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금산김씨시조(錦山金氏),김신(金侁),금산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7:38 수정일 : 2018-02-21 12:20

금산김씨시조

신라(新羅) 김씨의 맥(脈)을 이어온 금산김씨(錦山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 : 말, 목장 등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 3품 벼슬)을 지낸 정보(正寶)의 13세손 김신(金侁)이 요양성 참정(遼陽省參政)을 지낸 후 귀국하여 금주군(錦州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김신(金侁)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금산(錦山)으로 하여 경주 김씨(傾注金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본관의 유래

금산(錦山)은 충청도남동부에 위치하며, 백제(百濟) 시대에는 진내(進乃) 또는 진내을(進乃乙)이라 부르다가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 진례(進禮)로 하였다.

서기 983년(고려 성종 2)에는 금계(禁溪)로 하여 전라도에 속하게 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다시 금주(錦州)로 고쳤으며, 조선(朝鮮) 때인 서기 1413년(태종 13)에 지금의 금산(錦山)으로 개칭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충간공(忠簡公) 신(侁)의 맏아들 세유(世宥)는 부원수(副元帥)를 지냈으며, 차남광유(光宥)는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대(代)를 이었다.

1370년(공민왕 19) 문과(文科)에 급제한 지(摯)는 광유(光宥)의 증손(曾孫)으로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를 거쳐 사의대부(司義大夫)․좌사간(左司諫)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태종(太宗)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제수(除授)하여 그를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충절을 지켰다.

한편 선조(宣祖)때 문과(文科) 급제한 희옹(希雍)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광해군(光海君) 때 등과한 감(鑑)은 광유의 11세손으로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한 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곡성(谷城)에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아들 남식(남植)․남억(南億) 형제와 함께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외 인물(人物)로는 남억(南億)의 6세손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언장(彦章)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언태(彦兌), 좌승지(左承旨) 언익(彦翊)이 유명했고, 언익의 아들 의흥(義興)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여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평(平 : 언태의 아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대휘(大輝)․인해(仁海)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금산김씨(錦山金氏)는 남한(南韓)에 16,234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금산김씨조상인물

김세유(金世宥) 고려에서 부원수(副元帥)를 지냈다.

김광유(金光宥) 고려(高麗) 때 전서(典書)를 역임.

김 경(金 璟) 고려 때 전서(典書)를 지냈다.

김 규(金 珪) 고려(高麗) 때 전서(典書)를 역임.

김 현(金 現) 고려에서 사인(舍人)을 지냈다.

김 당(金 璫) 고려조(高麗朝)에서 전서(典書)를 엮임.

김 진(金 瑨)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

김진우(金震禹) 고려 때 판서(判書)를 역임.

김성우(金性禹) 고려에서 사재령(司宰令)을 역임.

김중근(金重近) 조선(朝鮮) 때 선전관(宣傳官 )을 지냈다.

김수온(金壽蘊)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

김수용(金壽蓉)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 지(金 摯) 자는 주, 호는 농암(籠巖), 좌사간(左司諫)을 역임.

김의행(金義行) 조선조(朝鮮朝)에 도사(都事)를 역임.

김효공(金孝恭) 호는 청호(淸湖), 목사(牧使)를 역임.

김대보(金大寶)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김 여(金 茹) 조선에서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김 근(金 瑾) 자는 형진(亨珍), 호는 수재(修齋), 현감(縣監)을 역임.

김 기(金 璣) 조선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 진(金 震) 조선 때 감정(監正)을 역임.

김정철(金廷哲) 자(字)는 명숙(明淑), 호(護)는 묵암(黙庵),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김희옹(金希甕) 자는 화중(和中), 1587년(선조 11) 문과에 급제하고 경기 감사(京畿監事)․한성판윤(漢城判尹)․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김만일(金萬鎰)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김응서(金應瑞) 조선 때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김응수(金應秀) 자(字)는 응세(應洗).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김 함(金 涵) 자는 인지(忍之). 좌부장(左部將)을 지냈다.

김구성(金九成)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김응사(金應嗣) 자는 계백(繼伯),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태리(金兌利) 자는 부원(父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김태화(金兌和) 자(字)는 달원(達遠), 현감(縣監)을 역임.

김 진(金 鎭) 자는 중인(仲仁), 호는 오매헌(五梅軒).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 감(金 鑑) 자는 중허(仲虛), 호는 입택(笠澤). 1613년(광해군 5) 문과에 급제,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성절사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곡성(谷城)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했다.

김시건(金時建) 자는 입보(立甫), 별제(別提)를 역임.

김대휘(金大輝)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김후중(金후重) 자는 영옥(榮玉).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인해(金仁海)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김상찬(金尙贊)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