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서흥김씨(瑞興金氏) 고려 중엽에 금오위 중랑장을 지낸 김보(金寶)를 시조로 한다.

작성일 : 2017-03-27 11:08 수정일 : 2018-02-05 12:02

서흥김씨시조 및 서흥김씨유래(본관)

신라 왕실(新羅王室)의 후예(後裔)인 서흥김씨(瑞興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6세손으로 고려(高麗) 중엽에 금오위 중랑장(金吾衛中郞將 : 고려 때 6위의 하나로 왕도내외를 순찰․점검하는 관청의 정 4품 벼슬)을 지낸 김보(金寶)를 시조(始祖)로 한다.

보(寶)의 손자(孫子) 천록(天錄)은 고려 때의 이름난 무장(武將)으로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 : 고려 무신정권 때 조직된 특수군대)가 진도(珍島)에서 난(亂)을 일으키자 김방경(金方慶)의 부장(副將)으로 이를 진압하는 데 공(功)을 세웠으며, 1274년(원종 15)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를 정벌(征伐)할 때도 참전(參戰)하여 대공(大功)을 세워 1280년(충렬왕 6)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상장군(上將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로 서흥군(瑞興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천록(天錄)이 봉군(封君)받은 지명(地名)인 서흥(瑞興)을 관향(貫鄕)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서흥(瑞興)은 황해도(黃海道) 북부(北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한사군(漢四郡)과 고구려(高句麗) 시대에 오곡군(五谷郡) 또는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 하였으며, 신라(新羅) 때에는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쳤다.

그후 고려(高麗) 초에 동주(洞州)라 하였고, 원종(元宗 : 제 24대 왕, 재위기간 : 1260~1275) 때 안태(安胎)로 불리우다가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서흥(瑞興)으로 개칭하였다.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천록(天錄)의 아들 세구(世丘)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손자(孫子) 봉환(鳳還)은 1353년(공민왕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라, 아들 선보(善保 : 봉순대부․판서운관사를 역임)와 함께 고려조(高麗朝)에서 가문을 빛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보(善保)의 아들 3형제중 맏아들 중건(中乾)이 세종(世宗)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둘째 중곤(中坤)은 예조 참의(禮曺參議)를 역임했으며, 막내인 중인(中寅)은 1422년(세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博士)를 역임하여 이름을 날렸다.

판서(判書) 중건(中乾)의 손자(孫子) 효인(孝仁)은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정의 현감(旌義縣監)을 지내고 1489년(성종 20) 좌리이등공신(佐理二等功臣)에 올랐으며, 유(紐)는 세조(世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거두(巨頭) 굉필(宏弼)은 서흥 김씨(瑞興金氏)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이다.

그는 1454년(단종 2) 5월 24일 한양(漢陽) 정릉동(貞陵洞)에서 절충장군 유(紐)의 아들로 출생하여 당대의 석학(碩學)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한 후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했으며,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94년(성종 25) 행의(行誼)로 벼슬에 천거되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와 감찰(監察)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서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목을 쓰고 평안남도(平安南道)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 연산군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 일어난 사화)에 연루되어 순천(順天)에 이배(移配)되어 억울하게 사약을 받았다.

훗날 중종(中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추종되고, 광해군(光海君) 때 전국 유생(儒生)들의 상소에 의하여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나, 그는 높은 식견(識見)과 뛰어난 도학(道學)을 꽃피우기도 전에 억울하게 숨진 불행한 학자(學者)였다.

평소 그는 「육경(六經)」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이장곤(李長坤)․성세창(成世昌) 등 쟁쟁한 학자(學者)들을 배출시켜 근세유학의 거목(巨木)이 되었다.

