는 종문(宗門)의 보전(寶典)인 영광김씨(靈光金氏) 종사(宗史)가 발간(發刊)되기를 간절(懇切)히 소원(所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