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덕수김씨(德水金氏),김수연(金壽延),덕수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4 21:34 수정일 : 2018-04-14 12:42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덕수 김씨(德水金氏)는 해풍김씨(海豊金氏)와 동원(同源)으로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이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덕수(德水)로 하게 되었다.

덕수(德水)는 경기도(京畿道) 개풍군(開豊郡)에 속해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덕물현(德勿縣) 또는 인물현(仁物縣)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덕수현(德水縣)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와서 해풍군(海豊郡)과 합하여 풍덕부(豊德府)로 승격되었으나 후에 개성군(開城郡)의 개(開)자와 풍덕(豊德)의 풍(豊)자를 따라 개풍군(開豊郡)으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그리하여 후손들로 풍덕(豊德)에 세거(世居)하면서 조선조(朝鮮朝)에서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오른 수연(壽延)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고, 수연(壽延)의 아들 세형(世亨 : 장사랑에 오름)과 세창(世昌 : 어모장군에 오름)의 형제대(兄弟代)에서 가문(家門)이 크게 중흥하였다.

그후 퇴계(退溪) 이 황(李 滉), 정응두(丁應斗) 등과 함께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희성(希聖)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지내며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춘(春 : 문과에 급제하여 전직을 역임)과 추(秋 : 직강을 역임)가 뛰어났다.

그외 효종(孝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두익(斗翼)이 군수(郡守)를 지냈고, 광악(光岳)은 수찬(修撰)과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수김씨(德水金氏)는 전국에 3,4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덕수김씨조상인물

김천일(金天一) 고려(高麗) 때 지후(祗侯)를 지냈다.

김 대(金 岱)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김재인(金在人) 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냈다.

김 니(金 泥) 조선(朝鮮)에서 음보(蔭補)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고령 현감(高靈縣監)을 지내고 숭의대부(崇義大夫)․의금부 판사(義禁府判事)에 증직(贈職)되었다.

김 평(金 枰)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수연(金壽延) 조선(朝鮮) 때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올랐다.

김수윤(金壽胤) 조선 때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교수(敎授)를 지냈다.

김세형(金世亨)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김세창(金世昌) 자(字)는 언성(彦盛), 교위(校尉) 수연(壽延)의 차남.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김희성(金希聖) 1507 (중종 2) ~ 1544 (중종 39)

자(字)는 언명(彦明), 장사랑(將仕郞) 세형(世亨)의 아들. 1534년(중종 29)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제수(除授) 받았으나 진복창(陳復昌)의 질투(嫉妬)로 파직(罷職)당했다.

김한좌(金漢佐) 어모장군(禦侮將軍) 세창(世昌)의 아들. 1556년(명종 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광돌량 첨사(廣突梁僉使)를 지냈다.

김 질(金 軼) 생원(生員) 수윤(壽胤)의 차남. 1543년(중종 38) 무과(武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황해 병사(黃海兵使)를 거쳐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냈다.

김예종(金禮宗) 1564년(명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 춘(金 春) 희성(希聖)의 아들.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을 지냈다.

김 추(金 秋) 선조(宣祖)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직강(直講)을 지냈다.

김경휘(金景輝) 1603년(선조 3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전적(典籍)을 지냈다.

김극휘(金克輝) 1609년(광해군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김 의(金 疑) 1660년(현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수(敎授)를 역임하였다.

김 집(金 集) 생원(生員) 극휘(克輝)의 아들. 1625년(인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김두익(金斗翼) 1660년(현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 진(金 振)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김집익(金集翼) 1680년(숙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감상위(金尙緯) 1676년(숙종 2)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였다.

김광악(金光岳) 1759년(영조 3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현감(縣監)과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김시탁(金時鐸) 1713 (숙종 39) ~ 1751 (영조 27)

자(字)는 자목(子木), 호(號)는 이호(梨湖). 개성(開城) 출신. 이 재(李 縡)의 문인. 조선(朝鮮)의 학자(學者)로 유명했고, 특히「소학(小學)」과「근사록(近思錄」을 깊이 연구, 그 실천을 궁극 목표로 삼았다. 개성의 이호사(梨湖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