그의 아들 3형제 모두가 벼슬에 올라 장남 언숙(彦塾)은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지내고 학문(學問)과 효행(孝行)이 뛰어났으며, 둘째 언상(彦庠)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고, 막내 언학(彦學)은 선무랑(宣務郞)을 거쳐 동부 참봉(東部參奉)에 올라 나라에 공헌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중종(中宗) 때 예조 참판(禮曺參判)을 지낸 수열(數列)고 예산현감(禮山縣監) 건(鍵),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익(翌)․수종(壽悰),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宣)이 유명했고, 충수(忠守)는 임진왜란 때 죽산(竹山)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왜군과 싸워 공(功)을 세운 뒤 아들 함(涵)과 함께 순절하여 숙종(肅宗) 때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1740년(영조 16) 장령(掌令)에 추증되었으며, 계조(繼祖)는 효행(孝行)이 뛰어나 호조 참판(戶曺參判)에 추증되었다.

순조(純祖) 때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을 지낸 치곤(致坤)과 헌종(憲宗)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오른 대곤(大坤)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규찬(奎爘), 고종(高宗) 때의 흥해 군수(興海郡守) 희국(熙國),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규화(奎華), 현풍군수(玄風郡守) 화식(華植), 봉화 군수(奉化郡守) 규충(奎衝), 승정원 좌승지(丞政院左承旨) 장권(長權) 등과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흥김씨(瑞興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6,4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서흥김씨조상인물

김덕인(金德仁) 고려 때 정용장군(精勇將軍)을 역임했다.

김천록(金天錄) 1274년(원종 15)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일본을 정벌할 때 전공을 세웠으며, 1280년(충렬와 6)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이르렀고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졌다.

김세구(金世丘)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

김봉환(金鳳還) 1353년(공민왕 2)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 대사성 올랐다.

김선보(金善保) 고려 때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역임했다.

김중건(金中乾) 자는 문원(文元), 호는 인재(仁齋). 1419년(세종 1)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다.

김중곤(金中坤) 1369 (공민왕 18) ~ 1441 (세종 23)

자는 문형(文亨), 호는 의재(義齋). 1395년(태조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내외직(內外職)을 역임하고, 좌사간(左司諫)을 거쳐 1428년(세종 10)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예조 참의(禮曺參議)를 지냈다.

김중인(金中寅) 자는 문리(文利), 호는 예재(禮齋). 1422년(세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지냈다.

김계원(金啓遠) 1420 (세종 2) ~ 1516 (중종 11)

자는 삼원(三原), 호는 대관(大觀). 1480년(성종 11) 호조 참판(戶曺參判)을 역임했으며 예조 정랑(禮曺正郞)에 추증되었다.

김유(金 紐) 자는 자고(子固). 1460년(세조 5)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김총(金 總) 자는 자평(子平). 1464년(세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용양위 부호군(龍嚷衛副護軍)을 지냈다.

김효인(金孝仁) 1436 (세종 18) ~ 1491 (성종 22)

자는 문보(文甫), 호는 양성재(養性齋). 1471년(성종 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473년(성종 4) 정의 현감(旌義縣監)을 지냈고, 1489년(성종 20) 좌리이등원종공신(佐理二等原從功臣)이 되었다.

김굉필(金宏弼) 1454 (단종 2) ~ 1504 (연산군 10)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시호는 문경(文敬), 유(紐)의 아들.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1494년(성종 25) 남부 참봉(南部參奉)이 되고, 이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감찰(監察) 등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회천에 유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사(賜死)되었다.

평소 육경 연구에 전심,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 학자들이 배출 되었고 그림에도 능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追贈).

김석규(金碩珪) 1463 (세조 8) ~ 1525 (중종 20)

호는 대강(大綱). 1484년(성종 15)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용양위 사직(龍驤衛司直)을 역임하였으며, 좌리원종이등공신(佐理二等原從功臣)에 책록(冊錄)되었다.

김언숙(金彦塾) 조선(朝鮮) 때 학행(學行)으로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제수받았다.

김언상(金彦庠) 자는 주경(冑卿). 1522년(중종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거쳐 북안(北安)․군위 군수(軍威郡守)를 역임했다.

김 입(金 立) 자는 입지(立之), 호는 성재(惺齋). 1528년(중종 2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형조 좌랑(刑曹佐郞)․정랑(正郞) 등을 거쳐 의흥․초계 군수(義興․草溪郡守)를 역임했다.

