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배천김씨시조(白川金氏),김선(金善),배천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7 09:24 수정일 : 2018-04-14 15:3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배천김씨(白川金氏)는 시조(始祖) 김선(金 善)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의 25세손이며, 조선 성종(成宗) 때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를 지냈다.

그는 서기 1476년(성종 7) 화(禍)를 입고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에 유배(流配)되어 그 곳에서 살았는데, 후손들이 배천(白川)으로 이주(移住)하여 배천(白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배천(白川)은 황해도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연백군(鉛白郡)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도랍현(刀臘縣) 또는 치악성(雉岳城)이라 하였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는 구택(雊澤)으로 고쳐서 해고(海皐)에 속했다가 고려 초에 백주(白州)로 불렀으며, 1413년(태종 13) 배천(白川)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시조 선(善)의 아들 곤(崑)과 증손 식(殖)이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현손(玄孫) 옥석(玉碩)은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 품계)에 올라,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오른 후손 능선(能善), 부호군(副護軍) 우성(禹聲)․태화(兌華), 중추부사(中樞府事) 계성(繼星)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승학(承學)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과 광복군(光復軍) 모집에 공헌했으며, 경하(景河)는 여순(旅順) 감옥에 수감(收監)중인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탈출을 계획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며, 조국과 민족(民族)을 위하여 일생(一生)을 바쳐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배천김씨(白川金氏)는 전국에 1,4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배천김씨조상인물

김선(金 善) 조선 때 전라도 좌수사(全羅道左水使)를 역임하였다.

김곤(金 崑)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식(金 殖)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김옥석(金玉碩)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김여석(金麗碩) 조선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김능호(金能浩) 조선 때 봉사(奉仕)를 지냈다.

김능선(金能善)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팽수(金彭壽) 조선조(朝鮮朝)에서 봉사(奉仕)를 지냈다.

김응상(金應祥) 조선 때 조방장(助防將)을 역임.

김우성(金禹聲)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계립(金繼立) 조선 때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다.

김태화(金兌華)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윤립(金潤立) 조선 때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했다.

김봉척(金鳳倜) 조선 때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역임.

김만광(金萬光)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용흥(金龍興)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김계성(金繼星)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

김진려(金振麗) 조선 때 첨사(僉使)를 지냈다.

김응춘(金應春)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김계홍(金繼弘) 조선 때 내금위(內禁衛)을 역임.

김종서(金宗瑞)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

김상록(金祥祿)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 역임했다.

김광록(金光祿)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광운(金光雲)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경하(金景河) 1879년(고종 16) ~1949 독립운동가, 호는 국산(菊山). 수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45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의 신탁통치(信託統治)를 결사반대하는 혈서(血書)를 써서 민족정기를 드높였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대통령포상이 내려졌다.

김승학(金承學) 1881년 (고종 18) ~ 1964

자는 우경(愚敬), 호는 희산(希山).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했으며, 의민부(義民府) 총무부장, 광복군 사령부 군정국장(軍政局長) 겸 군수국장(軍需局長)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議政院議員) 및 학무부 차장, 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 참모장,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최고의원 등의 요직을 겸임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독립신문사 사장, 한국 독립당 감찰위원장, 편찬위원장, 건국공로자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김시형(金時馨) 1894 ~ 1951

자(字)는 덕경(德卿), 호는 난곡(蘭谷).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약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미․소(美․蘇)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대통령포상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