김수열(金壽悅) 자는 여구(汝懼). 1533년(중종 28) 광릉 참봉(光陵參奉)이 되고, 1535년(중종 30) 예조 참판(禮曺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김건(金 鍵) 자는 공계(公啓), 호는 죽오당(竹梧堂). 1534년(중종 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었고, 1542년(중종 37) 예선 현감(禮山縣監)을 지냈다.

김익(金 翌) 1565년(명종 20)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김선(金 宣) 1575년(선조 8)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동부 참봉(東部參奉)이 되고 1580년(선조 13) 진도 군수(珍島郡守)가 되었다.

김수종(金壽悰) 1582년(선조 15)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김염(金 磏) 자는 중시(仲施). 1597년(선조 30) 충의(忠義)로 천거되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가 되고, 뒤에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다.

김자강(金自剛) 자는 상중(商仲). 1600년(선조 33)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607년(선조 40) 어모장군(禦侮將軍)․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김자준(金自俊) 자는 영중(英仲).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이듬해 기장 현감(機長縣監)이 되고, 1607년(선조 40) 영변 부사(寧邊府使)를 역임했다.

김언학(金彦學) 자는 사익(士益). 조선 때 봉사(奉事)를 역임했다.

김응성(金應成) 자는 시중(時仲), 호는 응헌(凝軒). 1600년(선조 33) 임진왜란 때의 공훈으로 천거되어 여러 외관직(外官職)을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오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김대길(金大吉) 1607년(선조 40)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英陵參奉)이 되고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에 올랐다.

김대진(金大振) 자는 이원(而遠), 호는 사우당(四友堂).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지냈다.

김백영(金伯英) 자는 일원(一元), 호는 경암(耕巖). 조선 때 남원부 교수(南原府敎授)를 역임하였다.

김인언(金仁彦) 조선 때 용야위 중렬병장(龍驤衛中領別將)을 지냈다.

김대(金 岱) 자는 경앙(景仰). 1520년(중종 15)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예조 정랑(禮曺正郞)을 제수받았다.

김입(金 岦) 자는 탁경(卓卿), 호는 뇌석(瀨石). 조선 때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을 역임했다.

김응길(金應吉)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다.

김수항(金壽恒)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김응현(金應賢) 조선조에 병교절위(秉節校尉)․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詞果)를 지냈다.

김응철(金應哲) 조선 때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詞果)을 역임했다.

김대요(金大鐃) 조선(朝鮮) 때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역임했다.

김광위(金光渭) 초명은 광한(光瀚). 1595년(선조 2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했다.

김성휘(金聖輝) 자는 인길(獜吉), 호는 일수정(逸睡亭). 1629년(인조 7)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김성형(金成泂) 조선 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했다.

김 흡(金 洽) 자는 군택(君澤). 1671년(현종 12)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절충잔군(折衝將軍)․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을 역임했다.

김색(金 氵策) 조선조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신기(金愼機) 호는 죽헌(竹軒). 조선(朝鮮) 때 경양 찰방(景陽察訪)을 역임했다.

김잡(金 磼) 자는 군실(君實). 1618년(광해군 1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621년(광해군 13)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어영청 천총(御營廳千摠)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싸우다가 삭녕(朔寧)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김만익(金萬益) 자는 대유(大有), 호는 청량(淸량). 1681년(숙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공조 좌랑(工曺佐郞)을 지내고, 장연 현감(長連縣監)․예조 정랑(禮曺正郞) 등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김응문(金應文) 자는 도원(道遠). 1756년(영조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曺正郞) 겸 춘추관 기사(春秋館記事)․경남도 장시도사(慶南道掌試都事) 등을 역이했다.

김섭(金 燮) 자는 화숙(和淑), 호는 소용재(疎慵齋).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창혁(金昌赫) 자는 찬보(燦甫). 조선조(朝鮮朝)에 절충장군(折衝將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김원구(金元龜) 자는 정서(廷瑞). 1637년(인조 15)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헌릉 참봉(獻陵參奉)이 되었다.

김인(金 仁) 1624년(인조 20) 영릉 참봉(英陵參奉)이 되었으며, 뒤에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냈다.

김하석(金夏錫) 자는 몽득(夢得), 호는 졸재(拙齋). 1673년(현종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지냈다.

김충수(金忠守) 호는 창죽헌(蒼竹軒). 1700년(숙종 16)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세운 공훈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1740년(영조 16) 장령(掌令)에 추증(追贈) 되었다.

김함(金 涵) 자는 경현(敬賢), 호는 금재(錦齋).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세운 공훈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1740년(영조 16)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김계조(金繼祖) 자는 백술(伯述). 1708년(숙종 34) 효행(孝行)으로 호조 참판(戶曺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성주(金聖柱) 자는 경여(慶餘). 1708년(숙종 34)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용야위 부호군(龍嚷衛副護軍)이 되었다.

김계원(金繼遠) 자는 정술(正述). 1772년 제릉 참봉(齊陵參奉)이 되고, 1775년(영조 51)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특채(特採)되었다.

김정제(金鼎濟) 자는 태보(台甫). 1772년(영조 48)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강릉 참봉(江陵參奉)이 되고, 1793년(정조 17)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김중려(金重呂) 자는 여일(汝一), 호는 죽사(竹沙). 1805년(순조 5) 충의(忠義)로 처거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용양위 부호군(龍嚷衛副護軍)이 되었다.

김치곤(金致坤) 자는 시약(時若). 1810년(순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고, 1819년(순조 19)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렀다.

김대곤(金大坤) 자는 원약(元若), 호는 낙설(樂卨).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1821년(순조 21)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1841년(헌종 70 병조 참지(兵曺參知)에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했다.

김규찬(金奎燦) 자는 덕장(德章), 호는 야암(野巖). 1827년(순조 27)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 되고 이듬해 아산 군수(牙山郡守)를 역임했다.

김석보(金錫輔) 자는 가익(可翊), 호는 연고(蓮皐). 1835년(헌종 1) 사마시(司馬試)에, 1864년(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합격하고, 1869년(고종 6) 호조 참의(戶曺參議)․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

김석희(金錫熙) 자는 경가(敬可), 호는 재애(霽厓). 1837년(헌종 3) 식년전시(式年殿試)에 병과(兵科)로 급제하고, 1854년(철종 5)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 1857년(철종 8)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했다.

김규한(金奎漢) 자는 응오(應五), 호는 동설(東卨). 1858년(철종 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북부도사(北部都事)를 거쳐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했다.

김희국(金熙國) 자는 윤약(允若), 호는 낙하(洛下). 1858년(철종 9) 식년전시(式年殿試)에 병과(兵科)로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1883년(고종 20) 흥해 군수(興海郡守)를 지냈다.

김형직(金衡直) 자는 삼재(三齋). 1862년(철종 13)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1865년(고종 2)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김기운(金麒運) 자는 성서(聖瑞). 1870년(고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김규화(金奎華) 자는 대직(大直), 호는 소초(小楚). 1874년(고종 11)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다.

김화식(金華埴) 자는 충거(忠擧), 호는 수암(睡巖). 1879년(고종 1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1885년(고종 22)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1893년(고종 30) 현풍 현감(玄風縣監), 이듬해 현풍 군수(玄風郡守) 등을 역임했다.

김규충(金奎衝) 자는 문옥(文玉), 호는 연서(蓮西). 1882년(고종 19)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이 되고, 1900년(광무 4) 의흥 군수(義興郡守), 1902년(광무 6) 봉화 군수(奉化郡守)를 역임했다.

김원섭(金源燮) 자는 문화(文華), 호는 영사(永思). 1888(고종 25)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했다.

김장권(金長權) 자는 태경(台卿), 호는 야은(野隱). 1891년(고종 28)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석원(金錫源) 자는 순입(順入). 1891년(고종 2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지냈다.

김종섭(金種燮) 자는 응문(應文), 호는 만향(晩香). 1904년(광무 8)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제수받고,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김기우(金基禹) 자는 문익(文益), 호는 술와(術窩).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했다.

김배혁(金培赫) 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롤 1919년 도미(渡美)하여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영문 잡지를 만들어 국내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였으며, 귀국하여 수양동우회 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체포되어 복역(服役)하고 있을 때 해방되어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